백패킹 가서 놀아줬더니 엄마보다 아빠가 좋대요
"아빠는 산에 가도 일만 할 거잖아!"
다섯 살 아들은 "아빠랑 단 둘이 캠핑 가자"는 제안을 거절했다. 아이의 거절에는 캠팡장 도착과 동시에 짐 풀고, 텐트 치고, 테이블과 의자 펴고, 잠자리와 취사도구 세팅하고, 요리하고, 식사하고, 뒷정리 하느라 자신과 놀 시간이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아이에게 아빠는 캠핑장에서도 자신을 바라보기보다는 캠핑 자체에 몰두하느라 바쁜 사람이었다.
순간 아빠는 지금까지 숱하게 캠핑했던 시간이 아이를 위한 시간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아이에게 약속했다. 텐트 설치 시간을 30분 이내로 줄이고, 함께 텐트 치고, 함께 정리하고, 같이 놀이하자고 제안했다. 각자의 시간이 아닌 부자父子가 함께하는 시간을 갖기로 약속한 것.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2021년 5월 5일 어린이날을 시작으로 대소사가 없는 날은 거의 매주말 백패킹을 떠났다. 짐을 줄여 빠르게 텐트를 설치하고, 자연 속에서 두 사람이 마음껏 즐기는 시간을 가지려면 캠핑보다는 백패킹이 최적이었다. 보통 한 달에 3번, 최소 한 달에 한 번 이상 아빠와 아들만의 백패킹 시간을 가졌다.
세종시에 거주하는 박준형(43)씨는 아들 서진(7)군과 백패킹 후기를 인터넷 카페에 올렸고, 이 기록이 40회를 넘게 되면서 책으로 출간하게 되었다. 이 책이 <오늘도 아이와 산으로 갑니다>이다.
"후기를 올리면, 많은 분들이 댓글을 달아요. 대부분 '부럽다'거나 '이상적이다.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 '용기를 얻어 아이와 다녀왔다' '가려고 장비를 샀다'는 긍정적인 내용이었어요. 정말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걸 확인했어요. 출판이 약해졌다고 하지만, 저는 종이 책과 독서의 힘을 믿어요. 지금도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보다는 도서관 가서 책을 찾아봐요. 제 경험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눠줄 수 있을까 해서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한 발씩 가다보면 정상 간다 했잖아"
그는 백패킹 육아의 장점으로, 부자 사이가 가까워진 것과 독립심이 생긴 것, 자기효능감이 생긴 것을 꼽는다. 가족 사이는 가까워졌고, 아이는 육체적·정신적으로 강하게 성장했다고 한다.
또래 아이들이 보통 엄마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반면, 서진이는 아빠에게 이야기한다. "학원 가기 싫다"고 해서 엄마가 이유를 물어보면 즉답을 안 하는데, 아빠가 이야기하면 속사정을 말하는 것.
2022년에는 한 TV 프로그램에서 산악인 허영호 대장과 관악산 산행편에 출연했는데, 하필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서진이가 걱정된 허영호 대장이 손을 잡아주겠다고 여러 번 내밀었으나, "혼자 가겠다. 괜찮다"며 거절했다. 허영호 대장이 멋쩍어 할 정도로 자기표현을 확실히 하게 되었다. 박씨는 "원래 아이가 인사도 못 할 정도로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이었는데 산행을 하면서 활발해졌다"고 한다. 산에서 마주 오는 사람과 인사하는 습관 덕분에 이젠 어디서나 우렁차게 인사를 한다.
지난해 여름에는 세종시의 지역 수영대회에 나갔는데, 출발이 늦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스타트 소리를 못 들었다는 것. 그럼에도 결승점에 1등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1등을 했냐고 묻자, 이렇게 얘기해 아빠를 웃음 짓게 했다.
"아빠가 항상 산에 가면 얘기했잖아.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한 발씩 가다보면, 정상 간다고. 그래서 차근차근 가다 보니 그렇게 됐어."
그가 말하는 자기효능감自己效能感은 심리학 용어인데, 한계점이 왔을 때 극복하고 나아가는 힘이 생겼다고 한다. 부자 백패킹에서는 불문율 같은 원칙이 있는데, 디지털의 최소화다. 산으로 나서는 순간, 스마트폰이나 디지털기기는 최소로 사용하며, 사진 찍거나 길 찾는 용도로만 쓴다. 모든 시간은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 나누고, 게임하고, 책을 읽는 시간으로 채워진다.
아빠의 배낭은 보통 23kg에 이르고 겨울에는 최대 33kg에 이른다. 아이도 4kg의 무게를 멘다. 아빠의 배낭이 무거운 것은 야영장비도 있지만, 어둠이 내린 후 텐트 안에서 할 보드게임과 읽을 책 때문이다. 스마트폰 게임 대신 오감을 소통하는 게임을 하고 지적인 즐거움을 누리는 것.
서진군의 자기효능감이 높아진 것은 쉽지 않았던 많은 산행 덕분이다. 지난해 1월 눈 쌓인 민주지산을 갔는데, 등산 베테랑도 쉽지 않은 물한계곡~정상~석기봉~삼도봉~물한계곡 1박2일 산행이었다. 삼도봉에서 1박할 예정이었으나, 동행한 부녀의 컨디션이 나빠 속도가 더뎌졌고, 결국 석기봉 가는 능선의 좁은 곳에 텐트를 쳤다. 어른에게도 어려운 산행이었으나 아이는 다음날 안전하게 산행을 마쳤다.
산행을 거듭하며 노하우가 쌓인 덕분인지, 아이는 스스로 어려움을 헤쳐 나갔다. 민주지산의 깔딱고개라 부를 만한 곳에서는 "아빠 나 걸음에 집중할게. 말시키지 마"라며 걱정하는 아빠를 안심시켰고, 때론 "1분만 쉬고 싶어"라고 의사를 표현하고 "더 쉬어도 된다"는 아빠의 말을 끊고 1분 뒤에 곧장 일어났다. 특히 남은 거리를 정확히 알고 싶어 했다. 그래서 박씨는 "1부터 10 중에 7 정도 왔어, 8 정도 왔어"라고 남은 거리를 비교적 정확하게 알려 준다. 하루하루 산에서 아들의 몸과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음을 박준형씨는 체감한다.
늘 계획했던 산행을 완벽히 한 건 아니다. 포기했던 산도 있었다. 전남 화순 백아산을 갔을 땐 비바람을 만났다. 장대비가 계속 쏟아져 우비와 레인커버를 했음에도 몸과 배낭이 쫄딱 젖어 산행을 포기하기도 했다. 2022년 12월 설산을 가고 싶어 방장산에 갔는데, 스패츠를 놓고 오는 바람에 아이의 신발 속으로 눈이 스며들었다. 목적지를 포기하고 길목에 텐트를 설치했는데, 텐트 안에서 보니 아이의 양말이 다 젖어 있어 동상이 걸리지 않도록 주무르고 핫팩으로 녹였다. 다음날 예정했던 코스의 산행은 포기하고 하산했다.
그날 일이 마음에 남았던 서진군은 몇 개월 후 먼저 "방장산에 가고 싶어"라고 말했다. 목적했던 억새봉에 먼저 올라서서 "아빠, 여기 진짜 멋있어! 오자고 하길 잘했지!"라고 외치는데, 그 순간 박씨는 가슴이 뭉클해질 정도로 기뻤다고 한다.
아빠가 강권해 아이를 산에 데리고 가는 것 아닌가 하고 걱정하는 이도 있으나, 오히려 산에 가지 않으면 실망할 정도로 백패킹에 빠져들었다. 2022년 12월 26일 백패킹을 가기로 일주일 전부터 약속했으나 한파 경보였다.
"안 되겠다 싶어 다음으로 미룰까 했는데, 서진이가 실망하면서 '여섯 살 때 가고 싶은 산을 일곱 살 때 가고 싶지 않아요'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너무 놀랐죠. 결국 핫팩만 3kg 짊어지고 일행까지 구해서 비교적 안전한 곳으로 갔어요. 체감온도 영하 20℃에 이르는 추위 속에서도 아들과 단 둘이 포근하게 잤어요."
그는 아이와 함께하는 만큼 합법한 테두리 안에서 야영을 한다. 산에서 늘 비화식으로 식사를 하는 것이 기본이고, 보온병에 담아온 온수를 적극 활용한다. 군립공원인줄 모르고 올랐던 산을 제외하고는 야영 가능한 곳에서만 하룻밤을 보낸다. 국립공원을 비롯한 공원 구역이 아니고, 산주나 지자체에서 야영을 금지하지 않았다면, 화기 사용 없이 야영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
2,000m대 일본 북알프스 아들과 올라
서진군이 오른 최고 고도는 2,452m, 일본 북알프스 니시호 마루야마西穂 山荘이다. 산장 앞 야영이 허가된 곳에서 텐트를 치며 산행하는 코스를 잡았다. 케이블카의 도움을 받고 산행해 2,385m의 산장 앞 설원에서 텐트를 치고 1박한 뒤, 다음날 정상에 올랐다가 하산했다. 그러나 엄청난 눈보라로 시야가 5m밖에 보이지 않아 계획했던 코스를 포기하고, 단축 코스로 하산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북알프스에서 고생한 아들이 아빠를 원망하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오히려 "우리는 2,452m 산도 오른 백패커잖아. 다음에는 한라산도 가고, 지리산도 가자.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아"라며 자신감을 표현했다.
아빠는 주말 선택권을 아이에게 준다. "키즈카페 갈래? 산에 갈래?" 묻고, 산이라고 답하면 "당일산행 갈래? 백패킹 갈래?"하고 다시 묻는다. 3년 넘게 산에 다닌 서진이는 백패킹 횟수만 40회가 넘어, 성인 등산인 못지않은 경험치를 갖고 있어, 자신이 가고 싶은 산을 아빠와 상의해서 꼼꼼히 고른다.
박준형씨는 제주도에 대한 애정에서 등산을 시작했고, 아내와의 만남, 그리고 결혼까지 이어졌다. 서울에서 살았으나 제주도에 빠져 1년에 20회 정도를 찾았다. 제주도를 좀더 자세히 보기 위해 한라산 산행을 시작해 등산에 빠지게 되었다. 또한 우연히 한라산 산행 중 만난 사람이 지금의 배우자가 되었다.
산행 중 우연히 대화한 것이 인연이 되어 연애와 결혼으로 이어졌다. 산에서 만난 인연으로 산행과 오토캠핑을 골고루 했다. 아들 하나만 있을 때는 온 가족이 오토캠핑을 다녔으나 2021년 둘째 서하 양이 생긴 후로는 부자父子 백패킹을 주로 하고 있다.
한라산 산행 중 우연히 만나 결혼
사람들이 많이 묻는 것 중 하나가 어린이 등산장비다. 그는 "아이 장비 구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한다. 대부분의 국산 아웃도어 브랜드는 "등산복 형태를 딴 일상복을 만든다"며 "그나마 기능성 소재로 아이 등산복을 만드는 곳이 블랙야크"라고 한다. 워낙 많이 듣는통에 관련 내용만 정리해서 인터넷에 올려놓았다고 한다.
그에게 백패킹이 아이 성장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물었다.
"스마트폰 같은 문명의 이기와 떨어질 수 있어요. 그게 첫 번째로 가장 좋은 효과예요.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없어도 즐겁게 놀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돼요. 솔방울 하나, 나뭇가지 하나 가지고도 정말 즐겁게 놀 수 있거든요. 언젠가는 아이가 스마트폰을 가까이 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아요."
그렇다고 디지털을 적대시하지는 않아요. 집에서는 TV도 보고 PC게임도 같이 해요. 다만 자연과 도시 생활의 균형을 맞춰 주고 있어요. 그게 부모의 역할이라 생각해요. 그래서인지 서진이는 디지털이나 게임에 의존적이지 않아요."
박준형씨의 <오늘도 아이와 산으로 갑니다>는 백패킹 육아 서적으로는 국내 최초인 듯싶다. 산행으로 산 속에 들어가 텐트를 치고 자는 백패킹은 육아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해 단체 활동에 제약이 생기고, 디지털 중독이 심각해지며, 대안으로 백패킹의 영역이 넓어지고 있다. 새로운 아웃도어 활동의 물결 선두에 박준형 부자가 있다. 그의 후기를 통해 숱하게 많은 아빠들이 배낭을 메고 자녀와 함께 자연으로 향했다. 그에게 책에서 하고 싶은 핵심 메시지를 물었다.
"아이들과 함께 자연으로 나가보세요.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딱 그 메시지를 주고 싶었어요. 결혼 전에는 놀러 다니고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고 그랬는데, 결혼 후에는 가족이랑 보내는 시간이 더 소중해요. 아이가 맑고 밝게 자랐으면 좋겠어요. 몸의 건강도 중요하지만 정신이 건강하면 좋겠어요. 요즘 사회가 굉장히 피곤한 경쟁 사회잖아요. 자기 생각을 바르게 펼치면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월간산 3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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