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진 게 죄가 된 24세 카리나

안진용 기자 2024. 3. 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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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그룹 에스파 카리나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결국 걸그룹 에스파의 카리나가 사과했다. 전후 맥락을 떼어놓고 보면, 그가 큰 사회적 물의라도 빚은 것으로 착각할 법한 모양새다.

혹자가 질타한 카리나의 잘못(?)은 하나다. 사랑에 빠졌다. 누군가는 이 감정을 ‘잘못’이라고 보는 셈이다. 게다가 그 누군가는 카리나의 팬을 자처한다.

카리나는 4일 자신의 SNS에 배우 이재욱과의 교제 인정 후 처음으로 자필 편지를 통해 심경을 전했다. 그는 “우선 많이 놀라게 해드려 죄송하고 또 많이 놀랐을 마이들에게 조심스러운 마음이라 늦어졌다”면서 “그동안 저를 응원해준 마이(팬덤)들이 얼마나 실망했을지 그리고 우리가 같이 나눈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속상해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고 고개 숙였다.

이어“혹여나 다시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무릅쓰고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데뷔한 순간부터 저에게 가장 따뜻한 겨울을 선물해준 팬분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며 “마이들이 상처받은 부분 앞으로 잘 메워나가고 싶다. 마이들에게 항상 진심이었고 지금도 저한테는 정말 소중한 한 사람 한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볕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다 했던가. 카리나의 높은 인기 만큼 반발도 거셌다. 이재욱과의 교제 사실이 알려진 후 트럭 시위도 등장했다. 한 트럭 전광판에는 “카리나. 팬이 너에게 주는 사랑이 부족하니”, “당신은 왜 팬을 배신하기로 했냐. 직접 사과해달라”는 등의 문구가 담겼다. 기가 막힌 논리다. 팬들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있으니 다른 사람을 만날 생각하지 말라는 주장이다.

이는 왜곡된 팬덤이다. 스타의 팬의 관계를 ‘유사 연애’로 보는 것이다. “넌 나와 연애 중인데, 왜 다른 남자를 만나니?”라는 외침과 다름없다.

이는 K-팝 시장의 고질병이다. 과거 한 보이그룹 멤버와 교제 사실이 알려진 걸그룹 멤버에게는 칼과 혈서가 배달됐다. 이런 극성 팬덤이 K-팝 시장을 성장시켰고, K-팝 그룹이 온갖 팬이벤트를 통해 이런 유사 연애 감정을 극대화시켰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부지불식간, 스타와 팬을 ‘사랑하는 사이’로 착각하게 만드는 셈이다. 문제는 적절한 선을 긋는 팬이 있는 반면, 그 착각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대는 이들도 있다는 것이다.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라는 한 드라마 속 대사를 빌리자면, 카리나에게는 딱히 죄가 없다. 하지만 일부 팬덤은 무시무시하게 단죄하려 든다. 트럭 시위를 진행한 한 팬의 목소리는 더 섬뜩하다.

“사과하지 않으면 하락한 앨범 판매량과 텅 빈 콘서트 좌석을 보게 될 거다.”

이건 애정이 아니다. 경고이자 협박이다. “오늘 할 일 다 해놓지 않으면 저녁밥은 없어!”라는 유치한 동화 속 대사와 진배없다. 아니, 그 이상이다. 동화 속 주인공은 혼자 밥 한끼 굶을 결심하고 태업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카리나는 다르다. 그를 향한 날 선 질타가 이어지자 에스파라는 그룹 전체가 흔들리고 소속사인 SM엔터테인먼트의 주가가 흔들린다.

이런 상황에서 카리나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일까? 몇몇 팬덤의 입맛에 맞춘 사과 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 카리나가 “이재욱과 헤어졌다”고 선언하면 팬덤의 마음이 달라질까? 역시 몇몇 팬덤은 반길 수 있다. 하지만 대중은 팬덤의 눈치를 보느라 자신의 감정조차 표출하지 못하는 그를 안쓰럽게 바라볼 것이다. 더 나아가 그의 선택이 경솔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이는 비단 카리나만 겪는 상황이 아니다. 팬덤이라는 강력한 지지 세력을 기반으로 성장한 모든 K-팝 그룹의 숙명이다. 많은 이들이 그 나잇대에 당연히 분출해야 할 감정을 거세당한다. 아니면 숨겨야 한다. 잘못이 아닌데 숨겨야 하는 마음은 과연 어떨까?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지만, 연예인 활동이 정서를 더 없이 황폐화시키는 감정 노동으로 불리는 이유다.

앞선 주장대로 ‘앨범 판매량과 텅 빈 콘서트 좌석’이 두려워 팬덤이 원하는 방향으로 해야 하는 K-팝 스타의 마음에는 얼마 만큼의 진심이 담길 수 있을까? 이솝우화에서 행인의 옷을 벗기기 위해 태양과 바람이 대결을 한다. 바람은 옷을 날려버리기 위해 더 강한 바람을 뿜어대고, 행인은 옷깃을 더 강하고 붙잡는다. 아주 고통스럽게. 강한 바람으로 행인이 옷이 벗겨지고, 추위와 수치감에 벌벌 떠는 행인을 보며 바람은 기뻐할까? 따뜻한 온기로 스스로 옷을 벗고 햇볕을 즐기게 하는 태양의 지혜가 팬덤에게도 필요할 때다.

아쉬운 건, 언론은 카리나의 결심과 사생활을 존중하는 대다수의 태양같은 팬덤보다는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같은 팬덤의 극성스러운 목소리를 더 자주 기사화하고 쟁점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카리나는 2000년생이다. 올해 나이 24세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울 나이다. 그리고 그 역시 누군가를 사랑할 나이다.

안진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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