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불과 ‘30년’ 만에 망했다, 쇠말뚝 때문이 아니다

길윤형 기자 2024. 3. 6.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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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윤형의 조선의 갈림길 _01
고종은 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던 최고 국정 책임자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강화도 조약에서 을사조약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30년이었다. 이제 한국을 번영으로 이끌었던 탈냉전 30년이 끝나고, 불길한 새 30년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 지금처럼 한반도를 둘러싼 힘의 균형이 급격히 변하던 19세기 후반, 조선 앞에는 수많은 ‘갈림길’이 놓여 있었다. 역사의 새로운 분기점에서 ‘조선의 갈림길’을 곱씹어 보는 것은 2024년 한국인들에게도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다.

“혹시 내가 행복해 보인다면, (정말) 그렇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말 훌륭한, 훌륭한 회담이었습니다.”

그날 미국 대통령의 여름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엔 부드러운 여름 햇살이 내려앉고 있었다. 울창한 나무숲 사이로 난 조촐한 오솔길을 따라 한·미·일 세 나라의 지도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국 동부 시간으로 2023년 8월18일 오후 3시14분, 한국 시각으로는 이튿날 새벽 5시14분이었다. 가운데 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느린 발걸음으로 연단에 올라 옅은 미소를 지으며 “우리는 역사적인 순간을 만들기 위해 역사적 장소에서 만났다”면서 “한·미·일 파트너십의 새 시대”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발언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이날 한국은 1948년 8월 정부 수립 이후 처음 한반도를 35년 동안 식민지배했던 일본과 ‘군사 동맹’으로 가는 첫발을 내디뎠다. 세 나라는 “공동의 이익과 안보에 미치는 지역적 도전·도발·위협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응을 조율하기 위해 각국 정부가 3자 차원에서 서로 신속하게 협의할 것을 공약한다”고 했고, “우리의 조율된 역량과 협력을 증진하기 위하여 3자 훈련을 연 단위로 정례 실시”한다고 서약했다. 세 나라가 외부의 위협이 발생할 경우 ‘신속히 협의’하고 매년 정기적으로 훈련까지 한다고 했으니, 머잖아 그렇게 길러낸 세 나라의 연합 역량을 ‘공통의 적’을 상대로 행사하는 선택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에 대한 ‘반작용’은 채 한달도 되지 않은 시점에 나왔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그해 9월13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극동의 아무르주 보스토니치 우주기지에서 얼굴을 마주한 것이다. 한·미·일 세 나라가 북한의 위협과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기 위해 본격적인 군사 동맹으로 가는 발걸음을 떼자, 냉전 해체 이후 지난 30여년 간 데면데면하던 북-러의 전략적 협력이 일순간 강화된 것이다.

김 위원장은 이후 한반도 전체를 경악하게 하는 놀라운 발언을 쏟아낸다. 2023년 12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8기 9차 전원회의에서 한국을 겨냥해 “미국의 식민지 졸개에 불과한 괴이한 족속들과 통일문제를 논한다는 것이 우리 국격과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고, 지난 1월15일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0차회의 시정연설에선 “대한민국은 화해와 통일의 상대이며 동족이라는 현실모순적인 기성 개념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철저한 타국”으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남북이 반세기 전인 1972년 7·4 공동선언을 통해 확인한 3대 통일원칙과 1991년 12월 ‘남북 기본 합의서’에서 합의한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한 관계”라는 개념을 사실상 폐기한 것이다. 그로 인해 한국의 진보 세력이 냉전 이후 30여년 동안 추진해 온 ‘햇볕 정책’이 사실상 길을 잃었고, 남북 분단이 영구화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커지게 됐다.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급격히 요동치는 ‘근본 원인’은 이 지역을 둘러싼 힘의 균형이 급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힘이 맞부딪히는 결절점에 자리해 있다. 대륙 세력은 중국·러시아이고, 해양 세력은 일본·미국이다. 이 힘의 균형이 바뀔 때마다 한반도는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아왔다. 해양 세력인 일본이 대륙 세력인 청과 러시아를 밀어내는 과정에서 조선은 식민지로 전락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이 두 세력이 팽팽히 맞서면서 국토가 분단됐다.

현재 진행 중인 힘의 변화 핵심은 미 국력의 쇠퇴와 그로 인해 발생한 국제질서의 다극화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벌써 3년째로 접어들었고, 가자 전쟁 역시 수습의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11월 미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앞으로 국제 질서의 불확실성이 더 커질 것이다. 이 새로운 힘의 재편 과정에서 한·미·일 3각 동맹과 사실상 핵보유국이 된 북한이 격렬하게 맞서며 분단이 영구화되려 하고 있다. 자칫 한발을 잘못 내디뎠다간 해방 이후 한국 사회가 피땀 흘려 성취한 모든 것을 잃고, 상상하기 힘든 아픔을 감당해야 할 수도 있다.

조선은 19세기 말~20세기 초 한반도를 둘러싼 ‘힘의 균형’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1910년 8월 일본이 강요한 한일병합 원본 문서. 한겨레 자료사진

돌이켜 보면, 지금과 비슷한 살벌한 힘의 변화가 이뤄진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통해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자, 일본과 서구 열강의 힘이 한반도로 거침없이 밀려들었다. 늙은 청 제국은 ‘유일한 속방’을 지키려 몸부림쳤고, 메이지 유신에 성공한 일본은 ‘조선독립’과 ‘내정개혁’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간섭을 시작했다. 시베리아 철도 건설을 통해 극동에 눈을 돌린 러시아는 만주를 틀어쥐며 일본과 대립했다.

이들의 압도적인 힘에 맞서 조선은 독립을 유지하며 국가를 근대화하는 쉽지 않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했다. 그러려면 국가의 인적·물적 역량을 한군데에 집중해야 했다. 이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은 국가의 목표를 설정하기 위한 공적인 의사결정 시스템과 이를 실현해 낼 수 있는 유능한 관료 기구였다. 하지만, 고종(1852~1919)이 숱한 ‘밀지’나 ‘별입시’(독대) 등으로 분별없이 권력을 행사하다 보니, 국가의 공적 기구는 점점 유명무실해졌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왕은 잡아 뗐고, 명을 시행한 이들은 죽거나 귀양갔다.

권력에 대한 믿음이 없다 보니, 국가의 핵심 기밀문서가 상대국에 통째로 유출되는 경우도 있었다. 1895년부터 1905년까지 10년 동안 조선의 외무대신을 지낸 이는 무려 24명이다. 1898년 한해에만 외무대신은 조병직·유기환·이도재·박제순에서 다시 조병직·박제순·민상호를 거쳐 결국 다시 박제순으로 바뀌었다. 국고는 텅텅 비어 청의 북양대신 리훙장은 “국고에 당장 1개월의 비축분도 없다”며 혀를 끌끌 찼다. 황실 예산이 국가 예산을 빨아먹는 ‘이중구조’는 나라가 망할 때까지 바뀌지 않았다.

눈앞에 거대한 ‘쓰나미’(지진해일)가 몰려오고 있는데 국가는 사분오열을 거듭했다. 대원군과 명성왕후 등 민씨 척족은 서로에 대한 증오를 드러내며 으르렁댔고, 고종은 권력을 놓칠까 전전긍긍했다. 정치 엘리트들은 처음엔 개화를 꼭 해야 하는지를 놓고(개화파와 위정척사파), 나중엔 그 방법론(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을 둘러싸고, 이후엔 열강 중 어디를 의지해야 하나에 대해, 종국엔 권력 그 자체를 독점하려 처절하게 대립했다. 타협과 절충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모험적 쿠데타’와 ‘정치 테러’가 판을 쳤다.

권력이 합리적으로 행사되고, 여기에 민의를 반영하려면 입헌민주적인 정치 개혁이 ‘시대의 과제’였다. 나라의 운명은 백척간두에 이르렀는데 느닷없이 등장한 것은 황제의 전제권을 명시한 ‘대한제국’이었다. 1899년 8월 공포된 ‘대한국 국제’ 2조는 대한제국의 정치는 “500년 간 전래되었고 앞으로도 만세토록 불변할 전제정치”라고 못 박고 있다. 고종은 독립 유지를 위해 ‘중립국화’를 추구했지만, 국가적 각오와 실력이 뒤따르지 않은 중립이 가능할 리 없었다.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으려는 마지막 순간 이토 히로부미는 “일반 인민의 의향도 살펴야 한다”는 고종에게 “귀국은 만기 모두 다 폐하의 친재로 결정하는 이른바 군주전제국이 아니냐”고 힐난했다. 한반도가 식민지가 된 것은 일제의 쇠말뚝 때문이 아니었다. 조선은 일제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했다. 냉정히 평가할 때 조선은 자멸했다.

강화도 조약에서 을사조약(1905)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30년이었다. 이제 한국을 번영으로 이끌었던 탈냉전 30년이 끝나고, 불길한 새 30년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 지금처럼 한반도를 둘러싼 힘의 균형이 급격히 변하던 19세기 후반, 조선 앞에는 수많은 ‘갈림길’이 놓여 있었다. 당대인들이라고 고민이 없던 것은 아니었을텐데 왜 실패했을까. 올해는 청일전쟁 개전 130년, 러일전쟁 개전 120년이 되는 해이다. 역사의 새로운 분기점에서 ‘조선의 갈림길’을 차분히 곱씹어 보는 것은 2024년을 살아야 하는 한국인들에게도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2화는 조선의 개화파들과 이들을 둘러싸고 있던 세계 정세에 대해 다룬다.

길윤형 _ 논설위원.
대학에서 정치외교를 공부했다. 도쿄 특파원, 통일외교팀장, 국제부장으로 일하며 일제 시대사, 한-일 과거사,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질서의 변화 등을 둘러싼 기사들을 썼다. 지은 책으로는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아베는 누구인가’ ‘26일 동안의 광복’ ‘신냉전 한일전’ 등이 있고, ‘공생을 향하여’ ‘북일교섭 30년’ 등을 번역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힘은 스스로를 냉정히 돌아볼 줄 아는 ‘자기 객관화 능력’이라고 믿는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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