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黑白) 사이 무한한 '다양성'…예술로 풀어낸 이들
흑백 주제로 회화·조형·사진·영상으로 표현한 크리에이티브 크루 '낫스(Nots)'
"흑백 중간엔 수많은 회색 있잖아요, 극단적인 생각은 편견이고 차별, 다양한 이야기 담고 싶었다"
'하늘색'이란 단어를 들으면 주로 특정 색깔을 떠올린다. 옅은 파랑. 하늘색 크레파스도 한 가지였다. 그걸로 칠하도록 강요되었다.
그 하늘색은, 정말 하늘을 잘 표현하는 색깔일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봉현 작가는 물음을 던졌다.
"다 다르잖아요.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하는 해질 무렵도, 밤하늘도요. 저는 여행을 많이 다니는데 나라마다 온갖 색깔의 하늘을 봤어요. 하늘색이란 단어는 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옅은 파랑색만이 아닌데 말이죠."
고정관념. '살색'이란 말과 비슷한 문제 제기였다. 흑인, 백인, 황인, 그 사이의 다양한 사람들. 그에 따라 다 다른 살색이란 말.
생각이 그리 확장되다 '흑백'이란 단어에도 닿았다. 이분법적인 생각. 좋고 나쁨, 옳고 그름, 어둠과 밝음, 대조의 이미지에만 치중되었다. 그래서 잃는 건 '다양성'이었다. 정말 검은색도, 흰색도 하나뿐일까. 수채화 화가인 호세 작가가 말했다.
"흰색 물감만 봐도 티타늄 화이트, 아이보리 화이트가 있고요. 블랙도 매트 블랙, 푸른 기운이 도는 블랙 등 되게 다양해요. 발리는 점도, 말랐을 때 느낌, 광택, 물을 얼마나 섞었는지에 따라 미묘하게 다 달라요. 고유하거든요. 그걸 무채색이라 하는 게 잘못됐단 생각이 든 거죠."
흑백과 동그란 구체. 그걸 주제로 여섯 명의 젊은 예술가들이 각기 다른 얘길 꺼내놓았다.
봉현 작가가 성키 작가(디자인)에게 함께 구하자고 했다. 월세 150만~200만원대만 나왔다. 호세 작가와 준섭 작가(사진)까지 우연히 합류했다. 각기 다른 분야 예술가 넷이 그리 만난 거였다.
마침 성산동의 좋은 작업실이 합리적인 가격에 나왔다. 직접 페인트칠하고 조명을 달아 꾸몄다. 잘 아는 동네 서점에서 가구를 선물해주고, 중고마켓에서 식물을 들여왔다. 창작자들 모임이 결성됐다. 이름을 정할 차례였다. 봉현 작가가 아이디어를 냈다.
"미드 프렌즈를 보면서 실리(silly, 유치하다)란 단어가 매력적이라 생각했어요. 예술가의 폼 같은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 너무 자기 세계에 빠지거나 유행 따라 가는 가벼운 것도 별로거든요. 그래서 너무 진지하거나 유치하지 않게(Not silly, not serious), 적당히 중간쯤의 본질을 잃지 말잔 뜻으로 '낫스(Nots)'라고 정했어요."
그리 시작되었다. 그게 지난해 11월쯤이었다. 좋은 기회가 생겼다. 전시해보지 않겠냐는 거였다. 갤러리 아미디에서 후원이나 다름 없을만큼 저렴하게 대여해주기로 했다. 시간이 빠듯했으나 도전키로 했다. 같이 뭔가를 해보자고. 낫스 멤버인 봉현·성키·호세·준섭 작가. 그리고 수린(화가), 검정양말, 시원(무용), 나루(뮤지션)가 함께 2월 7일부터 18일까지 전시회를 열었다.
호세 작가가 말했다. 섞는 순간 불투명이 된다고. 흰색과 검은색이 들어가면 회색이 된다며. 정통 수채화를 추구하는 이들의 말이 그랬다. 호세 작가도 10년이 넘어가서야 그런 걸 내려놓을 수 있게 됐다.
그가 받아들인 흑백과 구의 느낌은 어땠을까.
가로가 더 기다랗고 큰 그림. 검은색 배경에, 흰색의 어떤 줄기 같은 것들이 흘러내리는 모습. 원래 작업 방식은, 눈에 안 보이는 단어나 감정을 색으로 표현했었는데, 이번엔 반대였다. 검정과 흰색이 주어졌기 때문에. 이를 사랑과 슬픔으로 이야기해보고 싶었단다.
바이올리니스트 프리츠 크라이슬러가 작곡한 '사랑의 기쁨', '사랑의 슬픔'에서 영감을 얻었다. 왜 두 곡이 함께 나왔을까 생각했다. 사랑하는 존재가 생겼을 때의 기쁨. 그러나 생은 유한하기에 찾아오는 이별과 슬픔. 이는 동시에 시작되는 거라고. 기쁨과 슬픔이 끝나지 않는 구처럼 꼬리에 꼬릴 무는 거라고 상상했다. 자신의 꼬릴 물고 삼키는 신화 속 우로보로스의 원처럼. 그가 생각하는 사랑의 형상이 이랬다.
"자연재해 같아요. 검은 해일처럼 밀려오고, 어떻게 할 수 없는."
"구를 평면화 시켜봤어요. 이걸 확대해서, 이 물건이 뭘까 생각해볼 수 있게 찍었지요. 이 사진은 뭘까요?"
준섭 작가가 찍었던 사진을 보여주며 물었다.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물건이라 했다. 사물의 한 부분만 크게 부각해서 찍으니, 어떤 건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정답은 킥보드였다.
본질적인 것. 사물이 가진 색의 중요성 같은 게 새삼 떠올랐다. 이리 색이 소실됐을 때, 친숙한 것조차도 뭔지 구분이 어렵게 된단 것. 우리가 얼마나 색에 의지하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들.
상업 사진을 찍을 땐 주로 자동 카메라로 찍었다던 준섭 작가는, 이번엔 수동 라이카 카메라로 찍었단다. 이유를 물었다.
"시간을 좀 더 보내고 정성을 들이고 싶었어요. 상업 사진은 빠른 시간에 이뤄지는 게 많거든요. 그러니 생각이 없어져요. 카메라가 다 해주고, 후보정도 많이 들어가니까요. 수동 카메라로 천천히 집중해서 찍는 게 좋았어요. 카메라를 잡을 때 제가 좀 온전히 있다고 느끼거든요."
'우리는 모두 똑같은 심연에서 태어났다.'
인종·성별·장애·출신. 그 어떤 것도 상관없이 동일한 구체에서 똑같이 탄생한단 것. 우주 만물이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서, 하나의 점에서 시작된단 것. 그런 본질적인 존재란 얘길 하고 싶었단다.
그러면서 '미아(Mia)란 이름을 가져온 건, 2021년에 꿨던 꿈에서 비롯된 거였다.
"2021년에 잠이 안 와 누워 있을 때였어요. 갑자기 제 머릿속에 이야기가 떠올랐지요. 초안은 '사막의 미아'였어요. 사막을 좋아해 너댓 번을 갔는데 떠올랐던 감정이 있거든요. 그 기분을 담아내는 주인공이 '미아'고요. 갑자기 둥실 찾아온 이야기여서, 떠오르는대로 적어놨었어요. 3년 내내 아껴놨었지요."
저마다 가진 고유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 봉현 작가에게 그런 얘기가, 원 속에 잠든 미아였다.
태어나니 선택하지 않은 이름이 주어져 있다. 미아는 무작정 걸어간다. 걷다가 떨어진 종이를 줍는다. 상자를 만들고 그 안에선 원이 태어난다. 달릴 수 있단 걸 문득 깨닫는다. 그러다 넘어져 부러지기도 한다. 절망하다 나뭇가지에 의지해 다시 걷는다. 우연히 물이란 걸 처음 마시고는 환희를 느낀다. 어쨌든 계속 살아간다고, 그런 얘길 봉현 작가는 하고 싶었다.
전시회를 찾은 한 관람객은 미아를 보고, 이야길 들은 뒤 이리 말했다. "제가 어떤 걸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문득 할 수 있단 걸 깨달았습니다."
'우리에게 빨강은 의식의 한올을 가시처럼 찌르고 잡아당기는 이상한 빛깔이었다. 빛깔 속에 가시나 이념이 들어 있을리 없건만 오랜 편가르기와 눈치보기가 없는 걸 있는 것처럼 헛보이게 했다. 붉은 악마들은 우리 세대의 이런 고질적이고도 황당한 빨간 빛깔과의 악연을 단숨에 날려버렸다.'
아무 눈치 없이, 선입관 없이, 빨강이란 단어를 곧이곧대로 볼 수 있게 됐단 것. 2002년 월드컵 때 '붉은 악마'를 보며 박완서 작가가 쓴 글이었다. 흑백과 구를 주제로 한 전시회. 거기에 담긴 생각의 결도 비슷했다.
"흑과 백이란 게 단순하게 생각하면 정말 극단적인 얘기가 될 수 있어요. 삶과 죽음, 선과 악. 그걸 피하자고, 저희가 얘길 했었어요. 검은색에서 누군가 느끼는 감정이 다 다르고, 흰색도 그렇고요. 회색도 우리는 약간 어정쩡한 걸 생각한다 하는데, 서양으로 가면 세련된, 도시적인, 이런 걸로 나온다는 거죠."
이거 아니면 저거란 극단적 생각. 그게 누군가에게 차별이고 편견일 수 있다고. 상대 입장을 생각하고, 반대여도 생각해보되, 판단하지 않는 게 중요한 거 같다고 했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다른 것이기에. 호세 작가의 '사랑과 슬픔' 작품평을 봐도 이리 다양하듯이.
'되게 슬프다.'
'복잡한 느낌이다.'
'무서웠다.'
'SF 같았다.'
'얼굴 같았다.'
'밤하늘 달 같았다.'
남형도 기자 huma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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