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여운 것들-자유의지의 위험한 발현 해학적으로 표현[시네프리뷰]
2024. 3. 6. 06:05
냉정하고 흉측한 외모를 가진 중년의 천재 의사 갓윈 백스터는 유아 수준의 지능을 가진 벨라를 집 안에 가둔 채 양육한다. 제자 맥스를 집에 불러들여 벨라를 관찰하게 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애정이 싹튼다.
다소 괴팍한 영화감독들이 있다. 일상성이나 보편성을 초월한 기괴한 상상의 세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조물조물 빚어내는 작가들. 점점 획일적으로 거대해지기만 하는 상업 영화의 범람 속에, 반대편에서 영화의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가치를 인정하게 만드는 균형적 무게를 이들이 감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 범상치 않은 현대 작가군에 속하는 다수의 인물 중 대표적 한 사람이 요르고스 란티모스다.
1973년 그리스 아테네 태생인 그는 뮤직비디오와 단편영화 감독으로 영상산업에 발을 디딘다. 공식적인 장편영화 데뷔는 2001년 발표한 코미디 영화 <내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러나 2009년 스스로 각본에도 참여한 세 번째 장편영화 <송곳니>가 비로소 그의 인생에 결정적 전환점이 된다. 제62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대상을 거머쥐고, 제8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는 외국어영화상 후보로까지 지명되면서 단숨에 세계적인 감독으로 급부상한다.
이후 <더 랍스터>(2015), <킬링 디어>(2017),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2018) 등을 연이어 성공시키며 평단과 관객 모두가 신뢰하는 감독이 됐다.
그의 영화는 불편한 소재와 냉소적 시선으로 극명한 호불호가 나뉘지만, 섬세하고 뛰어난 만듦새란 평가만큼은 대체로 이견이 없다.
속박됐던 자유의지의 위험한 발현
냉정하고 흉측한 외모를 가진 중년의 천재 의사 갓윈 백스터(윌렘 대포 분)는 유아 수준의 지능을 가진 의문의 여인 벨라(엠마 스톤 분)를 집 안에 가둔 채 양육한다. 그의 성장을 기록하는 실험을 보조할 목적으로 제자 맥스(라미 유세프 분)를 집에 불러들여 벨라를 관찰하게 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애정이 싹튼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 바람둥이 변호사 덩컨(마크 러팔로 분)이 끼어들면서 벨라의 험난한 일탈이 시작된다.
란티모스 작품 속에서는 다양한 영화적 재미를 찾을 수 있다. 섬세하고 계획적으로 설계된 화면구성이나 예측 불가한 이야기 전개 등 독창적 요소들이 신선함을 제공한다. 또한 유난히 두드러지는 등장인물들 사이의 기괴한 관계성은 그의 영화의 인장처럼 일관되게 발견되는 특징이다.
그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은 보편적인 신뢰나 애정의 관념을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종속적이고 뒤틀린 관계를 담보로 교류한다. ‘순수’ 또는 ‘평범함’을 대변하는 보편적 성향의 주인공들은 잔인하고 냉혹한 현실이 투영된 왜곡된 인간관계와 말초적 욕망을 체험하게 되고, 이를 통해 최상의 가치로 굳게 믿었던 관습의 한계와 균열을 처절하게 받아들인다.
아카데미 시상식 11개 부분 후보작
<가여운 것들>은 이제까지 공개된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 중 가장 화려한 작품으로 보인다.
빅토리아 시대를 근간으로 비현실적인 판타지의 공간으로 확장된 영화의 무대는 이전까지 현실을 기반으로 했던 그의 작품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며 SF 영역까지 넘나든다. 이전 작품에서도 감독 특유의 독특한 화면구성이 도드라졌지만, 이번 작품은 훨씬 인공적이며 과장된 풍경과 색감이 화면 가득 차고 넘친다.
더불어 전에 비해 이야기의 날카로움은 많이 무뎌진 느낌이다. 대신 과장된 사건과 해학적 유머가 그 자리를 메운다. 전작들의 연장 선상에서 확연하게 눈에 띄는 이런 특징은 뼛속부터 냉소적이고 건조했던 란티모스 감독의 기존영화를 좋아하던 팬들에게는 어쩌면 실망스러운 지점일 수도 있겠다.
<가여운 것들>은 제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최고 영예인 황금사자상 수상을 필두로,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92개의 수상(2024. 2. 22 기준)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3월 10일 개최되는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총 11개 부분에 후보로 올랐다. 작품상, 감독상(요르고스 란티모스), 여우주연상(엠마 스톤), 남우조연상(마크 러팔로), 각색상(토니 맥나마라) 등 주요 부분을 필두로 촬영상, 미술상, 편집상, 의상상, 분장상, 음악상 등 기술 부분에서도 전방위적인 성취를 인정받고 있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이 확실히 친애하는 작품 중 한 편이다.
제목: 가여운 것들(Poor Things)
제작연도: 2023
제작국: 영국
상영시간: 141분
장르: 드라마, 코미디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
출연: 엠마 스톤, 마크 러팔로, 윌렘 대포, 라미 유세프
개봉: 2024년 3월 6일
등급: 청소년 관람 불가
미술과 문학을 넘나든 작가 앨러스데어 그레이
영화 <가여운 것들>은 동명의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작가인 앨러스데어 그레이는 1934년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공장 노동자와 의류 창고 직원의 자녀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해 도서관을 즐겨 다녔던 그는 특별히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1952년 글래스고 미술학교에 입학한 뒤, 1954년부터 소설 <라나크>의 집필을 시작으로 조용한 글쓰기를 시작했다. 미술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10년 동안, 교사로, 또 글래스고의 극장의 무대 배경 화가로 일하기도 했다. 방송 작가,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타이포그래퍼 등으로 활동했을 뿐 아니라 벽화와 판화에 탁월한 화가로서 글래스고 시내 곳곳에 작업물을 남겼다.
1981년, 20여 년간 써온 대작 <라나크>를 출간하며 작가로서 정식 데뷔를 한다. <라나크>는 그의 대표작이자 스코틀랜드 문학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1992년 발표해 휘트브레드상, 가디언 소설 상을 받은 <가여운 것들>은 그가 유독 즐겁게 작업했고, 상업적으로도 가장 성공한 작품이라 알려져 있다.
란티모스 감독은 원작 소설의 인상적이고 복잡한 시각적 창의와 설정에 깊이 빠져들었다. 주제, 유머 그리고 캐릭터들과 언어의 복잡성에 완전히 매료됐다고 한다. 영화화를 결심하고 작가를 찾아간 그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장소들을 함께 걸으며 자신이 영화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적극적으로 설득했다고 한다.
앨러스데어 그레이는 2019년, 영화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8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시신은 고인의 유지대로 의료 연구를 위해 기증됐다. 마치 자신이 만들었던 허구처럼 몸소 ‘소설 같은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최원균 무비가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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