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 얼짱? 女神? 이제 그만!" 정치 실패가 독한 승부사를 깨웠다
프로당구(PBA) 2023-2024시즌이 팀 리그에 이어 정규 투어까지 마무리됐다. 지난해 6월 개막전에 이어 지난 3일 끝난 9차 투어까지 이제 PBA는 오는 8일부터 열리는 'SK렌터카 제주특별자치도 PBA 월드 챔피언십'만 남았다.
'월드 챔피언십'은 남녀부 시즌 랭킹 상위 32명만 출전하는 왕중왕전이다. 여기에 들지 못한 선수들은 시즌을 마친 가운데 아쉬움 속에 다음 시즌을 기약해야 한다.
왕중왕전을 앞둔 가운데 누구보다 차기 시즌을 벼르고 있는 선수가 있다. 바로 돌아온 '당구 얼짱' 차유람(37)이다.
차유람은 2년 동안 정치 외도(?)를 마치고 지난 1월 PBA 복귀를 전격 선언했다. 복귀전인 시즌 8차 투어 '웰컴저축은행 챔피언십'에서 예선을 거쳐 32강까지 오르며 녹슬지 않은 기량을 보였다. 그러나 마지막 투어인 '크라운해태 챔피언십'에서는 1차 예선에서 탈락했다.
차분하게 긴 호흡으로 준비한 뒤 다음 시즌에 나설 수 있었지만 시즌 막판 기어이 합류한 이유는 무엇일까. 짧은 복귀 시즌을 마무리한 차유람은 최근 서울 서초구 1983 프라이빗 당구 레슨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에서 PBA로 돌아온 배경과 심경, 제3의 당구 인생에 대한 포부를 들려줬다.
차유람은 2021-2022시즌 뒤 깜짝 정치 입문을 선언했다. 2022년 5월 당시 차유람은 국민의힘 지방 선거 선대위 특보로 입당했다. PBA 팀 리그 드래프트를 불과 3일 앞둔 가운데 들려온 소식에 PBA는 발칵 뒤집혔다.
특히 차유람은 당시 소속팀이던 웰컴저축은행의 팀 리그 2년 연속 정규 리그 1위와 첫 챔피언 결정전 우승을 이끌었던 터였다. 개인 투어에서도 차유람은 NH농협카드 챔피언십과 SK렌터카 월드 챔피언십 4강에 오르는 등 기량을 한껏 끌어올리고 있었다.
또 당구계 최고 스타로서 PBA 간판 역할을 해왔던 차유람이었기에 충격은 컸다. 갑작스러운 정치 선언에 따른 비판 여론에 차유람은 정치 입문 13일 만에 SNS를 통해 사과까지 해야 했다.
그랬던 차유람은 2시즌 만에 PBA로 돌아왔다. 국회의원 선거를 2달여 앞둔 시점이었다. 이에 대해 차유람은 "솔직히 좋은 자리 제안도 받았고, 도와주려 하는 분도 계셔서 욕심을 냈으면 열심히 뛰고 있었을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스스로 더 깊이 생각한 끝에 늦지 않게 정치적으로도, 선수로서도 오해를 하지 않도록 결심하자마자 PBA에 복귀했다"고 밝혔다.
청운의 꿈은 컸다. 차유람은 "당시 인재 영입 제안이 왔을 때 엘리트 체육에 대한 지원이 축소되거나 끊기는 상황에서 성적을 내라는 현실에 불만이 있었다"면서 "그런 점에서 사명감을 느끼고 당구에 더 큰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자는 스스로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고 돌아봤다.
차유람에 앞서 이에리사(탁구), 문대성(태권도), 임오경(핸드볼), 이용(봅슬레이) 등이 스포츠 스타 출신정치인으로 길을 닦았다. 모두 국회의원으로 활동했거나 현역으로 뛰고 있다. 차유람도 이들 선배의 길을 꿈꿨을 터였다.
하지만 정치 현실의 벽은 더 높았다. 차유람은 "그것(사명감과 기대감)만으로 자리를 감당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느꼈고, 좋은 의도만 갖고는 역부족이었다"면서 "자리를 받아도 당에 누가 되거나 큰 도움이 될 만큼 잘할 수 없을 것 같았다"고 털어놨다.
한국 당구에서 가장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스타였지만 유명세만으로는 쉽지 않은 한국 정치였다. 차유람은 "(정치인으로서)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면서 "쉽지 않은 곳이고 예측이 불가해 '멘털이 안 되는구나' 절감했다"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결국 당구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잡았던 큐에 대한 그리움이 강렬했다. 정치에 호되게 당했던 차유람에게 마음의 고향이었다. 차유람은 "선수일 때가 나답고, 승부가 그립다는 것을 다시 느꼈다"고 했다.
준비가 덜 된 상황에서도 PBA에 복귀한 이유였다. 복귀 선언 이후 5일 동안 바짝 훈련한 뒤 출전한 당시에 대해 차유람은 "원래 계획한 시즌이 아니어서 얼떨떨했다"고 회상했다.
그럼에도 아예 망가진 것은 아니었다. 차유람은 웰컴저축은행 챔피언십 64강에서 전체 이닝 평균 득점 2위(1.389점)를 찍으며 32강까지 진출했다. 차유람은 "엄청 감이 떨어져 있을 것 같았는데 2021-2022시즌 때와 비교해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던 거 같다"고 쑥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다음 대회 크라운해태 챔피언십에서는 또 다른 '당구 얼짱' 서한솔(블루원리조트)과 1차 예선에서 14 대 18로 졌다. 이에 차유람은 "이닝 평균 1점이 넘는 게 맞는지, 0.5점이 맞는지 모르겠다"면서 "3~4개월 차분하게 훈련했으면 알 텐데 갑자기 2번 대회를 치르고 나니 헷갈린다"고 혀를 내둘렀다. 이어 "잘 될 때는 경기 운도 따르고 착각을 했던 거 같다"면서 "그러나 서한솔과 할 때는 수비도 안 되고 테이블까지 영역 밖의 일이라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시 2년의 공백은 컸고, 그 사이 리그는 강해졌다. 차유람은 "득점 감각이 떨어졌고, 샷도 자연스럽지가 않았다"면서 "역시 공백이 있구나 절감했다"고 인정했다. 이어 7회 우승의 '캄보디아 특급' 스롱 피아비(블루원리조트), 6회의 '당구 여제' 김가영(하나카드) 등에 대해 "포켓볼에서 전향한 초보자라 원래 실력 차가 있었는데 더 커졌다"면서 "(한국 여자 선수 최초 세계선수권 우승자 이신영 등) 선수들도 많이 들어와 지금은 거의 막강한 리그가 됐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게 오히려 승부욕을 자극하고 있다. 차유람은 "선수로서는 더 경쟁이 치열해졌는데 도전 정신이 생기고 이럴 때 우승해야 무게감이 다르다"면서 다시금 "우승해보고 싶다"고 강조했다. 정치로 외도하기 전과는 달라진 모습이다.
이전 차유람은 우승을 언급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포켓볼 시절에는 '검은 독거미' 자넷 리(미국), 김가영과 경쟁하며 독한 승부사 기질을 보였지만 3쿠션은 아무래도 생소한 종목이었던 까닭이다. PBA 출범 시즌 당시 차유람은 "결과에 대한 목표보다는 경기 자체를 즐기고 싶다"는 소박한 각오를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우승을 말한다. 차유람은 "이전에는 우승 욕심을 숨겼다"고 귀띔했다. 이어 "그러나 제 다시 PBA에 도전하는데 목표가 우승이 아니라는 것도 웃기고, 되든 안 되는 우승을 목표로 하고 돌아왔다"고 웃음을 지었다. 정치 외도를 마친 차유람에게 이제는 당구뿐인 셈이다.
우승할 실력이 됐다는 게 아니라 프로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라는 것이다. 차유람은 "다른 선수와 비교는 자유지만 내 페이스로 맞춰서 묵묵히 실력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일 뿐"이라면서 "일단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성장하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실력이 있다면 우승하지만 김보미(NH농협카드)처럼 톱 선수를 다 이겨도 우승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더라"면서 "6번만 이기면 우승한다는 생각으로 내 경기를 하고 운이 따르면, 하늘이 돕는다면 좋은 성적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편하게 더 우승을 얘기한다"는 이유다.
그래서 이제는 '당구 얼짱' '당구 여신' 등 별명의 굴레도 벗어던지고 싶다. 두 아이의 엄마, 학부모가 된 만큼 스스로 머쓱해진 별명인 데다 실력으로 더 인정을 받고 싶다는 속내도 읽힌다.
차유람은 "당구 얼짱이라는 별명을 이제는 넘겨주고 싶다"면서 "두 아이 엄마에 30대 후반인데 민망하다"고 손사래를 쳤다. 이어 "어느새 선배가 되니 어리고 예쁜 선수들이 많이 보이더라"면서 "또 내가 엄마가 돼서 그런지 (예전 팀 동료였던) 한지승(27)을 보면 아들 같고 기특한데 이제는 언니, 엄마 같은 마음이라 '얼짱'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자못(?) 고충을 토로했다.
당초 차유람은 지난 2006년 9월 '얼짱 당구 소녀'로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당시 19살이던 차유람은 포켓볼의 세계 챔피언인 미녀 스타 자넷 리에 밀리지 않는 실력과 빼어난 미모를 뽐냈다. 이후 김가영과 2006년 도하,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활약했고, 2013년 전국체전과 세계 포켓볼 메이저 대회인 베이징 미윈 오픈 우승으로 기량도 인정을 받았다.
다만 차유람은 19살 당시 워낙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2015년 베스트 셀러를 여러 권 낸 이지성 작가와 결혼하면서 약 4년을 당구계에서 떠나 있었지만 '당구 얼짱'의 유명세는 떠나지 않았다. 여기에 방송 활동까지 소화한 차유람은 한국 당구의 대표적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얼짱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그만큼 실력을 키워야 한다. 그러나 차유람은 앞서 언급한 대로 3학년 딸(한나), 7살 아들(예일)의 엄마. 미혼의 다른 선수들처럼 온전히 훈련에만 집중할 수는 없다. 정치 입문 이전에 대해서도 차유람은 "일정이 일정치 않아 훈련을 하루 10시간 넘게 탈진할 때까지 할 때도, 2시간만 할 때도 있었다"면서 "이번에도 2월까지는 애들이 방학이라 여행도 가야 했고 사적인 일정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결국 양보다는 질을 앞세운 훈련으로 극복한다는 계획이다. 차유람은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3월부터는 훈련 시간을 확보할 것"이라면서 "훈련하면서 깨달은 게 양보다 응축해서 집중적으로 하는 게 효과가 있더라"고 강조했다. 이어 "일단 잘 치던 공도 서툴게 됐으니 반복해서 익히는 훈련하고 점차적으로 미흡했던 것을 채워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은 체력. 차유람은 "사실 2년 전 PBA를 한번 포기한 것도 가정이 있는데 경기 일정 때문에 오래 할 수 없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면서 "팀 리그에서 3시간 동안 앉아서 응원하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경기 후 잠도 오지 않아 더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이어 "때문에 이번에는 러닝 등을 충실히 해서 체력과 지구력을 키울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가정만 돌보는 일도 어려운데 한번 포기했던 PBA까지 재도전하는 이유는 뭘까. 아쉬웠던 정치 도전 무산 때문만이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그토록 떨치고 싶었던 굴레 때문이다.
차유람은 "포켓볼 시절 국제 대회 금메달을 따도 잘 모르시는데 '당구 얼짱' 별명은 아시더라"면서 "그만큼 강렬하게 각인이 돼 이름을 알리고 인지도도 얻게 됐다"고 돌아봤다. 이어 "그때는 힘들었는데 지금은 감사하고, 또 (당구 간판으로서) 책임감도 느낀다"고 강조했다. 피겨 스케이팅 김연아, 수영 박태환처럼 종목 간판의 역할을 해내겠다는 의지다. 차유람은 정치 입문 선언 뒤에도 PBA 홍보 대사로 활동하며 당구와 인연을 이어간 바 있다.
후배들을 위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차유람은 "종목 간판 스타의 중요성을 항상 느끼고 있다"면서 "남녀를 떠나 어린 선수 중에서 나와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어 "그러기 위해서 후배들이 상처를 받지 않고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면서 "종목 선수들의 연령이 높아 선배들에게 눌릴 수도 있지만 프로로서 존중을 해주시기 때문에 자부심을 갖고 그에 걸맞는 성적을 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포켓볼과 PBA 3쿠션 전향에 정치 도전까지. 돌고 돌아 다시 당구의 품으로 돌아온 차유람. 벼락치기가 아닌 차분한 준비 속에 맞이할 차유람의 2024-2025시즌이 궁금해진다.
CBS노컷뉴스 임종률 기자 airjr@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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