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구자의 등장’ 해외리그에 도전한 자들

최창환 2024. 3. 6.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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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최창환 기자] 농구는 유독 한국선수의 해외 진출이 활발하지 않은 스포츠였다. 행정적 절차를 떠나 선수 개개인과 한국농구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분명 아쉬운 일이었지만, 선구자가 하나둘 등장한 현 시대에서는 루트가 다양해졌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2호 한국인 NBA리거가 하루빨리 탄생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본 기사는 농구전문 매거진 점프볼 3월호에 게재됐음을 알립니다.

하워드의 드래프트 동기
가장 굵직한 이정표를 남긴 선수를 제일 먼저 소개하는 게 인지상정. 지금은 유튜버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하승진은 한국인 최초 NBA리거로 등록되며 한국농구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인물이다. 연세대 예비 1학년 자격으로 2003 농구대잔치에서 활약했던 하승진은 곧바로 NBA 도전을 선언, 미국으로 건너가 약 6개월 동안 훈련을 소화하며 드래프트를 준비했다.

하승진(221cm)은 당시 NBA에서도 야오밍(휴스턴, 228cm)을 제외하면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신장을 지닌 선수였다. 아직 어린 나이여서 검증을 충분히 거친 건 아니었지만, 신체 조건과 성장 가능성은 NBA 관계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하승진은 2004년 6월 25일 열린 드래프트에서 전체 46순위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에 지명되며 NBA리거라는 꿈을 이뤘다. 1순위 드와이트 하워드를 비롯해 안드레 이궈달라, 루올 뎅, 케빈 마틴 등이 하승진의 드래프트 동기다. 2019-2020시즌 중반 울산 현대모비스와 계약해 화제를 모았던 에메카 오카포 역시 2순위로 선발됐으며, 신인상까지 차지했다.

하승진의 데뷔 경기는 2005년 1월 8일 마이애미 히트와의 홈경기였다. 교체 출전해 1분 11초를 소화하는 데에 그치는 등 경험치를 쌓는 정도에서 데뷔 시즌을 이어갔던 하승진은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다. LA 레이커스와의 홈경기에서 23분 33초 동안 13점 5리바운드로 활약, 포틀랜드의 승리에 기여했다.

하지만 13점은 해당 시즌뿐만이 아닌 하승진의 커리어하이로 남았다. 데뷔시즌 19경기 평균 5.5분을 소화했던 하승진은 2년 차 시즌 역시 27경기 평균 7.9분을 뛰는 데에 머물렀다. 하승진은 2005-2006시즌 종료 후 밀워키 벅스로 트레이드됐고, G리그(당시 D리그)에서도 2시즌 평균 2.6점에 그쳤다.

결국 하승진은 2007년 10월, 2008 KBL 신인 드래프트 참가를 선언했다. “포기한 건 아니다. NBA에 돌아가기 위한 발판으로 삼기 위해 KBL에서 뛰겠다”라는 포부와 함께 국내로 돌아온 하승진은 전체 1순위의 행운을 누린 KCC에 지명됐다. 하승진은 이후 2018-2019시즌까지 KBL에서 뛰며 KCC에 2차례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안겼다. 2020-2011 챔피언결정전 MVP로 선정되기도 했다.

하승진 이후에도 많은 선수들이 문을 두드렸지만, NBA의 벽은 여전히 높다. 2022 드래프트에 참가했던 이현중의 지명 여부가 많은 관심을 모았으나 끝내 그의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물론 NBA를 향한 이현중의 꿈이 꺾인 건 아니다. 이현중은 드래프트 낙방 후 발목수술, 재활을 거쳐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산하 산타크루즈에서 뛰며 G리거로 경험을 쌓았다. 이후 서머리그를 거쳐 한국인 최초로 NBL에서 뛰며 NBA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G리그에서 꿈을 키운 선수는 이현중 이전에도 있었다. 농구 팬들에게 ‘아픈 손가락’ 혹은 ‘비운의 선수’로 회자되고 있는 방성윤이다. 방성윤은 대학생으로는 유일하게 2002 부산 아시안게임에 출전, 금메달을 획득하는 등 일찌감치 잠재력을 높이 평가 받았다. 하승진이 NBA 드래프트에서 선발된 후 약 5개월 뒤 열린 2004 G리그 드래프트에 참가, 4라운드 2순위로 로어노크 대즐에 지명됐다.

방성윤은 G리그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G리그 데뷔시즌에 평균 12.5점(15위)을 기록했고, 3점슛은 총 38개로 전체 1위였다. 그럼에도 NBA는 2호 한국인 NBA리거의 탄생을 허락지 않았다. 방성윤은 G리그 2년 차 시즌 도중 한국 복귀를 결심했고, 트레이드를 통해 SK 유니폼을 입었다.

방성윤은 점프볼과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 우리 팀에서 2명 정도 콜업됐는데 이해되지 않았다. 내 성적이 그들보다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에서야 얘기할 수 있는 건데 당시 에이전트가 일을 안 했다는 걸 알게 됐다. 시즌 막판 3경기 연속 20점 이상을 기록했고, 3점슛 전체 1위로도 주목받았는데 기회가 닿지 않는 게 너무 이상했다. NBA는 10일 계약을 세 차례 하면 자동으로 1년 계약을 맺을 수 있다. 적어도 한 번은 10일 계약을 따낼 수 있었는데 그 기회조차 놓친 게 아쉽다”라고 회고했다.

SK에서 커리어를 이어가던 방성윤은 2008년에 다시 G리그를 두드렸다. G리그 드래프트 3라운드 10순위로 리노 빅혼스에 지명됐다. 당시 리노의 사령탑은 인천 전자랜드(현 대구 한국가스공사)에서 KBL 최초 외국인 감독으로 활동했던 제이 험프리스 감독이었다. G리그에서 또 한 번의 도전을 이어갔던 방성윤은 2008-2009시즌 하위권으로 내려앉은 SK의 강력한 요청에 다시 복귀, KBL에서 커리어를 마무리했다.

‘도전의 아이콘’부터 NCAA 선구자까지
G리그를 밟은 선수는 또 있다. 이대성은 방성윤, 이현중과 달리 KBL에서 프로선수로 데뷔한 이후 G리그에 진출한 최초의 사례다. 2013-2014시즌 울산 현대모비스(당시 모비스)에서 데뷔한 이대성은 상무에서 제대한 이후인 2017년, G리그에 도전했다.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등 유재학 당시 현대모비스 감독이 구상한 핵심 전력이었지만, 이대성은 “오랫동안 꿈꿔왔던 도전이다. (방)성윤이 형, (하)승진이 형처럼 최고의 선수들도 좋은 결과를 못 얻었는데 보여준 것도 없는 내가 간다는 게 얼마나 큰 도전인지 알고 있다. 기왕 하는 거 후회 없이 해보라고 허락해주신 유재학 감독님께 감사드린다”라며 미국으로 향했다.

이대성은 2017 G리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20순위로 이리베이호크스에 지명됐고, 11경기 평균 8분 동안 2.5점 1.1어시스트를 기록한 후 방출됐다. 2017-2018시즌 중반 현대모비스로 돌아온 이대성은 2018-2019시즌에 ‘몹벤져스’의 한 축으로 활약, 2018-2019시즌 플레이오프 MVP에 선정됐다.

이대성이 미국으로 향한 건 G리그가 2번째였다. 이대성은 2012년 중앙대를 자퇴, 미국 브리검영대학에 편입했다. “중앙대를 나왔을 때 모두 ‘정신에 문제가 있다’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미국은 어릴 때부터 내가 꿈꿔왔던 곳이었고, 그때의 선택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끊임없이 성장하며 국가대표팀 주장, 우승반지 3개를 이뤘다.” 이대성의 회고다. 고양 오리온, 가스공사에서 주득점원으로 활약했던 이대성은 지난 시즌 종료 후 B.리그로 건너가 ‘도전’과 관련된 또 다른 페이지를 그려나가고 있다.

이대성 이후 미국대학에서 커리어를 쌓은 선수로는 이현중(데이비슨대학), 여준석(곤자가대학)이 있다. 이들이 속한 대학은 NCAA에서 경쟁하는 등 브리검영대학과 비교하면 차원이 다른 학교다.

특히 이현중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2020-2021시즌에 180클럽(야투율 50.3%, 3점슛 성공률 43.6%, 자유투 성공률90.5%)에 가입해 화제를 모았다. 대학 선배이자 NBA 역대 최고의 슈터로 꼽히는 스테픈 커리(골든스테이트)도 이루지 못한 진기록이었다. 또한 한국 남자선수 최초로 ‘3월의 광란(64강)’에 출전하기도 했다.

이현중, 여준석에 앞서 NCAA에 도전한 선수로는 최진수가 있었다. 역대 최연소 국가대표(17세) 기록을 새로 썼던 최진수는 삼일중 졸업 후 몬트클레어고로 진학, 일찌감치 미국농구를 접했다. 이후 명문 사우스겐트고로 옮겨 현지에서도 유망주로 인정받았던 최진수는 NCAA에서도 여러 팀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조지타운대학부터 마이클 조던의 모교 노스캐롤라이나대학, 메릴랜드대학 등 NCAA 디비전I에서도 상위권에 있는 대학들이 최진수를 원했다. 최진수가 택한 학교는 직접 자신의 경기를 보기 위해 찾아온 개리 윌리엄스 감독의 메릴랜드대학이었다.

당시 점프볼 소속으로 최진수를 밀착 취재했던 서정환 OSEN 기자는 “최진수에 대한 평가는 어떤 선수들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메릴랜드대학은 2001년 파이널 포, 2002년 토너먼트 우승을 차지한 강팀이었다. 그런 팀에서 입학이 결정되지 않은 최진수를 위해 유니폼을 제작하고, 관중이 체육관을 가득 채워 이름을 외쳤다는 건 지금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팬클럽도 있었다. 그만큼 기대감이 엄청났다”라고 회고했다.

하지만 최진수는 대학 진학 후 암초를 만났다. 동료의 부상에 따른 갑작스러운 포지션 변경, 어깨부상, 학점에 대한 압박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최진수는 부족한 학점을 채우기 위해 여름, 겨울 학기를 소화하는 등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무리한 대표팀 차출까지 더해져 2010년 국내 유턴을 택했다.

고려대, 연세대로부터 제의를 받아 고민을 거듭한 최진수는 조기 편입을 목표로 연세대에 합류했지만, 입학은 끝내 무산됐다. 결국 최진수는 2011 KBL 신인 드래프트에 일반인 신분으로 참가, 오세근-김선형에 이어 3순위로 고양 오리온에 지명돼 줄곧 KBL에서 커리어를 쌓고 있다.

여자선수 중에도 NCAA 무대를 누볐던 선수들이 있었다. 이은정은 남녀를 통틀어 NCAA에서 활약한 최초의 한국선수다. 1982년 숭의여고 졸업 후 루이지애나몬로대학에 입학, ‘한국 농구의 선구자’로 불렸다. 포인트가드였던 이은정은 사우스랜드 컨퍼런스 ‘올해의 선수’에 4년 내내 선정됐고, 1984-1985시즌에는 학교 역사상 첫 파이널 포를 안겼다.

이은정은 여전히 루이지애나 몬로대학 통산 득점, 자유투, 어시스트, 스틸 1위에 올라있다. 이은정이 활약한 4년 동안 102승 15패를 기록하며 전성기를 누볐던 루이지애나 몬로대학은 이은정의 등번호 5번을 영구결번했다. 이은정은 졸업 후 이탈리아-스웨덴리그에서 뛰었고, 2022년 NCAA 3부 리그 소속 설로스주립대 감독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이에 앞서 모교 루이지애나 몬로대학 코치로 활동한 경력도 있는데, 이때 지도한 제자들 가운데 1명이 신재영이었다. 1984 LA 올림픽에서 성정아(이현중 母)와 함께 은메달을 목에 걸었던 김화순의 딸이다. 선일초 졸업 후 어머니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 신재영은 머서 아일랜드고를 거쳐 루이지애나 몬로대학에 입했다.

이후 험볼트대학 편입을 거쳐 한국으로 복귀, 2016 WKBL 신입선수 선발회에서 전체 5순위로 신한은행에 지명됐다. 이후 용인 삼성생명을 거쳐 2017~2018시즌을 끝으로 은퇴했고, 항공사 승무원으로 새로운 인생을 꾸려가고 있다.

길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
미국만 선진농구를 배우고 뜻 깊은 경험을 할 수 있는 무대는 아니다. 양재민 역시 남들이 걷지 않은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이정표를 세운 선수 가운데 1명으로 꼽힌다.

2016 FIBA(국제농구연맹) U17 아시아컵에서 이정현(소노)과 함께 한국을 역대 최초의 8강으로 이끌며 주목받았던 양재민은 이와 같은 활약을 발판삼아 스페인 또레로도네스(U18 농구팀)에 입단했다. 2017년에는 NBA가 FIBA와 연계해 개최하는 유망주 농구캠프 ‘국경 없는 농구 글로벌 캠프’에 초청돼 올스타로 선정됐다. 연세대 진학 후에는 NJCAA 산하니오쇼 커뮤니티 컬리지로 건너가 2년의 학사 일정을 마쳤고, NCAA 진학도 준비했다.

실제 양재민은 NCAA 디비전I 캘리포니아 폴리 테크닉 주립대학을 비롯한 복수의 학교로부터 입학 제의를 받았고, 여준석에 앞서 한국선수 역대 5번째 NCAA 선수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고 있었다. 코로나19 여파로 리그가 중단돼 NCAA라는 꿈을 이루진 못했지만, 양재민은 한국 복귀가 아닌 또 다른 행선지를 택했다. B.리그 신슈 브레이브 워리어스와 계약, 일본에서 프로선수로 첫 걸음을 내디뎠다.

2011년 신제록이 이와타 빅불스(BJ리그)에 입단했지만, 당시 일본은 JBL과 BJ리그가 통합하기 전이었다. 일본은 JBL, BJ리그 통합 후 B.리그를 출범하며 선진리그 시스템을 도입, 급격한 성장세를 그리고 있다. B.리그 출범 후 일본에서 뛴 한국선수는 양재민이 최초다.

현재는 이대성(미카와), 장민국(나가사키)을 비롯해 B3.리그 장문호(카가와), 박세진(가나가와)에 이르기까지 많은 한국선수가 뛰고 있지만, B.리그는 양재민이 진출할 당시만 해도 한국선수들이 선호하지 않는 리그였다. 몇몇 일본 에이전트가 한국선수들에게 의사를 타진했지만, 흔히 말하는 ‘메리트’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양재민은 우츠노미야 브렉스, 센다이 89ERS를 거치는 동안 거액에 계약하는 등 한국선수들의 선택지를 넓히는 데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야말로 ‘선구자’다.

홍경기(삼성) 역시 흔치 않은 길을 걸은 선수 가운데 1명이다. 홍경기의 농구 인생은 한편의 드라마다. 고려대 출신 홍경기는 오세근이 전체 1순위로 안양 정관장(당시 KGC) 유니폼을 입은 2011 드래프트에서 20순위로 정관장에 지명됐다. 개명 전이었던 당시 이름은 홍세용이었으며, 지명권 교환에 의해 곧바로 차민석과 트레이드되며 원주 DB(당시 동부)에 입단했다.

데뷔시즌 16경기를 치른 후 입대했던 홍경기는 제대 후 웨이버 공시됐다. 홍경기의 ‘통산 1호 은퇴’였다. 은퇴 후 잠시 농구교실 강사로 일했던 홍경기는 수원 KT(당시 부산 KT)의 부름을 받아 2015-2016시즌에 프로무대로 돌아왔지만, 1경기도 치르지 못하는 등 1군 전력 외였다.

2번째 은퇴였지만, 홍경기는 좌절하지 않았다. 실업팀 놀레벤트 이글스에서 재기를 꿈꾸는가 하면, 이후 몽골리그에도 진출하며 농구와의 인연을 이어갔다. 놀레벤트 지휘봉을 잡고 있었던 박성근 감독이 몽골농구협회와 인연이 닿아 훈련 겸 리그 경험을 쌓는 차원에서 한국선수들이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홍경기와 더불어 김형준, 박민환, 이길수도 몽골리그에서 뛰었다.

몽골리그에서 1경기 41점(3점슛 8개)을 퍼부으며 화제를 모았던 홍경기는 2017년 전자랜드와 계약, 또 한 번의 KBL 복귀를 이뤘다. 이후 롤플레이어로 꾸준히 기회를 받은 홍경기는 2022년 서울 SK와 2년 보수 1억 2000만 원에 계약, 가치를 인정받았다. 2011년 프로 데뷔 후 11년 만에 이룬 첫 억대 연봉이었다. 홍경기는 “억대 연봉을 받는 다른 선수들에 비하면 큰 금액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열심히, 힘들게 살아온 걸 보상받은 것 같아서 기분 좋았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올 시즌 보수는 8000만 원으로 줄어들었지만, 홍경기는 시즌 중반 삼성으로 이적해 21경기 평균 16분 19초 동안 4.8점을 기록 중이다. 데뷔 후 가장 많은 출전시간이다. 이색적인 해외리그를 거쳐 KBL로 돌아온 홍경기가 쓰는 드라마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_점프볼DB(문복주, 유용우, 박상혁 기자), KBL PHOTOS, W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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