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훈의 엑스레이] [10] 오롯이 핍진하라
글쟁이들은 어려운 단어를 좋아한다. 글쟁이들을 싸잡아 놀리려는 게 아니다. 나도 글쟁이다. 그러니 이건 일종의 자폭이다. ‘나 같은’ 글쟁이들은 남들 잘 쓰지 않는 단어를 찾아내는 재주가 있다. 의미는 같은데 낯선 단어를 선호한다. 온전하다는 오롯하다가 된다. 뚜렷하다는 선연하다가 된다. 살펴보다는 톺아보다가 된다.
나도 오롯하다는 단어를 자주 썼다. 어느 순간 오롯하다는 글쟁이들이 과용하는 단어가 됐다. 요즘은 영화도 오롯하고 사람도 오롯하고 모든 게 오롯하다. 낯선 단어가 글쟁이들 과용으로 상투어가 됐다. 사실 글쟁이들이 새로 발견한 많은 단어는 오래전 한국 지식인이 즐겨 쓴 고어(古語)이자 사어(死語)다. 옛날 사전서 신조어를 발견하다니 역시 지식인들은 다르다.
요즘 글쟁이들이 사랑하는 단어는 ‘핍진성(逼眞性)’이다. 문학이나 영화 비평에서 폭발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의미는 간단하다. 허구의 이야기 속에서도 독자가 납득할 개연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역시 새로 발견된 고어다. 해방 전 한국 신문에서는 ‘핍진하다’는 표현이 꽤 자주 쓰였다.
얼마 전 넷플릭스로 잭 스나이더 감독의 SF 영화 ‘레벨 문’을 보다가 “핍진하지 못하군” 하고 소리쳤다. 주인공은 쟁기로 밭을 가는 원시적 행성의 오두막에서 산다. 어럽쇼. 집 안의 문만 자동문이다. 아까운 전기를 생존에 필요한 농사에 쓰지 않고 인테리어에 쓰다니. 그 순간부터 집중할 수가 없었다. 디테일의 핍진성이 엉망이면 모든 게 엉망일 수밖에 없다. 요즘 한국 장르 영화의 문제도 이거다. 근사한 비주얼을 위해 핍진성을 지나치게 무시한다. 요즘 관객은 오롯이 똑똑해 그런 걸 허투루 넘기지 않는다.
저녁 뉴스를 보다 한국 영화에 너무 모질게 굴지 않기로 했다. 좌도 없고 우도 없고 원칙도 없는, 핍진성이라고는 없는 정치다. 핍진성 없는 세상에서 영화가 핍진할 리 만무하다. 그러니 오는 총선에서 나의 투표 기준은 오롯이 핍진성이 될 것이다. 선연하고 명징하게 핍진한 정치인이 있다면 댓글로 알려주시길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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