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과학의 선구자들] 하버드·스미스소니언도 후원… 조선 自然史 세계에 알린 르네상스인
1908년 평양에서 태어난 석주명은 1921년 숭실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서 안익태를 선배로 만난 그는 음악에 심취해 같이 음악극을 만들어 순회 공연을 떠나기도 했다. 숭실학교에서 동맹휴학 사태가 벌어진 1922년 어머니는 그를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로 전학시켰다. 당시 송도고보는 최고의 과학 교육을 자랑했고, 특히 박물관이 훌륭했다. 여기서 박물학(博物學)을 담당하던 조류학자 원홍구를 만나며 석주명의 운명이 바뀐다. 영어로 ‘Natural History(자연사)’라고 하는 박물학은 자연에 따른 생물 종의 변화, 여기에 영향을 미치는 지리와 광물, 더 나아가 지역학을 포함하는 학문이다. 잘 알려진 박물학자로는 찰스 다윈이 있다. 석주명은 자연사에 빠져들었다.
석주명은 1926년 원홍구의 모교 일본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로 진학했다. 이 학교에서 일본 곤충학회 회장을 지낸 오카지마 교수를 만난다. 석주명의 재능을 눈여겨본 그는 나비는 미개척 분야라며 10년만 집중하면 세계적 학자가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1929년 일본 유학을 마친 석주명은 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 박물 교사를 거쳐 1931년 모교 송도고보에서 스승 원홍구에 이어 박물학을 맡았다. 본격적인 나비 연구가 시작되었다. 당시 일본 학계는 조선의 나비가 921종이라고 했지만, 석주명은 그중 무려 844종이 동종이명(synonym), 즉 같은 종인데 이름만 다르게 붙은 것을 알아냈다. 새로운 종으로 보고해 업적을 쌓으려는 욕심이 만든 결과였다. 석주명은 나비 수십만 마리를 채집해 일일이 크기를 재며 과학적 통계 분석으로 조선 나비를 250여 종으로 정리해 우리말 이름을 붙였다.
교사 월급으로는 어림없는 연구였지만 이를 가능하게 한 일이 있었다. 고비사막 탐험을 마치고 일본으로 가던 미국 학자가 도착역을 잘못 듣고 경성이 아닌 개성에 내린 적이 있다. 당황한 그는 미국 선교사가 있던 송도고등보통학교에 들렀다가 이 학교 박물관을 보고 깜짝 놀란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실제 모델로 유명한 로이 채프먼 앤드루스의 탐험대 소속이던 그는 송도고보의 전시물을 미국 박물관과 교환하자고 제안한다. 이를 계기로 석주명의 희귀 표본들이 미국에서 전시돼 비용을 충당할 수 있었다. 석주명은 한술 더 떠 연구비가 필요하다며 재정 지원도 요청했다. 하버드 대학을 시작으로 스미스소니언 등 여러 박물관이 연이어 후원했다. 세계 유력 기관에서 지원을 받아 내자 석주명의 이름이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37년 3월 27일 조선일보에 “과학 조선의 낭보, 영국왕립협회 기관지에 조선산 나비류 소개”라는 기사가 실렸다. 여기서 영국왕립학회는 왕립아시아학회(Royal Asiatic Society·RAS)로, 1824년 설립된 유서 깊은 학회다. 석주명의 명성이 높아지자 RAS가 영문 집필을 요청한 것이다. 이 책이 1940년 뉴욕에서 출판한 ‘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조선 나비 목록)’이다. 컬러 사진까지 넣은 이 책은 한국인이 처음 쓴 영문 과학 서적이고, 현재 프랑스 자연사 박물관과 여러 기관이 보유한 세계적 저작이다. 석주명은 우리가 과학에서 뒤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나라가 아무리 후진국이라 할지라도 우리 땅의 자료를 계통 세우면 그것으로 선진국을 가르칠 수가 있다”고 언론에 자신 있게 말했다.
1942년 석주명은 경성제국대학 생약연구소 연구원이 되었다. 그런데 그가 자청해 간 곳은 생약연구소 부설 제주도 시험장이었다. 나비 채집을 위해 한때 제주를 방문한 석주명은 제주도의 독특한 지리, 환경, 언어, 풍습에 매력을 느껴 연구를 위해 다시 찾은 것이다. 제주 언어가 한국어의 옛말에서 유래했음을 밝힌 석주명의 방언 연구는 지리와 문화를 연결하는 박물학의 연장이었다. 자신의 영문 이름에 평안도 사투리 발음 ‘석두명’을 드러내려고 ‘D. M.’으로 표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더 나아가 오돌또기 등 제주 민요를 악보로 채보하기도 하고, 제주에 여성 인구가 많은 이유도 분석하며 이를 저서 여러 권으로 남겨 제주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자연환경에 따른 생물의 특수성을 파고든 박물학 연구는 다양성을 품는 보편성으로 확장되었다. 그가 에스페란토어 연구를 이끈 것도 특정 강대국 언어가 아닌 보편 언어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해방 후 1946년부터 석주명은 남산 자락에 있던 국립과학관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책 여러 권과 논문 수십 편으로 쉬지 않고 저술을 이어갔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지만, 국립과학관의 수많은 표본과 자료를 두고 떠날 수 없었다. 공산 치하에서도 숨어서 미완 원고를 필사적으로 써 나갔다. 그러나 9월 24일 미군 폭격기 공습으로 과학관이 불탔다. 나비 표본 15만마리뿐 아니라 여기에 전시 중이던 수많은 한국 동식물의 자연 수집품이 사라졌다. 서울이 수복되자 그가 제일 먼저 서두른 일은 과학관 재건이었다. 10월 6일 복구 회의를 위해 집을 나섰다가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그를 인민군으로 오인한 군인들 총에 맞아 사망했다. 대낮에 서울 한복판이었지만 누구도 나서서 말리는 사람이 없었고, 시신은 방치되었다. 그날 집을 나서며 일기에 마지막으로 남긴 글은 ‘Bela tago’, 에스페란토어로 ‘아름다운 날’이라는 뜻이다.
윤치호의 과학 교육 이상이 구현된 송도고보
윤치호는 이념에 빠진 조선을 뿌리부터 바꿀 방법은 과학 교육이라고 생각하고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세웠다. 윤치호의 포부는 원대했다. 서양식 화강암 건물은 당시로는 드문 스팀 난방이었고, 과학 교육을 위해 이화학관(理化學館)을 별관으로 지었다. 이 건물은 120명을 수용하는 계단식 강의실에 발전기까지 설치해 최신 전자기 실험을 할 수 있었고, 물리실험실과 화학실험실도 따로 갖췄다. 또 다른 별관에 지은 박물관은 프린스턴 대학 등 해외 유수 기관과 교류하던 세계적 수준이었다. 여기엔 석주명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당시 송도고보의 시설이 와세다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은 것도 이 때문이다.
교원들도 뛰어났다. 서울대 첫 한국인 총장이 된 수학자 이춘호, 우리나라 최초 물리학 박사 최규남이 모두 송도고보 출신으로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도쿄제국대학 물리학과 출신 도상록이 석주명과 함께 송도고보 교사 생활을 하며 한국인 최초로 양자역학 논문을 발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무렵 홋카이도 제국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한 권영대 역시 송도고보에서 물리를 가르쳤다.
나중에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가 된 권영대는 후학들의 분발을 촉구하며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개성에 있는 송도고보에 있을 때 같이 지내던 석주명 선생에게서도 같은 사례를 보았다. 10년간 나비를 주무르다 보니까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나비 박사가 되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만 10년이면 확실히 큰일 하나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도 볼 수 있다.” 나비 연구로 출발해 지리, 언어, 문화를 박물학으로 확장하며 42년이라는 짧은 생애에 논문 수백 편과 저서 수십 권을 남긴 석주명은 진정한 르네상스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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