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동물원] 사육사를 평생 수컷으로 사랑했던 두루미 할매

정지섭 기자 입력 2024. 3. 6.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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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인효과 너무 큰 탓에 수컷 두루미와의 합사 번번이 실패
신뢰하던 사육사가 수컷 흉내 내내 홀딱 반해
사육사를 짝짓기 파트너로 착각해 8차례 부화 성공

디즈니 놀이공원의 캐릭터 일은 전지구를 통틀어 극한 직업의 하나로 꼽힙니다. 매뉴얼이 여간 깐깐하지 않거든요. 말투와 눈빛 세세한 동선 하나하나까지 여기는 현실과 다른 ‘디즈니 세상’이라는 것을 관람객들에게 명확히 인식시켜야 해요. 고된 현실을 떠나 환상의 세계로 들어오기 위해 적잖은 가격을 지불한 고객이 응당 받아야 할 서비스인 거죠. 이처럼 환상, 즉 환타지는 세상살이에 없어선 안될 소중한 활력소입니다.

최근 고령으로 세상을 떠난 재두루미 월넛과 그가 평생 수컷으로 알고 사랑했던 사육사 크리스 로./Smithsonian National Zoo

어딘가 현실보다 더 멋지고 꿈 같은 세상이 있다는 걸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건 비루하고 험난한 오늘을 버텨낼 동력이 됩니다. 환상이 도를 벗어나면 망상이지만, 적당한 수준의 환상은 활력소가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현타를 부르지 않는 영원한 환상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 뿐 아니라 짐승 세상에서도 환타지는 모두가 윈윈하는 선의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오늘은 평생을 배려와 신의의 환타지에 빠져살다 행복하게 삶을 마감한 한 두루미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천연기념물로 보호받고 있는 멸종위기종 재두루미 암컷이 얼마전 미국 워싱턴DC 스미스소니언동물원에서 마흔 두 살을 일기로 생을 마감했어요. 생로병사가 매일처럼 벌어지고 있는 동물원이지만, 운영진은 제법 긴 부고로 그녀의 특별한 삶을 뜻깊게 추억했어요. 이 재두루미의 이름은 ‘호두’라는 뜻의 월넛입니다. 동물원 측이 만든 추모 영상을 한 번 보실까요?

월넛이 세상을 뜬 건 지난 1월 초였습니다. 도통 식사를 거부하는 등 이상 증세를 보이자 항생제를 투여하고, 냉동쥐와 밀웜 등 영양분이 높은 음식도 줘봤지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어요. 수의사와 사육사들이 달라붙어 정성껏 돌봤지만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야생에서 이 종의 평균수명이 15살이니 사람으로 치면 200살 가까이 살았다고 볼 수 있겠죠. ‘월넛’은 단순히 장수한 두루미가 아니었어요. ‘환타지’의 힘으로 후손의 대를 이은 전대미문의 미션을 완수한 특별한 두루미였죠.

재두루미 월넛의 생전 모습./Smothsonian National Zoo

전세계에 5300여마리밖에 남아있지 않은 재두루미의 주 서식지는 한국·일본·중국·몽골 등 동북아시아와 시베리아 일대입니다. 1981년 불법으로 포획돼 미국으로 끌려가 밀거래되려던 기구한 한쌍의 재두루미 커플이 구조돼 위스콘신주에 있는 국제두루미재단의 보호 시설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이 두루미 커플이 낳은 알에서 태어난 새끼가 ‘월넛’입니다. 보호시설 옆에 호두 파이가게가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죠. 월넛은 보호시설 담당자들의 극진한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게 일종의 ‘독’이 됐어요. 새는 알에서 부화하자마자 마주친 존재를 어미나 아비로 인식하고 무조건적으로 따르거나 의존하는 행동을 보이는데 이를 ‘각인(imprinting)’이라고 하죠. 월넛에게 인간의 존재가 너무 깊게 각인돼다보니,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새들을 무리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어요. 이런 행동방식이 고착화되다보니, 나이가 차서 여러 차례 수컷들과 짝짓기를 주선해도 실패로 끝나곤 했죠. 이성적 매력을 느끼기는커녕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로 여기고 공격하거나 데면데면하기 일쑤였거든요.

어느덧 스물 세살의 중년 아줌마가 된 월넛은 워싱턴 스미스소니언국립동물원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습니다. 강렬한 각인효과로 인해서 정상적인 번식이 어렵게 된 이 새를 어떻게 번식시킬 수 있을지 동물원 연구진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디어를 냈어요. 월넛의 머릿속에 창출돼있는 ‘환타지’를 이용한 거예요. 월넛을 전담으로 돌보는 남자 사육사 크리스 크로가 1인 2역을 맡기로 했습니다. 현실에서는 멸종위기종 새를 돌보는 조류 전담 사육사이지만, 한편으로는 월넛의 환타지 속에서는 ‘섹시하고 우람한 두루미 왕자’로 변신키로 한 것이죠. 로는 번식철이 되면 암컷과 수컷이 화려한 몸동작으로 춤을 추며 애정을 과시하는 특유의 습성을 학습합니다. 그리고 월넛 앞에서 미리 암기한 수컷의 몸동작을 그대로 따라합니다. 팔을 날개처럼 발을 발처럼 움직이고 우렁찬 울음소리를 내면서요. 그 요염한 자태에 월넛이 그만 홀딱 빠져버렸습니다. 어느새 예비신부가 돼 나풀나풀 날갯짓으로 화답하고 듀엣처럼 울음소리로 응답하고, 둥지까지 틀 준비를 합니다. 이 순간만큼 사육사를 함께 사랑을 나누고 알을 만들어갈 수컷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시베리아흰두루미의 성체와 어린 새끼들./UC Berkeley

이렇게 수컷을 맞을 준비가 된 월넛의 몸으로 미리 준비된 정자가 슉 주입됩니다. 동물원 측이 혈통을 따져서 파트너감으로 점찍어뒀던 수컷 재두루미로부터 미리 채취해둔 정자였죠. 월넛의 수컷 두루미를 합사시켰더라면, 여느때처럼 월넛의 사나운 공격으로 불발됐을 공산이 컸을 겁니다. 하지만 두루미인척 하던 사육사의 기가 막힌 연기가 월넛을 홀렸고,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자연스럽게 거사인 듯 거사 아닌 거사를 치를 수 있었던 겁니다. 월넛 입장에서는 비록 환타지 속이지만 이상형과 멋진 사랑을 나눌 수 있었고, 수컷 입장에서는 아무런 일(?)도 하지 못했지만, 여하튼 자신의 씨를 뿌리며 번식에 참여할 수 있었고, 사육사 입장에서는 이 현실과 환타지를 잇는 메신저를 거뜬히 해냈으니 결국 모두에게 윈윈이 아니었나 싶어요.

미국흰두루미 한쌍이 플로리다 에버글레이즈습지에서 구애동작을 펼치고 있다./National Parks Service

이 과정을 통해서 월넛은 거뜬히 번식에 성공했어요. 이런 방법으로 2005년부터 2020년까지 8차례 새끼를 부화해 건강하게 성장시켰다고 합니다. 그렇게 태어난 새끼들이 성장해서 다시 번식에 성공하는 등 벌써 일가를 이루고 있죠. 이 두루미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사육사 로를 평생의 낭군으로 알았을 겁니다. 그 ‘환타지’의 힘으로 멸종위기에 놓인 가문의 대를 잇는데 큰 도움을 줬을 것입니다.

가장 화려한 모습의 두루미인 아프리카 원산 회색관두루미./San Diego Zoo

월넛의 삶은 십장생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영물로 알려진 두루미의 독특한 면을 재확인시켜주고 있기도 해요. 길고 늘씬한 다리와 쭉 뻗은 부리, 맵시있는 몸매로 특징지워지는 두루미는 남아메리카를 제외한 전세계에 10여종이 있습니다. 비슷비슷한 생김새이지만, 사는 곳에 따라 깃털색과 날개모양, 부리의 크기 등이 조금씩 다르죠. 특히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은 얼굴 색깔입니다. 아방가르드 화가가 작심하고 색칠한 것처럼 각 두루미들의 얼굴 색 구성이 정말 독특하거든요. 그 중 재두루미의 경우 몸의 대부분이 흑백톤의 깃털로 덮여있지만 얼굴만큼은 선명한 핏빛 깃털로 물들어있으며, 눈 밑은 또 짙은 회색으로 돼있는데, 마치 병에라도 걸린 양 깃털이 뭉텅뭉텅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눈앞에 살갗이 노출돼있는 건 많은 두루미들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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