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의 오마이갓]트롯 ‘99881234’를 듣다가 떠오른 분
‘구구팔팔, 일이삼사~’
지난주 TV조선 ‘미스트롯3′ 준결승전을 시청하다가 흥얼거린 노래입니다. ‘99881234′가 제목이지요. 나영이 부른 이 노래는 이미 나온 곡이 아니라 이번에 작곡한 신곡입니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하루 이틀 삼일만 아프다 가자’는 가사입니다. 처음 듣는 노래였지만 멜로디는 귀에 쏙쏙 들어오고 가사도 입에 착착 감겨서 2절부터는 관객들도 따라 부를 정도였지요.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누구나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겁니다. ‘99세까지는 몰라도 팔팔하게 살다가 짧게 아프고 가고 싶다’ 이런 생각을요.
이 노래를 들으면서 제 머릿속에는 한 미국인 신부님이 떠올랐습니다. 지난 2010년 선종(善終)한 도요안 신부님입니다. 한국 천주교계에서 ‘노동사목의 아버지’로 불린 분입니다. 1959년 살레시오회 선교사로 한국과 첫 인연을 맺은 도 신부님은 사제서품 후인 1968년 정식으로 한국에 부임했지요. 전태일 분신사건 이듬해인 1971년 당시 김수환 추기경의 부탁으로 당시 한국엔 용어조차 낯설었던 ‘노동사목위원회’를 만들어 평생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돌보는 역할을 맡았던 분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도 신부님은 99세까지 장수(長壽)하신 분이 아닙니다. 73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전에 건강하시지도 않았습니다. 90년대초부터 신장암, 척추암, 임파선암 등 각종 질병으로 고생하셨지요. 그럼에도 ‘99881234′ 노래를 들으면서, 건강하게 장수하다 편안하게 세상을 떠난 종교인도 많은데, 하필 도 신부님이 떠올랐을까요. 저 스스로도 의문이었습니다. 곰곰히 생각을 하다 제 나름대로 찾은 이유는 ‘하루 이틀 삼일만 아프다 가자’라는 부분이었습니다. 도 신부님은 많은 질병으로 고통 받았음에도 이틀, 사흘은커녕 하루도 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선종하셨거든요.
도 신부님은 자신의 사무실 책상에 앉은 채로 선종했습니다. 정확하게는 ‘앉은 채로 발견’됐습니다. 당시 부음 기사엔 “도 신부님은 마지막까지 책상 컴퓨터 앞에서 내년 노동사목위원회 40년사 원고를 집필하시던 모습으로 선종하셨다”는 증언이 실렸습니다.
누구나 삶의 마지막 순간을 병원 침대에서 보내는 것은 원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자신이 하던 일을 하면서 세상을 떠나기를 바라곤 하지요. 흔히 배우나 가수는 ‘무대 위에서 죽고 싶다’고 하고, 미술가들은 ‘붓을 들고 죽고 싶다’고 하지요. 그런 점에서 도 신부님은 평생 하던 일을 하던 중 세상을 떠났으니 행복한 분이 아닐까요.
저는 도 신부님을 생전에 두 번 인터뷰했습니다. 첫 만남은 2004년 신부님이 희귀 척추암 수술을 위해 서울 여의도성모병원에 입원했을 때였습니다. 당시 전국적인 혈액 부족 사태가 심했는데 도 신부님이 수혈이 필요하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전국의 신부, 수녀, 의사들의 헌혈이 줄을 이어 수술에 필요한 혈액이 하루만에 확보됐지요. 김수환 추기경이 병실로 면회를 왔었다고 했습니다.
두번째 만남은 서울 보문동 노동사목위원회 사무실에서였습니다. 도 신부님이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을 것이다’라는 책을 출간해 인터뷰했습니다. 책 제목은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마태오복음(마태복음) 구절에서 따왔지요. 그는 인터뷰에서 “한국은 이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유해졌습니다. 그렇지만 부의 즐거움에 지나치게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가난’에 관한 책을 썼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기사는 “배부르다고 벌써 가난을 잊었는가”라는 제목으로 보도됐습니다.
당시 인터뷰에서 기억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없는 세상이 되면 좋지 않겠는가’라는 취지로 질문하자 그는 정말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없는 세상은 결코 없습니다.” 우문현답이었습니다. 그는 ‘모두가 잘 사는 세상’ 같은 허황된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서 더 나아가 청빈(淸貧)을 통해 ‘참 행복’을 얻자고 했습니다. 참 행복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여기는 행복과는 반대라고 했지요. “우리 자신을 비우고 가난해지면 정의로워지고, 그 다음에야 비로소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올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가난한 이들은 늘 우리 곁에 있고, 그들을 찾기 위한 방법은 “그저 눈을 뜨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 울림이 오래도록 화두처럼 남았습니다.
트롯 노래를 듣다가 도요안 신부님 이야기까지 흘러왔습니다. 덕분에 옛날 기사와 도요안 신부님 책까지 뒤적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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