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믿는 도끼

최원규 논설위원 2024. 3. 5.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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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상훈

오랜 기간 금융회사 CEO를 맡고 있는 사람이 몇 년 전 겪은 일이다. 차에 탔더니 운전기사가 예상치 못한 말을 던졌다고 한다. “벌어놓은 돈도 없고, 부모님은 아프시고, 내 인생이 참….” 명절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놀란 CEO는 “고향에 다녀오라”며 돈봉투를 건넸다.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사람 심기를 괜히 건드리기 싫었다고 한다. 그 CEO는 아직도 눈치 보며 그 운전기사가 모는 차를 탄다. 수사를 받던 미래저축은행 회장이 중국 밀항 직전 체포된 것도 운전기사 제보 때문이었다.

▶특히 정치인에게 운전기사는 최측근 중 한 명이다. 2012년 총선에서 당선된 어느 국회의원은 공천 헌금 건네는 장면을 지켜본 운전기사 신고로 유죄가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2014년엔 운전기사가 국회의원 차에 있던 현금 3000만원과 서류 뭉치가 든 가방을 검찰에 넘긴 일도 있다. 이 의원도 의원직을 잃었다.

▶보좌관이나 비서들도 국회의원의 ‘급소’를 쥐고 있을 때가 많다. 2015년 보좌관들 급여를 떼 불법 정치자금을 만든 국회의원에 대한 수사도 보좌관 제보로 시작됐다. 그해 운전기사에 이어 보좌진에게도 “약점 잡히지 말자”는 주의보가 정치권에 내렸다고 한다. 의원들은 “명절 때 가장 먼저 운전기사 챙기고, 다음으로 보좌진을 챙긴다”고 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배신 방지’의 뜻도 담겨 있다.

▶기업에선 오너들이 가장 믿는 ‘금고지기’들의 횡령이 끊이지 않는다. 2009년 D건설 자금 담당 부장이 1898억원을 횡령한 사실이 드러나자 회사는 일간지에 그의 실명과 얼굴 사진 광고를 싣고 현상금 3억원까지 내걸었다. C그룹 비자금 수사도 그룹 재무팀장이 돈을 빼돌려 투자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시작됐다. 몇 년 전엔 임플란트 업체 자금관리팀장이 회삿돈 수천억 원을 횡령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건으로 회사는 사모펀드 먹잇감이 돼 경영권까지 빼앗겼다. 회장으로선 땅을 칠 노릇이다.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이 최근 “비서가 내 개인 돈과 공금 등 26억원을 빼돌렸다”며 고소했다. 비서는 노 관장 신분증 사본과 인감도장까지 이용했다고 한다. 믿었던 측근에게 배신당한 충격은 당해 본 사람만이 안다고 한다. 몇 해 전 전직 정치인 한 사람은 이런 일로 극단 선택까지 했다. 500여 년 전 마키아벨리는 “인간은 배은망덕하고, 이익엔 열정적”이라고 했다. 우리에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속담이 있다. 사람 쓰는 일이 정말 어렵고 조심스러움을 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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