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 각광받는 아세안 시장, 어떻게 공략할까
2024년 한국과 아세안은 관계 수립 35주년을 맞는다. 한국과 아세안, 한국과 동남아 관계는 그간 정부의 정책, 기업의 도전, 그리고 민간의 관심이 어우러져 빠른 발전을 거듭해왔다. 냉전 직후 기업의 발 빠른 대(對) 동남아, 특히 베트남 투자는 이후 한-아세안 경제협력을 견인해왔다.
아세안은 이제 한국의 두 번째로 큰 무역대상이자 투자대상이다. 지역다자협력에서 김대중 정부의 주도적 역할,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신남방정책은 한-아세안 관계, 한-동남아 관계의 비약적 발전을 가져왔다. 민간 부문의 인적 교류, 학술 교류, 문화예술 교류는 한-아세안 관계의 폭을 크게 넓혀왔다. 연간 한-아세안 사이 상호 방문자는 1천만명을 넘는다. 한국에는 약 65만명의 아세안 국가 국민이, 아세안에는 약 30만의 한국인이 살고 있다.
한-아세안 관계의 비약적 발전과 협력 관계의 심화에 따라 한-아세안 관계의 지속가능성과 미래에 관한 질문이 꾸준히 제기된다. 단기적이고 경제 위주의 관계를 넘어 한국과 아세안 협력은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할 것인가? 한국에게 아세안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협력 파트너인가? 만약 그렇다면 한국과 아세안 관계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이 질문들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전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한국과 아세안이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가는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협력을 하는가에 따라 좌우된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향후 한국과 아세안 사이 협력은 어떠해야 하며, 무엇을 지향해야할지 몇가지 중요한 사항들을 짚어 본다.
◆눈앞의 안보보다 미래를 위한 전략적 협력
한-아세안 협력을 말할 때 늘 첫 번째 자리에 오지만 발전이 뒤처진 분야가 정치안보 협력이다. 안보, 국방, 전략적 협력과 지역 다자협력체 속 한-아세안 협력이 모두 이 분야에 포함된다.
오랫동안 한반도 안보 문제에 모든 에너지를 쏟았던 한국은 한국의 안보를 위해 아세안을 어떻게 활용할까에만 관심을 두어왔다. 안보 협력은 공통의 안보 위협을 공유할 때 깊어진다. 한국과 아세안은 이런 공통의 안보 위협을 공유하지는 않는다. 한국의 첫 번째 안보 관심사는 한반도 문제다. 아세안에게는 자신들의 다른 안보 사안이 있다. 아세안이 한반도 문제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나 가장 중요한 안보 사안은 아니다. 한국과 아세안은 구조적으로 안보 협력을 발전시키기에 좋은 조건을 결여하고 있다.
한국은 아세안과 정치안보 부문에서 안보보다 공통의 장기적 위협에 대비한 전략적 협력에 무게를 두어야 한다. 전략적 협력의 심화는 신뢰를 강화하고 전략적 신뢰의 강화는 자연스럽게 안보 협력으로 나갈 수도 있다. 한-아세안이 처한 장기적 위협의 예로 현재 벌어지고 있는 미-중 경쟁이 있다. 한국과 아세안은 미-중 경쟁이 가져오는 부정적인 여파를 공유한다. 미중 경쟁이 가져오는 지역 질서의 혼란, 미-중 사이 선택이라는 전략적 딜레마, 강대국의 경제 전쟁, 공급망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을 똑같이 겪고 있다.
한국과 아세안이 처한 전략적 불확실성의 근원이 같다면 공동의 노력으로 여기에 대처하고 해결하려는 전략적 협력의 충분한 이유는 있다. 이미 김대중 정부 시기 공통의 경제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아세안+3 지역협력에서 이는 확인되었다.
미-중 경쟁에서 공통의 딜레마를 겪고 있는 한국과 아세안은 서로에게 의지하고 서로의 입장을 지지해주는 협력을 발전시켜야 한다. 위기 시 복원력 강화를 위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전략적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다. 나아가 강대국 이익을 반영한 질서가 지역을 지배하도록 놔둘 것이 아니라 지역 중소국가들을 위한 바람직한 지역질서를 함께 고민하고 확산시켜야 한다.
한국과 아세안이 바람직한 지역 질서 형성을 위해 지역 중견국가, 중소국가를 규합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지역 평화를 위한 한-아세안 국방협력
국방 부문의 협력도 중요하다. 아세안 국가들이 최고의 목표로 생각하는 경제 성장은 안정적인 지역 환경에서 나온다. 강대국에 의탁한 지역의 평화와 안정이 아니라 스스로 자국의 영토와 해양을 방어하고 주권을 지킬 능력을 확보할 때 궁극적인 평화와 안정이 가능하다.
아세안 국가들이 국방력 신장을 꾀할 때 한국보다 나은 협력의 파트너는 없다. 아세안에게 한국은 위협적이지 않으며 아세안 국가들이 필요로 하는 적정 능력과 국방 기술을 가지고 있다. 미중 경쟁 속에 아세안에게 한국과 국방 협력은 상대적으로 다른 파트너와 협력에 비해 안전한 선택지다.
다만 한국은 아세안과 국방 협력에서 몇 가지를 확실히 해야 한다. 한국의 대 아세안 전략이나 인도-태평양을 염두에 둔 대외전략은 모두 평화를 강조한다. 언뜻 국방 협력과 평화는 모순되는 듯 하다. 그러나 한-아세안 국방 협력은 지역의 군비 경쟁을 위한 것도, 특정 강대국을 겨냥한 것도 아니다. 아세안 국가들이 자기 주권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억지력(minimum deterrence)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 목표이고, 이것이 궁극적으로 지역의 평화와 안정으로 가는 길이라는 점을 확실히 해야 한다.
이런 협력은 한국에게도 소중한 자산이 된다. 아세안 국가와 전략적 협력, 국방 협력을 강화할 때 한국은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다양한 경험을 축적할 수 있다. 오랫동안 한반도 안에 갇혀 있던 한국의 전략적 사고가 한반도를 넘어 더 넓은 지역으로 확장되는 출발점이 아세안과 전략적 협력, 국방협력이다.
이를 통해 일차적으로는 아세안과 한국 사이 정치안보 부문 협력의 활로를 찾을 수 있다. 아세안과 협력에서 얻어진 한국의 경험은 한국의 외교력, 경제력, 군사력에 비추어 지역적, 글로벌 차원의 공헌을 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넘어설 자산이 된다. 아세안을 출발점으로, 인태 지역으로, 글로벌 차원으로 한국의 전략적 사고, 대외정책, 글로벌 공헌을 확장할 수 있다.
◆아세안은 매력적인 파트너인가?
아세안은 무역과 투자에서 꾸준하게 한국의 제 2의 파트너 자리를 지켜왔다. 2022년 한-아세안 무역은 2천억 달러를 넘었고 한국은 아세안 시장에서 420억 달러 무역 흑자를 기록했다. 아세안에 투자한 한국 법인수는 거의 2만개에 육박한다. 수많은 중소기업과 대부분의 한국 대기업이 아세안에 진출해 있다. 최근에는 단순 제조업 뿐 아니라 배터리와 전기차를 가지고 인도네시아에 나간 현대자동차의 예에서 보듯 첨단, 미래 산업 부문에 대한 투자로 이어지고 있다. 배터리에 필요한 원자재 니켈을 확보하는 동시에 하나의 시장으로 묶인 아세안 지역 전기차 시장을 선점하려는 포석이다.
이쯤에서 한국과 아세안 사이 경제협력의 미래를 고민해야 한다. 당장은 이익이 나는 시장이고 한국과 경제 협력의 깊이도 깊지만 언제까지 아세안의 이런 장점이 유지될지 아세안의 미래 불확실성에 대한 고민도 있다.
앞으로도 아세안은 매력적인 시장으로, 생산기지로 지위를 유지할 것인가? 아세안 경제는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할 것인가? 미중 경쟁 속에 아세안의 경제적 장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단순한 수출 시장, 노동력이 싼 생산기지를 넘어서는 아세안의 장점은 무엇인가? 장기적으로 아세안은 신뢰할만한 경제적 파트너인가? 더 구체적으로 아세안 국가 정부 정책의 불안정성이 한국 기업 활동의 예측가능성을 떨어뜨리지는 않을까? 장기적으로 아세안 국가의 정치, 민주주의의 미래는 한국과 경제관계에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한국 정부가, 한국 기업이 아세안을 단기적 기회 창출에 특화된 시장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아세안을 장기적으로 함께 할 경제협력의 파트너로 볼 것인지에 달려 있다.
확실한 것은 향후에도 오랫동안 아세안은 유망한 시장이자 미래가 밝은 생산기지라는 점이다. 아세안 경제도 어려움을 겪을 수 있겠지만 다른 국가나 지역에 비해 사정은 나을 것이다. 인구는 아직 젊고, 자원은 여전히 풍부하며, 아세안 국가의 경제성장 의지는 명확하다. 한국 뿐만 아니라 미국, 중국, 일본, 인도, 호주, 유럽이 모두 아세안에 주목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자원 공급망 불안정에 따라 아세안 국가의 풍부한 천연자원을 둘러싼 경쟁이 벌어질 정도로 아세안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속도가 더디더라도 아세안의 통합에 따라 시간이 갈수록 아세안 경제도 하나로 통합될 것이다. 국제경제에서 경쟁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아세안의 필요성에 의해 아세안 경제는 통합의 방향으로 움직일 수 밖에 없다. 중국에 투자를 하는 동시에 아세안 국가에 발을 걸치는 China+1 전략도 아세안에게 더 많은 기회를 만들어 낸다.
물론 아세안도 나름의 위험요인이 있지만 다른 지역, 국가의 위험요인과 불확실성은 더 크다. 아세안 국가들이 경제성장을 위해 외부, 특히 한국으로부터 필요한 부분이 있는 한 정치적 리스크는 관리될 수 있다. 아세안과 경제관계 심화가 한국과 다른 국가 사이 경제협력과 관계를 희생시키지도 않는다. 경제적 다변화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며 파이를 키우고 리스크를 관리하는 방법이다.
◆아세안에 대한 한국, 기업의 전략은?
아세안의 경제적 중요성은 충분하니 이제 전략이 필요하다. 한국 정부는 아세안의 경제성장이 곧 한국에게 기회가 되고 더 나아가 한국의 성장 동력이 된다는 선순환적인 시각으로 아세안 경제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사실 문재인 정부의 신남방정책 경제적 전략이 이런 인식 기반 위에 구성되었고 이는 아직 유효하다. 아세안이 경제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아세안은 한국을 더욱 필요로 할 것이다. 아세안 국가의 제조업 성장에 따라 한국의 부품과 소재, 기술에 대한 아세안의 수요는 더욱 증가할 것이다. 아세안 국가의 경제성장은 국민들의 구매력을 높이고 이는 다시 한국 상품에 대한 수요로 연결된다. 한국과 아세안 경제의 상호의존성이 높아진 바탕 위에 아세안이 경제성장을 지속한다면 아세안에서 한국의 경제적 기회는 확대된다.
과거 아세안을 단기적 투자처, 단순한 시장으로 생각했던 기업의 생각도 점차 바뀌고 있다. 개발도상국 시절 한국의 아세안 진출, 아세안 투자는 단기 이익을 위해 들어가서 부딪히며 시행착오를 통해 배우는 식이었다. 현지 문화에 대한 이해와 존중은 고사하고 발전 독재 시기 기업 경영과 노사관리를 동남아에 적용하면서 많은 노사간 갈등도 겪었다. 한국 기업의 동남아 진출이 동남아 국가의 성장과 소득 증대에 기여를 하고 한국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만들어 낸 것 만큼이나 한국의 이미지를 나쁘게 하는 역할도 했다. 단기적 이익을 보고 떠나면 그만이라는 인식이 바탕에 있었다.
과거 단순한 수출과 투자를 통해 단기적 이익을 창출하려 했던 기업들이 이제 점차 대기업을 중심으로 현지에 뿌리를 내리는 추세다. 현지 사회에 대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 현지에서 자체 인력을 배출하는 직업 교육, 현지 사회에 대한 공헌 등이 장기적으로 기업 활동에, 이윤 창출에 바람직하다는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은 기업의 이익 만큼이나 베트남 사회에 대한 공헌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 기업에 필요한 인재 육성을 위한 직업 교육은 기업에도, 현지 사회에도 긍정적 결과를 남긴다. 나아가 한국의 대 아세안 투자가 환경, 기후변화, 아세안 국가의 포용적 경제성장에 대한 영향으로 까지 인식이 확대되고 있다.
도전적 기업이라면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이제는 더 큰 전략과 정교한 접근을 통해 장기적으로 아세안 국가에 공고한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투자 이전에, 진출 이전에 현지의 역사, 사회, 문화, 정치, 경제에 대해 체계적으로 지식과 정보를 쌓고 현지를 이해하는 탄탄한 준비를 해야 한다.
진출 시점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기업 차원에서 현지 정치, 경제, 사회변동을 추적하고 이를 통해 지식 기반을 축적해야 한다. 눈 앞의 경제 상황 뿐만 아니라 기업이 진출한 동남아 국가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도모하고 그 변화의 양상을 추적하는 것은 지금 당장의 비용이 될지는 몰라도 장기적으로 현지에서 하는 기업 활동에 플러스 요인이 될 것이다. ※본 기고의 원문 출처는 '동아시아재단 정책논쟁 210호'임을 밝히며, 원문의 저작권은 동아시아재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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