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정원 늘려도 … 외과 대신 '피부과' 불보듯 [기고]

2024. 3. 5.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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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과·산부인과 전문의들
돈 잘 버는 미용분야로 이탈
필수과 기피현상 더 심해져
18세미만 성형수술 금지 등
과열된 미용시장 냉각 필요
필수의료 수가 개선 노력도
3일 서울 여의도공원 인근에서 열린 의대 정원 증원 및 필수의료 패키지 저지를 위한 전국 의사 총궐기대회에서 참가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향후 부족할 의사 인력의 대량 증원을 앞두고 의료계와 정부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오랫동안 의료현장을 지켜온 현직 의사 입장에서 주변을 살펴보면 가장 큰 문제는 의사 부족이 아니라 국민의 질병을 치료해줄 의사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배출된 기존의 많은 의사들이 전문 진료과목을 포기하고 돈이 되는 미용 분야로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전공한 진료과목은 수입이나 진료 환경이 부족하다고 느끼다 보니 진입장벽이 낮다고 생각되고 보험 적용이 안 되는 피부미용 분야로 진출하는 것이다.

출산 수요가 떨어지니 산부인과 전문의들이 미용성형으로 눈을 돌리고,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들이 낮은 진료수가와 일부 젊은 엄마들의 갑질 망신주기 등을 이유로 자존심을 버리고 피부미용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말 3000명이 넘는 의사들이 참여한 피부미용 레이저 관련 학회에 소아청소년과 개원의들이 대거 참가했다. 다른 동료 의사들이 위로와 격려 차원에서 참가비 면제와 함께 힘찬 박수로 응원까지 해주기도 했다.

메스를 2년 넘게 놓은 의사가 다시 수술을 위해 메스를 드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두려운 일인가는 외과 분야 의사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다. 그것 때문에 소중한 수술 경험을 포기하고 비수술적 진료에만 매진하는 외과의사들도 자주 보게 된다.

이 때문에 필수의료 전문의들이 자부심과 책임감을 갖고 국민 건강을 위해 매진할수 있도록 법적 보호 및 의료 환경을 개선시켜 주는 정부 노력이 현재와 같은 압박 못지않게 중요하다.

전공의 집단 이탈으로 인한 의료 공백이 길어지는 가운데 지난달 27일 부산의 한 대학병원 내 병상이 텅 비어 있다. 연합뉴스

요즘 대학병원 교수들은 전공의들이 파업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을 것을 우려한다. 전문의 수련 과정을 포기하고 의사면허만을 취득하고 곧바로 의료 시장으로 진출하는 젊은 의사도 많기 때문이다. 또 영어에 익숙한 세대인 만큼 미국처럼 의사가 대접받는 해외 의료시장 도전도 어렵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의대 입학 정원을 아무리 늘리고 또 의사 배출이 많아져도 국민의 질병 치료에 필수적인 의료 인력의 양적·질적 증가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졸업한 의대생들이 인턴과 레지던트라는 4~5년 수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선배 교수들의 의료 경험과 지식, 환자 케어 등을 도제식으로 지도받는 과정이 없다면 대학병원의 입원실과 수술실, 응급실은 유지될 수 없다. 또 수련 과정을 아예 생략하고 의과대학이 침습행위가 가능한 의사면허나 따는 학원처럼 전락한다면 끔찍한 인적자원의 낭비다. 실제로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막바로 위험 부담이 작고, 돈이 되고 야간 진료가 없는 소위 '쁘띠시술' 등으로 빠져나가는 젊은 의사가 많다고 들었다.

수련의 생활은 고달프다. 선배나 교수들로부터 꾸지람을 듣고, 새벽부터 일어나 회진 준비를 하며, 낮에는 종일 교수와 같이 환자 진료나 수술 보조를 하고, 저녁 회진에 야간 당직과 응급실까지 도맡아야 한다. 그런 고생 끝에 전문의가 돼도 일찍부터 '쁘띠시술' 시장에 진출한 일반의들보다 수입이나 병원 규모 면에서 결코 나아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히려 그들의 큰 병원 밑에서 페이닥터로 고용돼 일해야 하는 경우까지 있는 게 현실이다. 나중에 수입을 위해 미용 분야 '쁘띠시술'을 따로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힘든 수련 과정 자체에 자괴감을 들게 할 수도 있다. 교수들이 호소하는 의사윤리와 아픈 환자들을 우선 생각하라는 책임감, 정부 압박만으로 이들에게 힘든 의료 현장을 지키라고만 할 수는 없다.

오죽하면 의과대학 졸업 후 일정 기간 임상경험 없이 막바로 의료시장으로 진출하는 것을 제한하는 법안까지 만들어야 한다고 교수들이 주장하겠는가.

그러나 의사면허만 있으면 별도로 '쁘띠시술' 분야의 트레이닝을 자체적으로 시켜주고 고수익에 주변의 부러움까지 한 몸에 받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유혹을 쉽게 뿌리치기는 어렵다. 이 같은 의료 왜곡 현상이 특이했던 의료 정책의 실패가 불러온 것이라는 것을 의사들은 알고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부추기는 수많은 피부미용성형 홍보 영상은 국민의 질병 치료와는 전혀 무관한 의사들 간의 상호 경쟁과 경제적 수단을 위한 것이다. 이것이 또다시 피부미용 수요를 부추기는 것이다.

요즘은 고등학생은 물론 중학생들까지 겨울방학 때마다 쌍꺼풀 수술 등 미용성형을 위해 성형의원을 방문한다. 과열된 미용성형 분위기를 가라앉히는 것도 필요하다. 18세 미만 청소년들에게는 미용성형 수술 금지라는 입법으로 과다한 미용성형 열풍을 식혀준 대만의 입법 사례를 참고해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지나치게 자극적으로 미용을 부추기는 광고 역시 자제될 수 있으면 좋겠다.

분단 국가인 우리나라는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그리고 이스라엘·하마스 간 전쟁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필수 의료인력 양성과 유지가 단순 의사 수 증가보다 더욱 절실하다. 신경외과, 정형외과, 흉부외과, 일반외과, 성형외과는 외상 치료에 필수 의료 분야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아무리 급하다 해도 필러, 보톡스, 레이저 같은 '쁘띠시술'만을 했던 의사들한테 머리, 가슴, 복부 수술을 맡길 수는 없다.

의료인력 양성은 15~16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한번 이쪽 분야로 방향을 잡은 인력을 다른 산업 분야로 돌리는 것은 더욱 어렵다. 저출산 시대에 우수한 인적자원이 의료 분야로만 쏠리는 것은 국가적인 재앙일 수도 있다. 기존에 양성·배출된 필수 의료인력이 자부심을 갖고 일할 수 있는 의료 환경이 필요하다. 또한 의사는 단순히 부(富)만 좇는 집단이 아니라 국민 건강을 위해 어렵게 양성된 의료인력이라고 생각을 바꿀 수 있도록 하는 제도 마련도 필요하다.

[이은정 연세자연미 원장 (의학박사·법학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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