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도 아니고…트럼프 유세 4시간 반 줄 서보니 [이정민의 워싱턴정치K]

이정민 2024. 3. 5.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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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시간 1일, 트럼프 전 대통령의 선거 홈페이지에 새로운 연설 일정이 떴습니다. 미국 버지니아주의 주도인 리치먼드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연설한다는 안내였습니다. 5일 미국 16개 지역에서 동시에 치러지는 경선, 이른바 '수퍼 화요일'을 앞둔 트럼프 후보의 막바지 유세 현장이 될 터였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 캠프는 외신엔 미디어용 프레스카드를 거의 발급하지 않습니다. 이 참에 트럼프 지지자들과 같은 경험을 해보자는 생각에 KBS 취재진도 미국 일반 시민들과 동일한 절차로 연설 참석 신청을 했습니다. 온라인 등록을 마치자마자 이메일로 안내문이 날아왔습니다. '행사 시작은 6시입니다. 참석자들은 3시 반까지 와주세요.'

■ 전날부터 밤새는 '트럼프 연설'…트럼프 '굿즈'는 필수품

두 시간 반 전에 오라고?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은 도착하자마자 바로 알게 됐습니다. 행사 시작 네 시간 전인 오후 두 시에 도착했는데도 이미 끝도 없는 줄이 늘어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지 언론들은 아침 6시부터 지지자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고, 일부는 자리를 맡으려 전날부터 밤을 새웠다고 보도했습니다. 연설 장소는 버지니아주였지만, 주차장을 둘러보니 인근 메릴랜드, 뉴욕, 노스캐롤라이나 등의 번호판을 달고 온 차들도 잔뜩 보였습니다.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의 트럼프 유세 현장. 건물 각 면을 돌면서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KBS)


오후 2시 시점에는 이미 수천 명이 만든 줄이 커다란 컨벤션센터의 절반을 둘러쌌는데, 취재진이 연설 장소에 들어갈 수 있었던 시각은 오후 6시 40분. 네 시간 반을 기다리고도 연설이 시작된 뒤에야 입장이 가능했습니다. 줄 뒷부분에 서 있던 사람들은 한 시간 반 동안 이어진 연설을 보지 못하고 대여섯 시간 서서 기다리기만 하다 발길을 돌렸다는 얘깁니다.

어떤 지지자들도 긴 기다림에 대한 불평 불만을 하지 않는 게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모자나 티셔츠, 후드티로 단장하지 않은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트럼프의 홍보 문구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이 쓰여진 빨간 모자가 10달러에 팔리고 있었는데, 이미 트럼프 티셔츠를 입었거나 트럼프 지지 배지를 주렁주렁 단 사람조차 모자를 또 구입하려고 지갑을 여는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줄을 선 건물 주위엔 트럼프 깃발을 휘날리는 차량이 돌고 있었습니다. 군중들이 차량을 향해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반면 공화당 경선의 유일한 트럼프의 경쟁자 니키 헤일리의 홍보 차량에는 손가락 욕설을 하거나 야유를 보냈습니다. 기다리다 지친 사람 중 몇은 커다란 목소리로 'USA' '트럼프'를 연호하거나 '레츠 고 브랜던(Let's go Brandon)'(바이든 대통령을 비방하는 구호)을 선창했습니다. 줄을 선 사람들이 일제히 구호에 화답했습니다.


트럼프 지지 깃발을 걸고 유세장 주변을 도는 트럼프 지지 차량(위), 유세장 주변에서 트럼프 지지 물품을 파는 노점상(좌/아래) 트럼프 지지 문구와 미국 국기로 옷을 만들어 입고 유세장을 찾은 지지자(우/하단) (사진=KBS)


■ 의원 후보도, 지지단체·반대시위도 몰렸다

트럼프의 인기를 등에 업고 상·하원 의원에 도전하는 후보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오는 11월 대선은 상·하원 의원 선거와 같이 치러집니다. 줄을 선 군중들에게 선거운동원이 다가와 지지 서명을 받거나 아예 후보자가 직접 인사를 다녔습니다. 존 맥과이어 상원의원(공화당 소속)은 쌀쌀한 날씨에도 수트 차림에 공화당을 상징하는 붉은 넥타이를 매고 줄을 선 트럼프 지지자들과 일일이 인사하며 한 표를 호소했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각종 형사 기소에도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기소를 중지해야 한다며 서명을 받는 사람도 다가왔습니다. 그가 든 전단지에는 "민주당이 여론조사 1위를 달리는 대통령 후보를 끌어내려 죽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려는 노골적인 위헌 계획을 세우고 있다. 트럼프에 대한 4건의 기소가 계속된다면 미국은 전체주의 제국이 될 거다"라는 주장이 쓰여 있었습니다. 서명을 요구받은 취재진이 "나는 미국인이 아니다"고 말하니 "이건 전 지구적 싸움이니 미국인이 아니라도 상관없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트럼프 유세장에 늘어선 지지자들에게 한 표를 호소하고 있는 존 맥과이어 상원의원(좌)와 트럼프 기소 중지에 동의하는 서명을 받고 있는 지지자. 바이든을 이탈리아의 독재자라고 칭한 푯말을 걸고 있다(우). (사진=KBS)


트럼프의 지지자들만 행사장을 찾은 건 아니었습니다. 줄을 선 지 두 시간이 지나자 길 건너편 트럼프 반대 시위가 눈에 띄었습니다. 몇몇이 "당신의 동료 미국인들은 적이 아니다", "트럼프는 독재자이지 공화당원이 아니"라는 푯말을 들었다가 야유를 받았습니다. 취재진 바로 뒤에 서 있던 20대 트럼프 지지자는 "뭣도 모르는 소리를 한다"고 혀를 찼습니다. 조끼에 트럼프 지지 배지를 주렁주렁 단 지지자는 "여기서 꺼져라"고 소리치기도 했습니다.

연설장 맞은편에 서 있는 트럼프 반대 시위대. (사진=KBS)


■ "몇 시간 기다려도 불만 없어요"…"바이든 유죄"에 환호

네 시간 반을 기다려 연설장에 입장하는 순간, 왜 그렇게 기다림이 길었는지 알게 됐습니다. 전직 대통령으로 경호 대상인 트럼프 관련 행사장에 입장하려면 차례로 짐 검사를 받고 검색대를 통과해야 했는데 수천 명을 통과시킬 검색대가 네 개밖에 되지 않았던 겁니다. 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지지자들은 일제히 팔을 높이 들어 휴대전화 녹화를 시작했습니다.

트럼프의 연설은 언제나 긴데, 이번에도 한 시간 반이나 계속됐습니다. 마무리엔 장엄한 음악을 깔고 분위기를 고조시키는데, 음악이 깔리고 나서도 10분이나 더 연설을 이어갈 정도였습니다. 내용은 대부분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비판과 조롱으로 채워졌습니다.

"이 나라는 엉망입니다. 천5백만에서 천5백만 명의 이민자들이 들어왔습니다. 감옥과 정신병원에서 왔거나 테러리스트, 마약상 같은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나에 대한 기소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녀사냥의 연속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겁니다", "비뚤어진 조 바이든이 범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올해 11월 그는 투표소에서 미국국민들에 의해 유죄로 판단 받을 것입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 유세장에 모인 지지자들이 트럼프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다. (사진=KBS)


트럼프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취재진 옆 자리의 여성은 환호성을 질렀고, 뒷자리의 20대 남성은 "USA"를 연호했습니다. 앞자리에 앉은 중년 여성은 가슴에 손을 얹고 남편과 눈을 마주치며 감동 받았다는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공화당 후보들의 연설보다 지지자 반응이 격하다는 게 트럼프 연설의 특징입니다. 수천 명의 청중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트럼프의 구호를 다 같이 외치는 것으로 연설이 끝났습니다.

■ "국민 50%가 극단주의자로 보이냐"…변치 않는 강성 지지

기자 옆에 앉았던 리처드 스토마지 씨는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유를 "인플레이션이 너무 심하고 경기가 엉망이다. 바이든은 경쟁력이 없고 워싱턴 정치는 부패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민주당은 트럼프를 지지하는 우리를 극단주의자로 부른다. 국민의 50%인 우리가 극단주의자로 보이느냐"고도 반문했습니다. 또 다른 주민 르네 카니 씨는 "나는 평화주의자다. 지금 정부는 납세자의 돈으로 우크라이나와 중동에서 살생을 저지르고 있다. 트럼프가 전쟁을 멈춰줄 거라고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트럼프의 연설은 수천 명을 웃고 울리며 환호를 받았지만, 언론에선 여러 지적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기소된 조지아주 풀턴 카운티의 검사장과 기소를 한 특검이 부적절한 관계로 논란이 된 걸 비난하며 외설적인 제스처를 취한 게 카메라에 찍혔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고령으로 계단조차 제대로 찾지 못한다며 이리저리 헤매는 바이든의 모습을 흉내 내 환호를 받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연설에서 바이든을 오바마라고 혼동해 말하기도 했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유세 중 “고령으로 계단도 제대로 못 찾는다”며 바이든 대통령을 흉내 내는 몸짓을 취하고 있다(위). 유세 현장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연설을 녹화하려는 지지자들(아래) (사진=AP)

하지만 수천 명이 연설장을 찾을 정도로 강성이 많은 트럼프를 향한 지지는 그런 몇 가지 실수로 흔들리지는 않을 게 명확해 보였습니다. 오히려 그런 지적을 하는 언론에 대한 불신이 높았습니다. 스토마지 씨는 인터뷰 도중 취재진에게 "나는 언론을 믿지 않는다. 당신도 마찬가지라고 장담할 수 있겠나"고 되물었고, 카니 씨 역시 "CNN에서 온 건 아니지요?"라는 질문을 잊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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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 기자 (mani@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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