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우리에게 미안하긴 할까?”[꼬다리]

입력 2024. 3. 5. 06:05 수정 2024. 3. 5.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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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벌새>에서 14세 소녀 은희(왼쪽)와 친구 지숙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벌새> 갈무리



“저는 부담 없이 태어난 둘째 딸이에요.”

최근 취재를 하면서 만난 1990년대생 여성이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위로 세 살 터울의 오빠가 있었다. 첫째가 오빠였기에 “부담 없이 태어날 수 있었다”는 씁쓸한 설명이었다. ‘K장녀’로 대표되는 여성들이 떠안은 차별을 떠올리면 이해가 됐다. 그러나 ‘K장녀’ 못지않게 감내해야 했던 그의 사연은 마음을 먹먹하게 했다.

그는 꽤 오랜 시간 오빠로부터 폭행을 당했다고 말했다. 폭력을 제어할 장치는 작동되지 않았다. 오롯이 혼자서 고통을 견뎌야 했다. 이 가정폭력의 의미를 명명하는 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일찍부터 장남에게 온 관심이 집중된 무게를 오빠도 견디지 못했을 터였다. 그럼에도 그는 이를 “젠더 폭력”이라고 규정했다. 장남의 타이틀과 나이 위계가 결합해 여성인 동생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가해졌기 때문이다. 아들에게 가해진 아빠의 폭행은, 오빠가 몸집이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중단됐다. 하지만 동생에 대한 오빠의 폭행은 성인이 돼서도 이어졌다.

영화 <벌새>에도 오빠에게 폭행당하는 14세 소녀 은희(박지후 분)가 있다. 은희의 오빠 대훈(손상연 분)은 집안의 유일한 아들로, 기대를 한 몸에 받는 부담감과 입시 스트레스를 동생을 향한 폭력으로 푼다. 은희가 남자친구가 있다는 이유로, 훈육을 위해서 등. 폭행당하면서 은희가 할 수 있는 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역시 오빠의 폭력성을 제어하는 이는 없다.

그의 친구 지숙(박서윤 분)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자살까지 생각했다는 은희의 고백에 지숙이 말한다. “다들 우리한테 미안하기는 할까?”

폭행만이 문제는 아니다. 세 자매 중 둘째인 데다 쌍둥이인 나는, 일찍이 주변 어른들의 무심한 말을 들어야 했다. “남자를 낳으려다가 쌍둥이가 나와 버렸군.” 폭력적이기까지 한 말이었다. 그럴 때면 나는 또 구태여 한 일화를 설명하곤 했다. ‘아들을 데리고 와야 한다’는 할머니의 말에 아빠가 ‘극대로’ 하고 끝내 반대했다는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까지 들려주면 그제야 어른들은 조금은 머쓱한 얼굴을 하고는 “아버지가 대단하네” 하는 반응을 보였다. 자신들의 발언에 대해선 사과하지 않았다.

‘딸이 대세’라는 요즘 같은 때 이제 무례한 말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딸 선호 이면에 돌봄 책임을 기대하는 마음을 떠올려보면 마냥 다행이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현재도 K장녀들은 ‘독박 돌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한다. 김민지 풀뿌리 여성주의 활동가는 “한국적 정서에서 자라난 딸들은 엄마와 정서적 교감을 나누면서 혹은 성별화된 사회의 역할을 수행하며 자연스럽게 돌봄을 본인의 몫으로 받아들인다”고도 꼬집었다.

‘이런 사회’에서 정부는 재정 지출 중심의 저출생 대책을 이야기한다. 그에 앞서 사회 내 왜곡된 성차별 인식부터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필요한 게 아닐까.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은 그제야 제 의미를 가질 것이다. ‘젠더 폭력’이라고 스스로 명명하는 데까지 고통스러웠을 여성을 위로하면서 동시에 어디선가 홀로 폭력을 견디고 있는 여성들에게 위로의 마음을 보낸다.

유선희 기자 y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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