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지옥같이 싸웠지만… 신뢰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 기자로 일하며 체득한 진리 중 하나는 ‘사람은 만나야 한다’는 거다. 비대면이 각광받는 세상이 됐지만 사회에 유의미한 영향을 준 기사, 위정자들의 아침을 깨운 특종은 대개 스크린 너머 소셜미디어 세상이 아닌 얼굴과 얼굴이 마주하는 만남에서 비롯됐다. 풀리지 않을 것 같았던 난제들도 현장으로 가서 누군가를 만나면 해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일개 언론인의 일이 이럴진대 국가의 대소사야 두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7선 상원의원으로 미국 의회 역사상 ‘최장수 원내 사령탑’ 기록을 세운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가 지난 28일 본인의 11월 퇴임 계획을 알렸다. 이 자체로도 놀라운 뉴스였지만 연설이 끝나자 동료 의원들이 다가와 포옹하고 등을 두들기는 모습이 더 인상 깊게 다가왔다. 거기에는 지난 8년 동안 매코널의 카운터파트로 볼꼴 못 볼꼴을 다본 척 슈머 민주당 원내대표도 있었다. 한때 민주당 소속이었던 무소속 커스틴 시네마 의원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야당 대표의 퇴임 소식에 백악관도 메시지를 냈다. 반세기 가까이 상원에서 함께 활동한 조 바이든 대통령은 워싱턴의 ‘저승사자’라 불린 매코널이 자신이 부통령으로 있던 오바마 행정부의 주요 어젠다를 번번이 좌초시키는 걸 온몸으로 겪었다. 정권이 밀던 대법관 후보자를 끝내 인준해주지 않아 오늘날 바이든에 신발 속 돌멩이가 된 보수 우위의 연방대법원을 만든 사람이 매코널이다. 여의도 문법으로보면 상종도 못 할 사람이지만 오랜 동료에게 전한 말은 이랬다. “소아마비를 극복하고 ‘아메리칸 드림’을 살아낸 나의 자랑스러운 친구여. 우리의 정치적 입장이 달라 때론 지옥같이 싸웠지만 서로를 신뢰했다. 항상 모든 걸 터놓고 얘기할 수 있어서 좋았다.”
당파 정치가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미국이지만 얼굴을 붉히고 빈손으로 끝날지라도 일단 만나는 경우가 많다. 지난 27일에도 바이든이 여야 지도부를 백악관으로 불렀다. 친(親)트럼프 성향인 공화당의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은 역시나 우크라이나 지원에 반대하며 열을 냈다. 동석한 인사가 “백악관에서 경험한 미팅 중 가장 격렬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래도 바이든은 존슨과의 일대일 면담에 응했고 이런 바탕 위에서 양당이 이틀 뒤 임시 타협안 처리에 이르렀다.
2024년의 한국 정치에선 좀처럼 스킨십을 보기 힘들다. 대통령은 취임 3년 차가 되도록 야당 대표와 만나지 않고 있고, 여야 의원들이 국회 목욕탕에서 만나 국사(國事)를 논하고 진짜 협상을 했다는 이야기는 도시 전설처럼 돼버렸다. 일본 국회와의 친선 축구경기에서 여야가 한 팀으로 뭉쳐 잘 싸워놓고도 강성 지지자들이 무서워 소셜미디어에 사진도 못 올리는 시대. 진짜로 일을 하겠다면 눈치는 그만 보고 더 많이 만나 지지고 볶아야 한다. 정치도 국정도 일단 거기서부터가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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