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대 88, 쪼개진 노동시장을 바꿔야 한다

특별취재팀 2024. 3. 5.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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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재단-조선일보
창간 104주년 공동기획
’12대88의 사회를 넘자’ [1]
지난달 28일 울산 HD현대중공업 조선소에서 원청인 이 회사 직원들과 하청인 협력업체 직원들이 모여 “안전, 좋아, 좋아, 좋아!”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매일 조선소에서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안전하게 작업하자는 다짐을 담은 의식 같은 절차다. 조선업은 원·하청 간 격차로 갈등이 큰 산업으로 꼽혀 왔다. 하지만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조선업계 원·하청과 정부와 지자체 등이 모여 상생을 위한 실험을 시작했다. /김동환 기자

지난 2022년 여름, 경남 거제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옥포조선소에서는 배를 만드는 핵심 작업장인 독(dock) 한 곳이 51일간 점거되는 사건이 있었다. 민노총 소속 조선 하청 업체(협력사) 노조 파업으로 인한 일이었다. 한 노조원은 아예 가로·세로·높이 1m 크기의 좁은 철제 구조물 안에 들어간 뒤 용접해 출구를 막아버린 이른바 ‘옥쇄 파업’을 했다. 대우조선 측은 경제적 피해가 수천억 원이라고 주장했고, 경찰청장이 헬기로 조선소 주변을 둘러보는 등 공권력 투입 직전에 협상이 타결됐다.

이 사건 이후 정부 조사로 밝혀진 사실은 국민들을 한 번 더 놀라게 했다. 조선업 하청 직원들은 연봉이 대기업 원청 근로자의 50~70% 수준이고, 원청이 기피하는 더 위험한 업무를 도맡는 일이 많았다. 전체 임금 근로자 중 12%인 대기업 정규직(260만명)과 중소기업 및 비정규직 근로자 등 나머지(1936만명) 88%로 쪼개진 한국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민낯 중 하나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 후 국내 조선소에서는 원·하청 격차를 줄이려는 실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대기업 조선사와 협력 업체, 정부·지자체 등이 2023년 2월 함께 마련한 상생 협약이 하나둘 가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픽=박상훈

HD현대중공업은 이번 달부터 협력사 직원들 월급을 별도의 전용 계좌로 입금하는 방식을 도입한다. 이 계좌는 월급 지급같이 사전에 정해진 용도로만 출금할 수 있다. 임금 체불 등을 예방하는 게 목적이다. 협력사들 몫의 성과급도 늘렸다. 호텔 등 휴양 시설을 협력 업체 직원들도 이용할 수 있게 복지도 확대했다. 지난 2월엔 협력사 직원의 기술 수준을 높이기 위한 교육 시설도 문을 열었다. 협력사의 실질 임금을 늘리고, 복지를 확충하고, 생산성을 키우는 ‘3개의 화살’인 셈이다.

현장에서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조선업의 고질적 문제를 파악하고 고치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반응이 많다. 특히 자동차, 석유화학, 항공 우주 산업, 식품 등 다른 산업에서도 원·하청의 격차를 줄이려는 시도가 이어지면서 조선업계의 첫 실험이 어떤 성과를 낼지 각계가 주목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노동 시장에서는 높은 임금을 받으면서 다양한 복지 등으로 겹겹이 보호받는 대기업 정규직 12%와 낮은 임금에 사회적 안전망도 부족한 나머지 중소기업, 비정규직 88% 간 이중구조가 굳어지고 있다. 88%가 낮은 임금과 고용 불안, 불투명한 미래로 고민하는 상황은 고스란히 저출산, 노인 빈곤, 청년들의 취업 포기 등 여러 사회 문제로 이어지는 중이다.

모두가 대기업에서 일할 수 없고 비정규직을 ‘제로(0)’로 만드는 것도 불가능하다. 다만 지금의 이중구조를 조금씩 개선해 나간다면 현재 어려움을 겪거나 미래를 설계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을 수 있다. 변화를 만드는 것은 강력한 투쟁도, 시장 논리도, 자본가나 정부만의 몫도 아니다. 거제 조선소에서 시작된 변화처럼 주요 이해관계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 낸 다양한 상생 시도가 사회를 바꿔나가는 계기가 된다. 본지 역시 지난 2011년 ‘자본주의 4.0′ 기획 연재를 통해 시장에 모든 걸 맡기는 신자유주의가 만든 한계를 극복하는 시도를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전태일재단과 함께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넘어서기 위한 상생 방안을 모색한다.

〈특별취재팀〉

▷팀장=정한국 산업부 차장대우

조유미·김윤주 사회정책부 기자

김민기 스포츠부 기자

한예나 경제부 기자, 양승수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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