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기금 3.2조원 중 절반 ‘딴 곳’에 쓴다
올해 3조원 넘게 거두는 전력산업기반기금(전력기금) 중 절반가량인 1조5000억원이 애초 기금 사용 목적과 다른 용도로 쓰이는 것으로 확인됐다. 해마다 전기 사용량이 늘고 전기 요금까지 올라 전력기금이 급격히 불어난 가운데, 취약 계층 지원 같은 ‘전력 공익사업’에 쓰겠다는 애초 취지와 맞지 않게 전용(轉用)되는 액수도 급증했다. 국가재정법은 전력기금 같은 각종 기금의 여유 재원을 전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지만, ‘목적 수행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범위’라는 모호한 문구에 기대 연간 수입의 절반을 빼가는 것은 지나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력기금은 2022년 2조3766억원, 지난해 3조83억원에 이어 올해는 3조2028억원이 걷힐 전망이다. 전기 요금에 3.7%씩 붙여 거두는 전력기금은 2001년 전력 산업 구조 개편 추진 과정에서 탄생한 ‘준조세’다. 전력 시장에 경쟁이 도입되면 공기업 한국전력이 맡아오던 전력 산업 연구·개발(R&D), 전기 안전, 취약 계층에 대한 전기 공급 등 공익사업이 중단될 것을 우려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전력 시장 구조 개편이 중단됐음에도 전력기금 제도가 유지되자 ‘주머닛돈이 쌈짓돈’처럼 쓰이는 것이 문제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3년간 4조원이 ‘에너지 특별회계’로 넘어가
4일 본지가 올해 정부 예산안을 분석한 결과, 올해 전력기금 중 1조3074억원은 ‘에너지 및 자원 사업 특별회계(에너지 특별회계)’, 2000억원은 ‘기후환경기금’으로 전출된다. 올해 거둘 3조2028억원의 47%가 법령으로 규정된 사용 용도와 다른 곳에 쓰이는 것이다.
전기차 보급 확대로 보조금 지급액이 폭증해 에너지 특별회계 적자가 심해지자 2022년부터 이를 보전하기 위해 전력기금이 투입되고 있다. 전력기금은 방사성폐기물관리기금, 산업재해보상보험기금 등과 달리 여유 재원을 다른 예산으로 넘길 수 있기 때문이다. 2022년 1조3118억원을 시작으로 올해까지 3년간 에너지 특별회계로 전출된 금액만 4조원에 이른다. 같은 기간 기후환경기금으로도 6000억원이 사용됐다.
올해 총 6조4712억원에 이르는 에너지 특별회계 예산 중 자체 수입은 42%인 2조6948억원에 그친다. 나머지는 전력기금과 정부 비상금으로 불리는 공공자금관리기금(공자기금)이 채운다. 에너지 특별회계는 올해 2조3000억원 이상을 무공해차 보급에 지출함에 따라 전력기금 중 상당액은 전기차 보조금으로 쓰일 전망이다. 올해 에너지 특별회계로 넘어간 기금은 전기차 보조금 외에도 광해광업공단 출자(2517억원), 폐광 대책비(2236억원), 어린이 통학 차량 LPG(액화석유가스) 차량 전환 지원(33억원) 등 전력 산업과 동떨어진 분야에 쓰인다.
◇”소비자 부담 줄이는 전력기금 개편 고민해야”
지난해 남은 잔액을 더해 올해 2조원가량 지출하는 전력기금 사업에서도 신재생에너지 금융 지원(3693억원), 신재생에너지 핵심 기술 개발(3217억원), 신재생에너지 보급 지원(1675억원) 등 신재생에너지 비율이 지나치게 높다는 지적도 있다. 원전 생태계 금융 지원(1000억원), 혁신형 소형모듈원전 개발(333억원) 등 원전 산업을 비롯해 전력 효율 향상(1634억원), 노후 변압기 교체(27억원) 등 전력기금 취지에 맞는 지출과 비교할 때 신재생 분야에 쏠림 현상이 과하다는 것이다. 설립 때부터 논란이 컸던 한전공대(한국에너지공과대) 지원에도 예산 심의 과정에서 33억원이 늘어나 올해 200억원의 전력기금이 투입된다.
전문가들은 “애초 전력기금이 만들어진 2001년과 지금의 전력 사정이 크게 달라진 만큼 준조세처럼 걷는 기금의 폐지도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손양훈 인천대 교수는 “기금이 자꾸 쌓여가니 돈을 쓸 곳을 계속 추가하고, 에너지 특별회계로 넘겨 여기저기 가져다 쓰는 상황”이라며 “전력기금이 취지와는 달리 온갖 용도로 엉뚱하게 쓰이고 있다”고 말했다.
소비자 부담을 줄이기 위해 현행 3.7%인 요율을 낮추거나 징수 기준을 바꾸는 개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정연제 서울과기대 교수는 “해외에선 어떤 사업에 쓸지를 정하고 그에 맞춰 해마다 요율을 정하는 게 일반적”이라며 “전기 요금 인상에 따른 추가 부담을 막기 위해 전기 사용량을 기준으로 기금 징수액을 정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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