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대본-감독 다 쓸어간다”… 넷플릭스에 울상짓는 콘텐츠업계[인사이드&인사이트]
양질의 대본 및 창작 인력진 과점… 거대한 자본력으로 IP 독식 구조
‘셀프 등급 분류’로 논란 피해… 선정적-폭력성 높은 프로그램 양산
법인세, 매출액 대비 0.4% 그쳐… “프랑스 홀드백처럼 규제 늘려야”
《 “제작비가 너무 많이 올라 충무로에선 저예산 영화를 만들 수가 없다.”(영화감독 A 씨)
“좋은 대본을 넷플릭스 등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가 다 쓸어가 버렸다. 국내 방송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 이야기는 씨가 말랐다.”(영화 제작사 대표 B 씨)
최근 콘텐츠업계에서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 등 대형 글로벌 OTT가 한국 콘텐츠 생태계를 교란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글로벌 OTT 때문에 한국 콘텐츠가 세계에 알려진 뒷면엔 콘텐츠업계가 겪는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특히 글로벌 OTT가 거대한 자본력으로 제작비 상승을 부추기고 있다는 평가다. 국내 방송계와 영화계에선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OTT와 불공정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 배우 몸값 상승에 제작비 인플레이션
‘경성크리처’, ‘무빙’, ‘스위트홈’…. 최근 콘텐츠업계에서는 수백억 원의 제작비가 투자된 작품들로 그야말로 혈투가 벌어지고 있다. 제작비가 해마다 천정부지로 올라 ‘1000억 원짜리 작품’ 탄생이 목전에 있다는 우려 섞인 관측이 나온다.
제작비가 한계를 모르고 치솟는 가장 큰 요인은 배우들의 출연료다. 최근 배우 이정재가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시즌2에 출연하면서 회당 10억 원을 받았다는 보도가 나오며 화제가 됐다. 한국 드라마계에선 전무후무한 출연료라 업계가 술렁였다. 배우 김수현, 박형식, 박보검 등도 회당 5억 원 수준의 출연료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부작 드라마라면 주연 배우 1명의 출연료로만 50억 원이 투입된다.
한국 콘텐츠의 세계적 영향력을 감안해도 출연료는 높은 수준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2022년 기준 미국의 콘텐츠 시장 규모는 1조573억 달러(약 1406조9491억 원)였다. 한국은 753억 달러(약 100조2017억 원)로 규모가 14배가량 차이 난다. 반면 배우 출연료 차이는 크지 않다. 2022년 할리우드에서 가장 많은 출연료를 받은 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HBO 시리즈 ‘동조자’에 출연하며 회당 200만 달러(약 26억 원)를 받았다. 그 뒤는 배우 크리스 프랫으로, 아마존프라임 드라마 ‘터미널리스트’에서 회당 140만 달러(약 18억 원)를 받았다. 여타 제반 제작비가 한국보다 훨씬 많이 들어가는 할리우드의 제작 환경을 고려하더라도 한국 배우들 몸값이 결코 낮은 수준이라고 할 수 없다.
배우 몸값 인플레이션의 시작에는 글로벌 OTT가 있다. “전 세계에 공개된다”는 명목으로 톱배우들이 출연료를 높게 부르기 시작했다. 세계적으로 통할 만한 소위 ‘A리스트’ 톱배우가 한국에 많지도 않거니와, 수백억 원이 들어가는 고위험 투자라는 점에서 흥행을 위해 톱스타를 캐스팅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넷플릭스가 톱배우들 출연료 요구를 맞춰주다 보니 다른 제작사들 역시 이에 맞춰 출연료를 올릴 수밖에 없다.
출연료가 높아지다 보니 자연스레 다른 분야에서 허리띠를 졸라매게 된다.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에 따르면 지난해 단역 배우 출연료는 여전히 최저임금 수준에 머물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공개한 ‘2023 방송프로그램 외주제작 거래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제작사와 방송사 모두 ‘단가 하향 조정이 필요한 항목’에 압도적으로 ‘출연료’라고 답했다. 제작사들은 “제작비의 대부분이 출연료로 나가 수익이 거의 남지 않거나 이전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토로하고 있다.
결국 자금력을 갖춘 글로벌 OTT가 좋은 작품을 과점하는 구조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은 원천 지식재산권(IP)을 확보하지 못한 채 넷플릭스의 외주제작 국가가 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넷플릭스가 제작비를 100% 대고 IP를 모두 가져가는 방식인 ‘오리지널 콘텐츠’가 많아지면서 결국 한국 제작사는 돈을 벌기 힘든 구조가 된다는 것. 한 투자·제작사 관계자는 “현재 콘텐츠 시장 내 모든 좋은 시나리오는 자금력 있는 넷플릭스에 먼저 제안이 간다. 넷플릭스가 콘텐츠를 선점하다 보니 한국 제작사들은 점점 외주 업체화되고 있다. 점점 (체급 차이가 나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같은 모양새”라고 했다.
● 더 잔인하고 더 자극적으로
지난해 6월부터 OTT가 자체적으로 등급 분류를 할 수 있게 되면서 선정적인 콘텐츠가 더 많이 양산될 거란 우려가 나온다. 국민의힘 김성수 의원실이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받은 ‘OTT 영상 등급분류 현황’에 따르면 자체등급분류 도입 이전(2023년 1∼5월 기준) 넷플릭스의 청소년관람불가 콘텐츠는 32.7%였으나 시행 이후(2023년 6월∼9월 12일 기준) 18%로 급감했다.
글로벌 OTT가 국내 통신업계에 비용을 전가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현재 엘지유플러스 등 국내 인터넷서비스사업자(ISP)는 넷플릭스 요금제를 운영하고 있다. 인터넷 요금과 넷플릭스 요금제를 결합해 총요금을 할인해주는 식이다. 하지만 이 요금 할인의 대부분은 ISP가 부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ISP 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12월 넷플릭스는 베이직 요금제(월 9500원) 신규 가입을 중단했다. 광고 없이 보기 위해선 스탠다드 요금제(월 1만3500원)를 구독해야 한다. 사실상 구독료가 월 4000원 인상된 셈”이라며 “최근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통신비 인하 정책 때문에 ISP의 넷플릭스 요금제는 가격을 인상하기 쉽지 않다. 결국 월 4000원씩 ISP가 추가로 손해를 보는 구조가 벌어질 것”이라고 했다.
● “홀드백, 토종 OTT 지원해야”
콘텐츠업계에선 방송사와 OTT를 구분해 적용하는 규제 방식 때문에 선정성이 높은 글로벌 OTT가 급성장했다는 평가가 제기된다. 이 때문에 이젠 플랫폼 규제를 일원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방송 산업을 어떤 망으로 전송하느냐(전송 방식), TV로 보느냐 스마트폰으로 보느냐(콘텐츠 소비 기기)로 분류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에 이른바 ‘통합 방송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글로벌 OTT에 대한 정부의 규제를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거대 정보기술(IT) 기업이기도 한 글로벌 OTT에 책무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는 자국의 영화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유럽연합(EU) 최초로 ‘홀드백’을 법제화했다. 홀드백은 영화가 극장에서 개봉한 뒤 OTT 플랫폼으로 가기까지의 기간을 법으로 정해놓은 제도다. 극장 개봉 영화가 곧바로 OTT에 직행해 극장 관람객이 줄어드는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다. 당초 36개월이던 홀드백 기간을 15개월로 당기는 대신 넷플릭스가 3년간 연매출의 4%(최소액 4000만 유로)를 10편 이상 영화에 투자하도록 협상했다. 영화진흥위원회 관계자는 “팬데믹 이후 한국 영화계에 어려움이 큰 것은 사실이고 홀드백 필요성도 일정 부분 공감하고 있다”며 “영화계와 OTT 업계의 공생을 위해 의견을 조율하고 있다”고 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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