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다가 울컥… ‘글 쓰는 요리사’ 박찬일의 결핍과 청승

이유진 기자 2024. 3. 4.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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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의 천칭자리]차마 삼키기 힘든 오래된 이야기 묶은 산문집 <밥 먹다가, 울컥> 펴낸 박찬일 셰프
신간 <밥 먹다가, 울컥>을 펴낸 글 쓰는 요리사 박찬일 셰프. 돌아가신 아버지부터 옛날 스치듯 만난 식당 주인까지 그리운 사람과 그리운 음식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를 담은 산문집이다.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먹는 이야기인 줄 알았더니 못 먹는 이야기였다. 음식 이야기인 줄 알았더니 허기와 결핍 이야기였다. ‘글 쓰는 요리사’ 박찬일의 신간 <밥 먹다가, 울컥>(웅진지식하우스 펴냄) 말이다. 돌아가신 아버지부터 옛날 스치듯 만난 식당 주인까지 그리운 사람과 그리운 음식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를 담은 산문집이다. 책 읽다가 울컥, 해서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로 초청해 좀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찍는 동안 박찬일은 허리에 손을 얹었다. 한국 평균 주방에 맞지 않는 키 큰 요리사, 구부정하게 앉아서 글 쓰는 작가로서 허리 병은 운명일 테다. 2024년 2월26일 오후였다.

결핍이 낳은 시큰거리는 이야기

책은 시사주간지 <시사인(IN)>에 연재한 글을 모은 것이다. 출간과 동시에 에세이 부문 10위권, 종합 베스트셀러 100위권에 안착했다. 하지만 “책 시장이 죽어서 한 오천 부 팔아봤자 진짜 얼마 안 된다”며 박 셰프는 음식점에서 단가 계산하듯 숫자를 술술 늘어놓았다. 책 안에는 청승이 줄줄 흘렀는데 만나보니 장사 좀 해본 사람의 ‘간지’가 철철 흘렀다. 이윤 행위에 대한 고민과 노동으로 갈고닦은 생활인이기에 녹진하게 삶이 밴 진짜배기 글이 나오나보다. 인터뷰실 탁자 위에 놓인 신문을 읽으며 그는 한숨을 쉬었다. 음식 장사나 종이 장사나, 먹고사니즘이나 읽고사니즘이나, 양쪽으로 힘겨운 시대다.

—책이 온통 결핍에 대한 이야기더라. “맞다. 맛있는 음식 이야기는 하나도 안 나오는 것 같은데. 어머니 아버지가 경북 영주 태생이다. 결혼 뒤 서울로 와서 서부와 동부 쪽으로 떠돌았다. 우리가 어릴 땐 궁핍, 결핍을 누구나 다 겪었지만 우리 집은 급격하게 가난해졌다. 영세민 보호제도라는 게 있었는데 제대로 작동도 안 했고, 어머니가 자존심이 강해서 신청도 안 했던 거다.”

—온 식구가 며칠을 통으로 굶었다는 일화가 책에도 나온다. 며칠 굶고 아버지가 어디서 가져온 라면을 끓여 먹은 뒤 배탈이 났다고. “막무가내로 굶는 일이 많지는 않았는데 결정적으로 ‘라면 사태’가 왔다. 이번 책을 엄마가 보더니 ‘그때는 상당히 힘들었다’고 하더라. 라면을 어떻게 구해온 게 아버지인 줄 알았더니 엄마가 구한 거더라. 해가 뜨고 지는 단칸방에서 온 가족이 이불을 덮고 누워서 잤다. 자야 배가 안 고프니까. 내가 눈이 확 뒤집혀서, 애가 죽을 것 같으니까, 엄마가 어디선가 구해온 라면을 먹게 됐다.”

—그때 먹은 라면이 ‘롯데라면’이라는 것도 용케 기억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던 것 같다. 덕용 라면 두 봉지, 열 개를 끓여서 여섯 식구가 김치도 없이 먹었던 것 같다. 그때 장과 위를 다쳤다. 원래 사흘을 굶으면 보식하는 과정이 있는데 그건 지금 알게 된 거지, 뭘 알았겠나. 그냥 먹었다. 다들 무지했으니까. 성인이 돼서도 주로 아랫배가 아픈 거 보면 장에 상처를 입은 것 같다. 기름에 절어 냄새나는 라면이었다. 보관 상태가 나쁘고 오래된 라면이었을 거다.”

대전 노포 진로집의 두부 두루치기. 박찬일의 아버지는 부엌에서 내복 차림에 등을 구부린 채 아들을 먹이겠다는 일념으로 간장, 마늘을 넣어 두부를 조렸다. “늙은 아버지의 등을 함부로 보지 마시라. 슬픈 그림을 영원히 당신에게 남기는 일이다”라고 그는 적었다. 사진 이유진 기자

박찬일은 그때의 기억을 “덮고 있는 이불에서 나는 고유의 냄새도 밥 푸는 냄새 같았다”고 적었다. 책에는 퇴거 통보를 받고도 집을 비우지 않자, 집주인이 용역을 불러 벽을 허물었던 어린 시절 일화도 나온다. 시멘트 가루가 섞여 들어간 식은 밥을 목구멍으로 넘기는데 뚫린 벽으로 동네 아이들과 눈이 마주쳤다는 이야기는 슬프다 못해 충격일 지경이다. 박 셰프의 아버지는 이재에 밝지 못하고 야무지지 못해서 가족에게 돈을 잘 갖다주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가 부엌에서 보풀이 인 내복 차림에 등을 구부린 채 아들을 먹이겠다는 일념으로 간장, 마늘을 넣어 두부를 조렸다. “늙은 아버지의 등을 함부로 보지 마시라. 슬픈 그림을 영원히 당신에게 남기는 일이다.” 이런 문장은 약간 소설가 김훈 풍이지만 ‘가부장의 위악’ 같은 느낌이 아니라 묘하다. 이번 산문집에는 남자들끼리 나눠 먹은 음식과 우정에 관한 이야기가 다수 포함됐는데 ‘그 시절 희생했던 여자들’에 관한 미안함도 감추지 않는다.

짜장면에 소주는 꽤 잘 맞는다는 게 박찬일의 지론이다. 여럿이 앉은 자리에서 안주로 주문하면 숟가락으로 잘게 잘라서 술안주로 곁들인다. 짜장면 안주로 술을 마시던 한 친구는 지금 세상에 없다. “짜장면을 안주로 술을 마시면 녀석이 생각난다”고 했다. 박찬일 제공

청승과 결핍 사이, 목에 ‘걸리는’ 음식

—책 전반에 청승이 가득하다. “서문에도 썼지만, 나는 옛날만 사는 것 같다. 나이도 먹고 늙어가는데 옛날 기억에 자꾸 매몰되고 더 또렷해지고 자꾸 그런 게 더 보고 싶고 확인하고 싶고. 얼마 전에는 옛날 살던 동네 여기저기를 막 가봤다. 가봤자 없다. 다 재개발돼서 아파트가 들어섰으니까. 시내에 가서도 옛날에 아버지를 만나러 가서 헤어지던 공간, 그런 걸 자꾸 보게 된다.”

—아버지 하면 기억나는 음식이 있나. “얼마 전에 없어져서 사람들이 아쉬워했던 ‘서대문 통술집’이 있다. 유명한 노포인데 어릴 때 거기서 아버지한테 갈비 얻어먹고 다 토했다. 연탄가스 때문에. 예를 들면 ‘한일관’ 같은 데 가면 숯을 피웠지만 웬만한 데서는 다 연탄으로 고기를 구웠다. 기름은 파동 나고 그래서 되게 비쌌다. 급하게 막 불을 피우는데 생연탄이 한 열 군데에서 타고 있으니 가스 배기가 잘되겠나. 그걸 마시고 다 토한 거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얘기다.”

옛이야기를 하나 해보자. 그의 할머니는 인생 어느 시점부터 닭고기를 못 먹게 됐다. 부잣집 딸이었지만 가난한 집안에 시집와서 거친 밥과 찬에 힘들어하다 임신했다. 아궁이 앞에서 불을 때고 있을 때 우연히 중병아리 한 마리가 부엌으로 들어왔는데, 외할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작대기로 몰아 아궁이 불구덩이로 밀어 넣다시피 했다고 한다. 누가 볼까봐 급히 그을린 병아리 털을 훑었으나 익지 않았고, 그 붉은 생살을 보며 “죄책감이랄까, 비위가 상하는 부끄러운 반추랄까, 그런 것 때문에” 그 뒤 닭고기를 멀리했다는 얘기다.

—외할머니가 섬세한 분이었나보다. “굉장히 예민한 사람인데 그래도 대범하고. 외삼촌 둘이 사회운동을 했다. 엄청난 고초를 겪고 외할머니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을 거다. 그 병아리 이야기도 최근에 어머니한테 들었다.”

—음식에 대한 기억이 생생한데. “결핍 때문에 그렇다. 되게 선명하게 그려진다. 친구 집에 갔는데 명란젓이라는 게 있더라. 까만 김과. 그때는 김 양식이 활발하지 않아서 김이 비쌌다. 보관 능력이 떨어지니까 겨울 한 철만 나오고 진짜 김이 귀했다. 친구 엄마가 하얀 일반미로 쌀밥을 지어서 명란젓과 햄을 줬다. ‘롯데 살로만 햄’이 나온 뒤다. 롯데가 돼지고기 부산물로 본격적인 일본식 기술을 가져와 만든― 진주햄처럼 어육으로 만든 게 아니라― 햄이었다. 그런 거에 충격을 받았다. 그런 음식 결핍은 선명할 수밖에 없다. 각인돼서 잊어먹을 수 없다.”

—결핍이 있다고 모두 그렇게 되는 건 아니다. “그건 반추하지 않기 때문이다. 난 자꾸 반추하는 이상한 성격이 있다. 그때 먹었던 음식, 그때 상황, 그 음식의 디테일을 반추하면서 복습하니까 더 선명해진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 집이 야반도주할 때 들통과 ‘바케스’(양동이)에 짐을 대충 때려 넣고 어디론가 가는데 저녁을 못 먹었다. 어느 포장마차에 엄마와 들어갔고 젊은 청년이 국수를 말아주는데 그 사람 헤어스타일도 생각난다. 엄마는 돈이 없어서 안 먹고 나만 한 그릇 줬다. 퉁퉁 불은 국수에 고춧가루, 깨소금, 김가루, 쑥갓 이런 것 넣어서. 미원도 넣었겠다. 그땐 이미 미원이 싸진 시점이었으니까. 그 국수의 맛을 잊을 수 없는 거다.”

그는 그날의 포장마차 국수를 말하면서 중면, 소면의 문화사를 읊었다. 소면은 ‘흴 소’(素) 자를 쓰니까 엄밀히 말하면 얇은 국수를 소면이라 일컫는 것은 틀린 말이고, 그렇다면 국수는 모두 소면이며, 옛날에는 쉽게 부러져버리는 ‘가는 국수’가 없었다는 식이다. 제주도에서 고기국수에 왜 중면을 쓰느냐면 그것은 음식 문화가 보수적이기 때문이고, 얇은 국수인 ‘세면’을 먹을 수 있게 된 요즘도 먹지 않는다는 유장한 국수사 강의였다.

“나한테 안 엄격하다. 얼마나 스스로 관대하냐면 술 석 잔째 먹을 때부터 관대해지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일곱 잔으로 바뀌고.” 박찬일은 스스로에게 엄격하지 않다고 말했다. 웃자고 하는 얘기 같았다.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DJ 집에서 밥 먹고 요리사 된 사연

—여전히 셰프라는 호칭이 어색하고 주방장이라는 말을 더 선호하는 편인가. “요즘 ‘주방장’이란 말을 안 쓰니 더 쓰고 싶다. 이탈리아에서 셰프라는 사람들과 일하면서 그런 호칭을 너무나 익숙하게 했지만, 그때는 정말 ‘대장’만 셰프였다. 셰프는 ‘치프’, 곧 최고 담당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요즘은 셰프라는 말도 자연스럽다.”

—‘요리사’는 일본 표현이니 ‘조리사’라고 쓰는 것이 옳다는 독자 지적도 나온다. “‘료’(料) 자는 ‘말 두’(斗) 자에 ‘쌀 미’(米) 자를 합한 거다. 딱 아귀에 맞게 계산하고 정리하는 거에 ‘료’ 자를 쓴다. 중국에서 ‘료’ 자가 탄생했지만 ‘요리’는 일본에서 ‘쿠킹’이란 의미로 규정된 듯하다. 요리나 조리나 일본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무슨 차이가 있겠나. ‘조리’라는 말은 공공 영역에서 쓰일 뿐 일상 언어가 아니다. 요리사, 좋다. 조리사, 어색하다. 셰프, 자연스럽다.”

—본인에게도 엄격한 스타일 같다. “나한테 안 엄격하다. 얼마나 스스로 관대하냐면 술 석 잔째 먹을 때부터 관대해지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일곱 잔으로 바뀌고.”(웃음)

—사람이 응당 그래야 하지 않나. 그런데 애초 기자를 하다가 요리사가 되었다. 디제이(DJ·김대중)의 집에 간 것도 업을 바꾼 계기가 됐다고 들었다. “1997년 대선을 치른 날 저녁에 당선이 확정됐을 때 DJ 집에서 밥을 먹었다. 다른 기자들은 모두 (경기 고양시) 일산 자택 밖에 진을 치고 있고 나는 어쩌다 집 안까지 들어왔지만, 거실에 가만히 앉아 밥 주면 밥 먹고, 간식 주면 간식 먹고, 과일 먹고, 계속 주는 것을 먹고 있었다. 된장찌개에 밥을 너무 맛있게 먹었는데 밥이 계속 나왔다. 계속 누군가 오니까. 어중이떠중이가 다 와 있는 자리였다. 내 손에는 카메라도 있었고, 얼떨결에 들어와서 질문만 던지면 되는 거였는데 2층으로 올라가는 DJ의 그 퀭한 눈빛을 보고 말았다. 비서가 뭔가를 보고하자 ‘그래 알았어 알았어’ 그러고 올라가는데 말을 못 붙이겠고 사진도 못 찍겠더라. 사선을 넘어온 눈빛이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다. 그때 질문을 못 던진 게 기자를 그만둔 하나의 계기는 된 거 같다.”

요리하는 사람에 관한 마음

파출부, 일본말로 ‘아라이’, 이모, 찬모, 아줌마, 엄마로 일컫는, 주방보조원으로 일하는 어느 아주머니와 박 셰프는 오래 같이 일했다. 직원으로 4대 보험을 들어주고 ‘총무’라고 호칭 적은 명함 하나 파서 만들어주니 정색하고 고마워했다. 아줌마, 이모 같은 호칭은 정겹지만, 직장에서는 혜택이나 예의에서 제외되기 쉽다고 박찬일은 썼다. “우리가 엄마나 누나에게 그토록 못되게 굴었던 것처럼.”

—아직도 연락하는 주방 보조원 아주머니가 있다고 했다. “어디 힘들 때마다 연락하면 내가 (해법이나 정보를) 알려드리는 것 정도다. 나는 항상 그 정도로 양심의 가책을 ‘퉁치는’ 걸로 한다. <한겨레21> <한겨레> 보고 <경향신문> 보고 <시사IN> 보면서 양심의 가책을 퉁치는 것처럼.”(언급된 매체들은 대체로 그가 연재하는 곳이다.)

—책에서도 요리 노동자의 노동자성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내가 요리 노동자의 폐암 문제를 언론에 칼럼으로 처음 제기한 사람으로 알고 있다. 그건 자부심을 가진다. 나 때문만은 아니지만 주의를 환기하는 데 도움되지 않았을까. 식당 노동자의 폐암 문제가 심각하다. 당연히 산업재해로 인정받아야 하는데 당연히 거절된다. 칼럼을 쓰고 몇 년 뒤 한 급식노동자가 처음으로 산재 인정을 받았다. 노동계와 의학계의 노력으로 2021년부터 2023년 10월까지 총 113명의 학교급식 종사자가 폐암 산재 인정을 받았다. 튀김, 볶음 등 조리 과정에서 나오는 유해물질은 노동자의 폐를 공격한다. 노동자 끼임 사고가 재발하는 기업에서도 강연 요청이 왔지만 가지 않았다. 차마 못 가겠더라.”

—측은지심을 잘 느끼는가보다. 책에도 옛날에 한국 와서 고생한 화인(외국에 영구 정착한 중국인), 중국동포 이야기가 많더라. “입학 성적은 좋았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 삐딱선 타고 당구장 가고 술 먹고 다녔다. 그때 만난 친구가 이번 책 짜장면 편에 나오는 이다. 나는 타고나기를 아웃사이더였다. 굶고,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분노를 어렸을 때도 어렴풋이 느꼈다. 태어나기도 그런 것 같고 가난하게 자라면서 분노가 키워지지 않았나 싶다. 전태일이 왜 그렇게 노동운동을 했겠나. 여공 등을 착취하는 구조를 보면서 연민이 싹트게 되는 거다. 나도 그런 사람들에게 좀더 연민을 잘한다. 식당 요리사가 되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이주민이 우리 사회 최하층 노동을 떠받친다. 형틀 목수, 비계공, 축사 돼지 똥 치우는 일 같은 것도 모두.”

성게알 작업은 심한 노동이다. 가운데를 갈라 성게 몸통에서 알을 조심스레 찻숟가락 같은 도구로 퍼낸다. 박찬일은 “작업장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해녀가 작업하는 모습을 보고 나면 그 보드랍고 고운 성게가 목에 걸린다”고 했다. 사진 박찬일 제공

음식의 위기, 사라지는 것들

박 셰프는 ‘셰프 시대’가 끝난 것 같다고 했다. 방송과 대중은 새로운 것을 찾고, 실제 세계보다 화려하게 요리의 세계가 표현되고, 집중 조명을 받고, 예능이나 드라마 등에서 한꺼번에 관심을 받다보니 “기 빨린 느낌”이라고 했다. 그런데 정작 ‘케이(K)푸드’의 시대는 이제 막 열렸다.

—‘K푸드’가 요즘 유행인데. “한식이 가진 내용, 힘, 고유성, 능력, 가치 이런 것에 견줘 너무 안 알려져서 지금 좀 알려지는 단계인 거다. 한국 음식이 중국 음식 등에도 영향을 끼치고, 삼겹살이나 고기구이 등 한국의 먹는 방식을 전파하는 것이 흥미롭다. 문재인-김정은 남북회담 때나 북-미 회담 역할도 컸고 한국 드라마와 영화가 터지고 여기에 한국 음식이 편승하면서 대박이 났다. 이명박 정권 시절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의 한식 세계화 사업은 돈을 들였지만 효과가 없었는데 이제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으로 자발성이 담보되니까 성장하는 거다. 여기에 국수주의를 개입해 논점을 흐리지 말았으면 한다. 모차렐라치즈를 넣으면 한식이 아니라고 하는 것처럼. 중국에서 파오차이(泡菜)를 두고 김치라고 하거나, 일본에서 ‘기무치’를 만들어 먹거나, 그럴수록 원조의 여유를 보이면 된다. 중국의 마라떡볶이는 떡볶이가 아니라고 볼 필요가 없고, 얼마든지 그렇게 하라고 여유를 보이면 좋겠다.”

—식량 위기에 대한 생각이 궁금하다. “지구온난화가 먹거리에도 영향을 크게 주고, 다양성의 문제에도 영향을 주고. 노동과 이주 문제도 있다. 우리가 외국 가서 일하는데 임금 차별 받고 그러면 좋겠나. 당연한 얘기를 외국인에게는 당연한 듯 한다. 싼 노동력 때문에 데려오는 거라고. 그런 비인간적인 시대에서 우리가 벗어나기 위해 물가가 오른다면 나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생산 비용이 올라가서 물가 오르는 것을 책임져야 한다고. 종자도 개량하고 큰 노력을 기울였지만, 효율적인 대책을 강구할 수 없었다. 누가 돼지 똥 치우는 것 같은 어렵고 힘든 일을 저임금을 받고 하겠나. 밥 한 끼가 과잉 식사, 식량 배분, 유통, 노동, 저출산 문제를 다 포괄한다.”

2023년 1월22일 오후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분향소가 차려진 서울 녹사평역 앞 광장에서 희생자 유가족, 친척과 친구들이 설을 맞아 평소 고인들이 좋아했던 음식들로 상차림을 한 뒤 차례를 지냈다. 차례상에 피자와 커피가 보인다. 한겨레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다. “그저 이 정도 기본적인 태도를 갖는 게 국민으로서 기본이라고 생각하고 자연스럽다.”

—끝으로, 사라져가는 것 중 아쉬운 것이 있다면. “사라져가는 건 할 수 없는 거고, 사라져갈 때 그걸 기록함으로써 헌사를 바치는 것도 하는 수 없다. 지켜야 할 이유가 있으면 누군가 할 거고. 나는 쳐다보는 사람이고. 기록함으로써 나는 할 일을 하는 거로 생각한다. 다만 새로운 시대 새로운 한식이 있을 거다. 제사상에 피자를 올린다는 건, 처음에 ‘세월호 아이들’ 때문에 생겨난 이야기지만, 앞으로 제사를 계속할 거냐 말 거냐 하는 논의와는 별개로 제사상에 피자를 피자헛으로 올리느냐 피자인으로 하느냐 미스터피자로 하느냐를 놓고 자식들 간에 논쟁이 벌어지는 게 자연스럽지 않나 생각한다. 그건 또 그것대로 우리는 수용하는 즐거움이 있지 않을까.”

—아버지 제사상엔 배추적을 괴어 올린다고 했다. 어머니의 경우엔 무엇을 올릴 거 같나. “글쎄. 제사를 지낸다는 생각을 안 해봤는데, 그렇다면 어머니는 구운 고기를 좋아하실 것 같다. 아버지 제사상에 예전엔 담배를 피워 올리기도 했는데 내가 담배를 안 피우니까 그건 안 한다. 그러고보니 아버지 거의 마지막 말 중 하나가 담배 하나 달라는 거였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하셨다. 담배 이야기와는 별개로, 미안하다.”

또, 울컥.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아버지 거의 마지막 말 중 하나가 담배 하나 달라는 거였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하셨다. 담배 이야기와는 별개로, 미안하다.” 박찬일 셰프가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일을 많이 한 손을 앞으로 포개고 섰다.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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