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함에 스스로 ‘입틀막’한 지식인들이 완성한 ‘멋들어진 구조’[전문가의 세계 - 이종필의 과학자의 발상법]

기자 2024. 3. 4.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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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부조리의 프랙털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수학자 망델브로, ‘프랙털’ 창안
해안선·하천 지류·나뭇가지 등
비슷한 모양 반복되는 자연에
대상 척도 상관없이 ‘일정한 값’
인간 사회서도 비슷한 모습 관찰
축구대표팀 감독 선임·경질 과정
절차 무시하는 정부 행태와 닮아
카이스트 졸업식 ‘입틀막’ 사태서
또 다른 ‘부조리의 프랙털’ 목격
선수 조리돌림 방관한 축구협회
학생 구하지 않는 학교 ‘닮은꼴’
입장 표명 등 외면, 침묵 속 동조
‘이 구조’ 완성한 마지막 퍼즐인 셈

한반도 해안선의 총길이는 얼마나 될까? 영국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 기상학자였던 루이스 리처드슨은 전쟁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던 와중에 인접한 두 나라의 공통 국경의 길이와 그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확률 사이의 관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리처드슨이 확인해 보니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경우 국경선 길이가 두 나라의 발표마다 달랐다. 리처드슨은 이 차이가 단지 국가별 측정 방식의 차이나 오차 때문이 아님을 알았다.

복잡한 구조를 가진 한반도의 해안선 길이는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먼저 적당한 크기의 지도를 준비하고 측정의 편의를 위해 100㎞짜리 자를 가지고 측정한다고 생각해 보자. 길이를 잴 수 있는 최소단위가 100㎞이므로 그 이하의 복잡한 구조는 모두 100㎞짜리 직선으로 근사하게 탈바꿈될 것이다. 그 결과 이렇게 측정한 해안선의 길이는 실제 해안선의 길이보다 더 짧게 나올 것이다. 이제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10㎞짜리 자로 측정해 보자. 이번에는 이전보다 더 세부적인 굴곡까지도 모두 계산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 해안선의 길이는 더 길게 측정될 것이다.

측정의 최소단위를 점점 더 줄이면 어떻게 될까? 그에 따라 점점 더 복잡한 해안선의 구조를 잘 포착해 내서 측정에 반영할 수 있을 것이고 당연히 해안선의 길이도 점점 더 길어질 것이다. 이제 더 정확한 해안선의 길이를 구하기 위해 측정의 최소단위를 더 작게 하고 그에 맞춰 한반도 지도를 더 확대해 보자.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미적분의 기본원리를 이용해 곡선 형태의 함수의 길이를 구할 때에는 곡선의 길이를 매우 잘게 쪼개서 연속적으로 다 더하면(이 과정이 수학적으로는 적분에 해당한다) 정확한 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해안선의 경우는 좀 다르다. 지도를 확대해 보면 그 이전에 보이지 않던 복잡한 해안선 구조들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다. 최소 측정단위는 더 작아졌지만 근본적인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런 과정을 계속 반복하다 보면 해안선의 길이는 최소 측정단위가 짧아짐에 따라 무한히 길어질 것이다. 이런 현상을 리처드슨 효과라 부른다. 그 결과 해안선의 길이를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상황을 ‘해안선 역설’이라 부른다.

폴란드 태생의 프랑스계 미국 수학자인 브누아 망델브로는 리처드슨의 연구에 영감을 받아 1967년 <영국의 해안선은 얼마나 긴가? 통계적인 자기유사성과 분수차원>이라는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했다. 자기유사성이란 척도가 변하더라도 어떤 구조의 모양이 정확하게 똑같거나 비슷한 성질이다. 즉, 전체의 구조가 말단의 부분에서 똑같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망델브로는 해안선의 복잡한 정도를 수치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분수차원을 도입했다. 이 값은 대상의 척도에 상관없이 항상 일정하다. 망델브로는 이후 해안선처럼 복잡하고 거친 구조에 프랙털(fractal)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프랙털은 ‘깨진’ ‘조각난’ 등의 뜻을 가진 라틴어 fractus에서 따온 단어다.

프랙털 구조는 해안선뿐만 아니라 하천 지류, 나뭇가지, 눈송이, 혈관, 번개, 토성의 고리 등에서도 나타난다. 큰 척도에서나 작은 척도에서나 비슷한 모양이 계속 반복해서 드러나는 양상은 자연의 흥미롭고도 신비한 현상이다. 잘 살펴보면 인간 사회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국가단위에서 관찰할 수 있는 모습을 조그만 사회단위에서 발견하게 되면 우리는 흔히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해안선이나 눈송이처럼 기하학적인 구조로 표현할 수야 없겠지만 척도에 상관없이 같은 모습이 반복적으로 구현된다는 점에서 이런 모습도 사회학적 프랙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최근에 우리가 목격한 장면은 그리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었다. 바로 아시안컵 축구대회를 둘러싼 축구협회의 모습이었다. 한국 축구국가대표팀이 최악의 졸전 끝에 아시안컵 4강전에서 요르단에 패하고 결승 진출에 실패하자 축구협회는 전격적으로 클린스만 감독을 해임했다. 동시에 대표팀 선수들 사이의 갈등과 다툼이 알려졌다. 사실 라커룸에서 선수들끼리의 다툼이야 어느 나라 대표팀이나 세계적인 명문 클럽팀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을 경악시킨 것은 축구협회가 선수들을 먼저 보호하기는커녕 앞장서서 선수들 사이의 불화를 공식화하고 사태 해결에 수수방관하는 모습이었다. 이를 희생양 삼아 축구협회로 향한 비난의 화살을 모면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다.

아시안컵대회 부진과 감독 경질, 선수단 불화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보자면 축구협회가 절차를 무시하고 회장이 독단적으로 협회를 운영하면서 감독 선임에 이르기까지 낙하산 내리꽂기식의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정몽규 회장은 부인)이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설령 그런 의혹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이런 불미스러운 사태가 벌어진 데 대해 누구보다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은 바로 정몽규 축구협회 회장이다. 어느 조직이든 권한이 클수록 책임도 커야 함은 당연한 원칙이다. 그럼에도 정몽규 회장은 책임을 개별 선수나 감독에게 떠넘기고 회장직을 계속 유지하는 선택을 고수했다.

이런 모습은 한국의 정치현실에서도 너무 쉽게 관찰할 수 있는 ‘부조리의 프랙털’이다. 검사 출신의 윤석열 대통령은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면서 직책수행을 위한 전문성보다는 함께 근무했던 경력이나 오랜 친분을 가장 중요한 인선 기준으로 삼았다. 대통령의 고위직 임명권이 아무리 대통령의 고유한 권한이라고는 하지만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을 이끌어갈 내각이 초등학교 반장의 인선처럼 구성되면 안 되는 노릇이다.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을 지지 않는 모습도 너무나 똑같다. 도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비명횡사로 유명을 달리했음에도 고위공직자 중에서 책임을 지고 자리를 떠난 사람이 한 명도 없다. 고위공무원이 직무와 관련해 가장 엄중하게 책임을 지는 것은 그 많은 권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죄를 지어 형사처벌을 받아야 하는 경우라면, 그건 고위직이든 하위직이든 동네 구멍가게 아르바이트생이든 누구에게나 적용돼 평등하게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으니 자리를 보전해도 상관없다는 변명은 국가고위직의 무게를 전혀 반영하지 않은 면피성 발언에 지나지 않는다. 일국의 장관이라면 하다못해 부하직원들이나 조직 전체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한 포괄적인 책임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고위직 인사가 전혀 책임을 지지 않는 모습은 해병대 장병 사망사건에 대해 사령관이나 해당 사단장이 오히려 큰소리치며 자리를 보전하는 모습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런 사례들을 똑똑히 목격했을 정몽규 축구협회 회장으로서는,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닌데 자기 보고 회장직에서 물러나라고 외치는 축구팬들의 성화가 무척 부당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절차를 무시하는 행태도 무척이나 닮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가 R&D 예산을 삭감하면서 현장 연구진과 토론하거나 협의하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과학기술계는 왜 그렇게 많은 R&D 예산이 깎여야 하는지, 대체 그놈의 ‘카르텔’이 누구이고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축구경기야 사실 져도 그만이지만 한 국가의 최고급 인재풀은 한번 구멍이 생기면 국가 전체에 치명적인 타격을 준다. 다시 회복하는 것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연구자와 국가 사이의 기본적인 신뢰관계가 완전히 무너진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이다.

가장 나빴던 점은 반대자의 목소리를 물리적으로 틀어막는, 말 그대로 ‘입틀막’의 야만적인 행태를 자행했다는 것이다. 얼마 전 카이스트 졸업식에서 한 졸업생의 대통령을 향한 항변을 경호원들이 물리적으로 제지했던 장면은 한 명의 과학자로서 지켜보기에 너무나 참담했다. 여기서 나는 또 다른 ‘부조리의 프랙털’을 목격할 수 있었다. 학생이 부당하게 권력으로부터 탄압을 받고 있는데 학교와 교수 누구도 나서서 그 학생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 교수협의회에서는 사후적으로 입장을 표명하는 성명조차 다수의 동의를 얻지 못해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았다. 축구협회가 소속 선수들이 언론의 조리돌림 대상으로 전락해도 팔짱 끼고 구경만 했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일방적인 R&D 삭감으로 자신들의 존재이유를 위협한 장본인의 학교 방문을 용인할 정도의 큰 마음 씀씀이가 왜 자신들의 제자에게는 그리도 박절했을까.

문득 십수 년 전의 한 가지 일화가 떠올랐다. 2008년 이탈리아 로마의 사피엔자 대학 소속 67명의 교수와 수많은 학생들이 당시 교황이던 베네딕토 16세의 대학 방문을 반대한 사건이 있었다. 그 이유는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추기경(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었던 1990년 사피엔자 대학에서 가톨릭교회의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대한 1633년 종교재판 판결을 두둔하며 “이성적이며 정당했다”고 발언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갈릴레이는 <두 체계의 대화>라는 자신의 저작이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가르치거나 옹호하지 말라는 1616년 교황의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가택연금되었다. 교황이 375년 전의 판결에 대해 18년 전에 발언한 내용을 대학 교수와 학생들이 굳이 문제 삼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더 이상 종교가 과학과 학문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철의 원칙을 지키고 싶어서이지 않았을까? 이탈리아가 괜히 명품의 나라가 아니구나 싶었다. 대학에서 정교수의 지위를 부여하고 높은 연봉으로 정년을 보장하는 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부조리의 프랙털’ 구조를 만드는 요소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21세기 대명천지에는 아무래도 부당한 권력의 존재만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글깨나 배운 지식인들의 침묵 속의 동조야말로 이렇게 ‘멋들어진 구조’를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인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이종필 교수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90년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했으며 2001년 입자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연세대·고등과학원 등에서 연구원으로, 고려대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했다. 2016년부터 건국대 상허교양대학에서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신의 입자를 찾아서> <대통령을 위한 과학 에세이>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 <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 등이 있고, <최종이론의 꿈> <블랙홀 전쟁> <물리의 정석>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 등을 우리글로 옮겼다.

이종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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