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과거사규명·출총제 두고 “좌파 정부” 맹공
장관에 반말투로 고함치던 의원들
수시로 자리 비우고 형식적 질문
국무총리·청와대 정책실장
예결위 출석시킨 뒤 정치공세만
2003년 4월25일(금) 10시 문희상, 유인태 등 10여명과 함께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했다. 국회의원들의 지각으로 30분 늦게 시작했다. 의원들은 서로 ‘존경하는 아무개 의원님’이라 부르면서 장관에게는 거의 반말 투로 윽박지르거나 고함을 치는 고약한 버릇이 있었다. 각 의원의 질문 시간이 1문1답식으로 10분 이내로 제한돼 있는데 시간을 지키는 의원이 한 명도 없었다. 2003년 9월18일(목) 9시 국회 운영위의 2002년 결산 보고에 참석했다. 또 30분 늦게 시작했다. 23명 의원들이 들락날락하며 파상 공세를 퍼붓는데 중복 질문, 형식적 질문이 많았다. 회의는 12시 반에 끝났으나 의결 정족수가 모자라 2시 반에 속개한다고 해 어이가 없었다.
10월31일(금) 9시 반 국회 예결위 결산 회의에 출석했다. 어제 총무비서관이 출석했더니 어느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당신이 왜 거기 앉아 있느냐?”고 망신 주는 바람에 문희상 비서실장이 출석, 자정까지 고생했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은 나하고 김영주 비서관(나중에 경제수석, 산자부 장관)이 출석했는데 하루 종일 청와대 관련 질문은 하나도 없었다. 대부분 총리 상대 질문인데 그것도 예결산과 관련 없는 정치공세 뿐이었다. 국회가 권위주의적이고, 도무지 시간관념이 없고 낭비적, 형식적 회의가 많아서 개혁할 게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경기부양 반대’하자 곳곳서 공격
여당 정책위의장과도 설전 벌여
고교·대학 후배인 유승민 의원의
“무지가 오만으로” 비판에 씁쓸
2004년 5월 열린우리당 홍재형 정책위의장과 나 사이에 경기부양을 둘러싼 의견 대립이 있었다. 홍 의장은 겨울이 다가오니 오버코트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고, 나는 겨울이 지나가는데 난로 구입하는 격이라고 반박해 설전이 오갔다. 당시 다수 거시경제 전문가들이 경기회복이 임박해 경기부양책은 부적절한 걸로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7월30일 유승민 한나라당 의원이 한겨레의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21’과의 인터뷰에서 나의 경기부양 반대론을 공격하면서 ‘무지가 오만으로 변했다’고 심한 말을 했다. 그는 또 “참여정부 1년 반 동안 경제정책이라 할 만한 게 없다”, “수도 이전은 장기집권 음모”, “앞으로 20년은 분배보다 성장에 매진해야 한다”는 일방적 주장을 폈다. 유 의원은 경북고와 서울대 경제학과의 8년 후배다. 정치가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가 싶어 씁쓸했다.
2004년 10월11일(월) 국회 재경위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했다(과천 재경부). 오전에 한나라당 윤건영 의원부터 질문을 시작해서 한 바퀴 돌았다. 윤 의원이 참여정부를 좌파라고 공격하자 심상정 의원은 중도 될 자격도 없다고 반론을 폈다. 나는 참여정부는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추구하고, 노사의 상생 발전을 도모하므로 중도파 정부라고 답했다. 한나라당은 좌파라고 하고, 민노당은 우파라 하니 평균하면 중도파가 아니냐고 말했다.
점심 먹으러 가는 길에 경북대 졸업생 최중혁(매일노동뉴스 기자)군을 만났는데 재경위 소속 한나라당 의원 중 제일 독설가는 김양수 의원(경남 양산)이니 특별히 조심하라고 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식당에서 김 의원과 딱 마주쳤다. 그런데 나를 보자말자 “소신, 철학이 뚜렷해 존경합니다”라고 말해 뜻밖이었다. 오후에는 KBS TV가 중계방송을 하니 의원들은 화면에 나오려고 노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에겐 답변할 기회를 거의 주지 않고 자기 주장만 늘어놓았다. 4층 좁은 회의실이 기자들로 가득 찼다.
오후 4시부터 3차 회의 및 보충질문이 있었다. 최경환 의원이 참여정부를 ‘위원회 공화국’이라고 비난하며 나를 ‘소통령’이라고 불렀다. 임태희 의원이 나더러 대우종합기계 매각 건에 개입했는지 묻기에 나는 빈부격차위원장으로서 100대 국정과제의 하나인 우리사주 확대를 위해 노사 어느 편도 들지 않고, 특혜와 차별 없이 공정하게 매각하는 원칙을 정했다고 답했다. 심상정 의원은 참여정부는 우파 정부라 희망이 없지만 그래도 이정우는 개혁파로서 앞으로 잘 해달라고 두 차례나 부탁했다. 한나라당 김양수 의원 차례가 되자, “이정우 위원장 자료를 찾아보니 100페이지가 넘더라. 소신과 철학이 뚜렷한 분이라 장차 한국은행 총재를 해야 할 분이다”라고 의외의 발언을 해서 엄숙하던 회의장에 폭소가 터졌다. 열린우리당 강봉균 의원이 경기부양책에 대한 내 생각을 질문하기에 “병이 있으면 치료해야 하고, 아프면 진통제도 줘야 하지만 마약을 줘서는 안 된다. 경기부양은 반대 않지만 장차 부작용이 나타날 인위적 경기부양은 반대한다”고 분명히 답했다.
기세등등하던 국감도 저녁 8시가 지나자 파장 분위기가 완연했다. 그런데 갑자기 한나라당 윤건영 의원이 보충 질문 신청을 하더니 나를 향해 1문1답식 공격에 나섰다. 경제위기설, 부동산 정책 등 공격을 퍼붓기에 나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하나하나 반박해 공방이 20분간 계속됐다. 윤 의원은 경북고와 하버드대학 경제학과 2년 후배인데 안면몰수하고 집요하게 사상검증을 하려 들었다. 주위에 한나라당 의원들이 배도 고프고 하니 “마 됐다. 가자”라고 해서 8시 반에 드디어 국감이 끝났다. 거의 10시간 사상검증을 당한 셈이다. 부근 설렁탕 집에서 한나라당 김무성 재경위원장이 저녁을 샀다. 김 위원장이 나에게 말했다. “이 위원장이 하도 악명이 높아서 그런 줄 알았는데 오늘 하루 종일 지켜보니 그렇지 않네요.” 다음날 언론이 나의 국감을 도배하다시피 보도했는데 나에게 유리한 건 하나도 써주지 않았다.
‘고교 평준화=하향 평준화’ 주장에
“한국 고교생 실력 세계 최고 수준
하향평준화 아니고 상향평준화” 반박
며칠 뒤 10월22일(금) 10시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에 또 불려 갔다. 오전에 MBC에서 녹화해 오후에 방영했다. TV 카메라가 들어오자 의원들이 모두 적극적으로 발언했다. 주로 김우식, 김병준 실장에게 어제 있었던 헌재의 신행정수도 위헌 결정을 승복하느냐고 거듭 질문했다. 김우식 비서실장은 “법적 효력을 누가 부정하겠습니까?”라고 모범 답변을 반복해 공격을 피해갔다. 남경필 의원이 참여정부를 좌파 정부라고 공격하기에 내가 어떤 내용이 좌파인지 질문했다. 그러자 남 의원이, “과거사 진상 규명, 출자총액제한제도(출총제), 분양가 원가공개…”를 들기에 내가 반박했다. “과거사 진상 규명이 어떻게 좌파냐. 2차대전 뒤 가장 철저히 과거사 청산을 한 프랑스의 드골 정부는 우파가 아니냐. 역사 바로 세우기는 좌우와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니 남 의원이 순간 당황하며, “한나라당도 과거사 진상 규명은 반대하지 않는다”고 물러섰다. 이어서 내가 “출총제도 경제의 투명성을 높이고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해서 시장경제를 제대로 하자는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하니 신사적이라고 소문난 남 의원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나라당의 안명옥 의원이 참여정부의 교육 정책을 하향 평준화라고 공격하기에 내가 “한국의 대학입시 변별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오히려 과잉 변별력 요구가 과잉 과외를 낳는다”고 반박했다. 안명옥 의원이 자꾸 ‘하향 평준화’라고 비판하기에 내가 답했다. “평준화하면 으레 하향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데 틀렸다. 상향 평준화다. 한국 고등학생들은 세계 최고 실력이다.” “그럼 상향 평준화란 말인가?” “그렇다. 상향 평준화다. 아무 문제 없다.” 나한테는 헌재 결정에 대해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 혹시 하면 나는 두루뭉술 넘어가지 않고 헌재를 정면 비판할 생각이었는데 기회가 오지 않았다.
국감이 파할 무렵 학계에서 잘 아는 사이인 한나라당 박세일 의원이 외교부 국감을 하던 중 잠깐 들러 나에게 격려 메모를 주고 갔다. “어려운 때 수고가 너무 많으시지요. 그러나 성과는 쉽게 보이지 않지만 많을 것입니다.” 종일 시달린 피로가 일순에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1년 뒤 박세일 의원을 다시 만났다. 2005년 9월29일 강원룡 목사가 주관하던 대화문화아카데미가 창립 40주년을 기념해서 ‘양극화’를 주제로 내걸고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정책 브레인 3명-박세일, 최장집, 이정우-을 연사로 초청한 자리에서였다. 박세일 교수는 우리나라 합리적 보수의 아이콘이었는데 2017년 타계해 애석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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