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만에 만난 첫사랑… 과거·미래 - 한국·미국 초월한 ‘인연’

이정우 기자 2024. 3. 4.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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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일 개봉…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로맨스보단 정체성 탐구에 집중
섬세한 감정표현·위트 돋보여
한국계 캐나다인 셀린 송 감독
이민자로서 혼란한 감정 담아내
시간을 걷는 남녀의 엔딩신 여운
아카데미 작품·각본상 후보올라
24년 만에 재회한 해성(유태오)과 나영(그레타 리)은 각자의 과거에게 인사할 준비를 한다. CJ ENM 제공
해성(유태오)과 나영(그레타 리), 나영의 남편 아서(존 마가로)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장면은 셀린 송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였다. CJ ENM 제공

“네가 좋아했던 그때의 나영이는 지금 여기 없어.”

“나도 알아.”

“그런데 그 아이가 없었다는 건 아니야. 그 아인 분명히 존재했어.”

나영(그레타 리)과 해성(유태오)은 세 번 이어지고, 세 번 헤어진다.

12살에 그들은 처음 만났고, 24살엔 매일 화상통화를 하며

미국 뉴욕과 한국 서울이란 거리감을 잊으려 애쓴다.

그리고 36살, 남편과 뉴욕에 거주 중인 나영을 해성이 찾아온다.

해성의 말처럼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고, 24년간 만난 적도 없지만,

그들은 일생을 서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쌓아두고 살아왔다.

그들은 ‘인연’이었을까.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6일 개봉)는 첫사랑이었던 두 남녀가 결국 이어지는 전형적인 로맨스 영화가 아니다. 그보다는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타임라인에서 나는 누구였고, 너에게 무엇이었으며, 우리는 어떤 관계일까를 묻는 정체성 탐구에 가깝다. 그렇다고 딱딱하게 철학을 늘어놓진 않는다. 셀린 송 감독은 ‘코리안-아메리칸’이란 정체성을 바탕으로 애틋함이란 감정을 섬세하고 위트 있게 풀어내며,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각본상 후보에 올랐다.

어린 시절 첫사랑이었던 나영을 해성이 우연히 발견하며, 둘은 12년 만에 SNS로 재회한다. 그렇지만 설렘이 관계로 맺어지기엔, 둘의 물리적 거리는 너무 멀었다. “뉴욕에 언제 올 거야?”(나영)나 “서울에 안 올 거야?”(해성)란 물음만 도돌이표처럼 평행선을 달린 끝에 나영은 해성에게 연락 중단을 고한다.

영화를 관통하는 건 ‘인연’이란 한국적 관념이다. 한국말과 영어를 혼용하는 영화에서 ‘인연’만 유독 한국말로 쓰인다. 송 감독은 지난달 29일 인터뷰에서 “인연이란 단어는 그 단어로만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영화를 본 전 세계 사람들이 모두 ‘인연’이란 단어를 알고 나오게 돼요. 다들 나영과 해성이 느꼈던 감정을 살면서 느꼈지만, 이걸 표현할 단어가 없었던 거죠.”

여기에 12살에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 뉴욕에 터를 잡은 ‘코리안-아메리칸’이란 감독의 정체성이 영화를 독특하게 만든다. 나영이 뉴욕에 방문한 해성, 남편과 저녁 식사를 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남편과 해성이 같은 공간에 있는 것도 어색한데, 나아가 나영은 한국말을 쓰는 해성과 영어를 쓰는 남편 사이에서 통역해줘야 한다. 해성은 나영에게 마음에 담아뒀던 속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한국말로. 영문 모를 표정을 짓는 남편에게 나영은 둘의 대화를 건조하게 전달한다. 송 감독의 경험에서 비롯된 이 장면은 영화의 시작점이다. 송 감독은 “가장 중요한 질문은 세 사람이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가란 것”이라며 “마지막에 비로소 세 사람이 서로 인연이었음을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미나리’ 등 다른 이민자 영화들이 ‘한국인’이란 과거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반면, ‘패스트 라이브즈’의 나영은 한국인이었던 과거를 뉴욕에 사는 현재 자신과 별개인, 이전의 삶으로 여긴다. 송 감독은 “이민 오기 전 12살의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겐 내가 12살의 나로 그들에게 존재한다”며 “인생에서 두고 온 부분에 대한 이야기”라고 정의했다.

영화는 할리우드의 ‘핫’한 제작사 A24와 CJ ENM이 공동 제작했다. 고경범 CJ ENM 영화사업부장은 “북미와 아시아 양쪽에서 힘을 합치면 전 세계 관객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고 말했다.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기획 상품처럼 길러졌지만, 여기에 예술성을 불어넣은 건 송 감독의 감각이다. 특히 나영이 해성을 배웅하는 엔딩 신은 절묘하다. 별다른 시각 효과 없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는 남녀를 패닝-쇼트(카메라의 수평 이동)로 잡는 것만으로 현재에서 과거로 시간을 걷는 여운을 준다. 송 감독은 “둘이 걷는 이스트빌리지 길은 일종의 타임라인”이라고 말했다. 나영과 해성은 ‘안녕’을 하며, 과거를 떠나보내고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을 것 같다’는 피천득 ‘인연’의 화자와 달리 나영과 해성은 마지막 만남을 안고 현재를 살아갈 것이다.

이정우 기자 krust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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