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와 한국 주식시장, 전략상실의 대가 [EDITOR's LETTER]

입력 2024. 3. 4. 07:25 수정 2024. 3. 4.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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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올해 봄으로 가는 길은 유독 거칠게 느껴집니다. 2월과 3월 초 눈과 비도 많이 왔고, 흐리고 추운 날도 많았습니다. 좋은 소식이 별로 없어 사회를 둘러싼 공기도 무겁고 어둡게 느껴집니다.

이런 2월에 상하이로부터 날아든 낭보는 통쾌했습니다. 농심 신라면배 바둑대회에서 2000년생 신진서 9단이 우승했습니다. 과정은 극적이었습니다.

중국 4명, 일본 1명 남은 상황에서 홀로 상하이로 날아가 모든 상대를 제압했습니다. ‘응답하라 1988’에 나온 이창호의 ‘상하이 대첩’을 재연했습니다. 중국에서는 “14억 명 중에 뽑힌 5명이 5000만 명 중에 뽑힌 한 명을 못 이기냐”라는 탄식이 나왔습니다. 철저한 준비와 위기에 흔들리지 않는 냉정함, 이를 기반으로 판을 흔들고, 작은 것을 내주고 큰 것을 취하는 전략이 승리 요인이었습니다.

신진서를 보며 한국이 갖고 있는 자산을 떠올렸습니다. 사람. 식민지와 전쟁을 거친 폐허 속에서 국가도 산업도 스포츠도 일으켜 세운 원동력이었습니다.

좋은 얘기는 여기까지만. 현실을 생각하면 막막해집니다. 22년 전인 2002년 4월로 가보시죠. 이건희 삼성 회장은 한 회의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삼성이 이대로 커 간다면 전 세계 경쟁 기업이 다 덤벼들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무슨 힘으로, 어떤 전략으로 이를 막아야 하는가. 또 우리는 이를 뿌리치고 어떻게 전진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 기막힌 예언 두 가지는 모두 적중했습니다. 2000년대 이후 삼성은 질주했고, 강력한 글로벌 플레이어가 됐습니다. “경쟁 기업들이 다 덤벼들 것”이라는 것은 현재 체감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반도체 랠리에서 대표기업 삼성전자가 소외되는 낯선 광경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습니다.

시작은 일본이었습니다. 반도체 부활을 외치며 미국(마이크론)과 대만(TSMC)의 공장을 유치할 때만 해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본 주가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자 뭔가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여기에 AI 열풍이 휘몰아치며 엔비디아가 세계를 대표하는 반도체 회사로 올라서며 분위기는 더 묘하게 흘렀습니다. 인텔도 마이크로소프트에 AI 반도체를 공급하겠다며 숟가락을 얹었습니다. 

반도체 판은 순식간에 대만-일본, 일본-미국, 미국-대만, 미국-미국 다양한 연대의 장으로 바뀌었습니다. SK하이닉스만 엔비디아-TSMC 연합에 발을 담그고 있을 뿐 삼성전자는 없습니다. 주가는 그 결과였습니다. 미국의 매그니피센트7, 일본의 사무라이7, 대만의 TSMC가 이끌며 각국 주가는 사상 최고 기록을 다시 썼습니다.  

유럽은 헤매고 있겠지 하고 돌아봤습니다. 웬걸, 독일·프랑스·네덜란드 주가 그래프도 다 미국과 비슷했습니다. 반도체장비 명품과 바이오가 유럽의 주가 상승을 이끌었습니다. 한국의 주가 차트는 그렇게 정부가 벗어나고 싶다던 중국의 그것과 유사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전략의 상실이란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삼성전자는 1991년부터 이건희 회장이 소프트웨어 인재를 뽑아오라고 했지만 30년이 지나도록 이 숙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앞서서 길목을 지키라”라고 했지만 AI 시대를 준비하지 못해 HBM(고대역폭메모리)은 후발주자가 됐습니다. 해외 기업들의 경계는 심해져 삼성전자가 고립됐다는 느낌까지 듭니다. 아니면 길을 잃었든가.

국가의 전략은 더 형편없었습니다. 미국, 일본 등 반도체 부활을 꿈꾸는 나라들은 예외없이 현금을 줘가며 해외 공장을 유치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세제 이외에 지원책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밀어내는 정책을 써버렸습니다. R&D 예산 삭감으로 연구자들의 사기는 꺾였고, 의대 정원 확대는 가뜩이나 취약한 이공계 경쟁력 추락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의 전략도 심각합니다. 각자도생의 시대에 ‘돈과 안정적 직업’이란 슬로건은 의미와 가치, 미래 등 모든 단어를 집어삼켜버렸습니다. 수십 년 이어진 의대 편향 현상과 저출생은 이 분위기를 상징합니다.

국가 전략, 기업 전략, 사회 전략이 부재하거나 왜곡된 상태에서 이 정도 주가면 선방이라고 하는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인이나 한국 기업 모두 위기에 강한 DNA가 있다는 점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삼성전자는 세계에서 드물게 메모리 반도체와 비메모리 반도체를 동시에 제조할 수 있는 회사입니다. 이를 활용해 어느 날 판을 한번 뒤집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가는 자기실현적 예언의 기능을 갖고 있다”는 말이 틀리기를 바라는 3월입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장 juny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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