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사과하라 반복하지 말고 번복하지 말라고 요구해야”
2024. 3. 4. 06:10
신각수 전 주일대사 인터뷰
앞으로 나아가기도, 관계를 끊고 뒤로 물러서기도 어렵다.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한·일관계가 그렇다. 잊을 만하면 터져 나오는 일본발 ‘망언’은 전 국민을 분노케 하는 단골 소재다. 올 7월이면 결정될 사도광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시도도 마찬가지다. 멀어졌나 싶지만 현실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지난해 기준, 일본인 232만명이 한국을 찾았고, 한국인 696만명이 일본을 찾았다.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 수 1위가 일본인이고,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 수 1위가 한국인이다. 일반적으로 활발한 교류는 친밀도를 상징한다.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 지속하는 것은 정치의 책임이 크다. 한·일관계는 외교 문제라기보다 양국의 국내 정치 문제다. 보수라고 친일, 진보라고 반일도 아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오부치 당시 총리와 한·일 파트너십을 선언하며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자’고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12년 독도를 방문하며 반일에 불을 지폈다. 대통령이 임기 내에 일본과 관계개선을 시도했다가 반일로 돌아선 사례도 빈번하다. 대일 전략이 장기적 관점과 계획으로 추진되지 못하고 그때그때 흔들렸다는 의미다.
관계의 부침은 피로감을 만든다. ‘한국으로부터 늘 사과를 요구받는다’고 볼멘소리를 하는 일본뿐만이 아니다. 이제 한국에서도 ‘굳이 한·일관계를 개선해야 하느냐’는 목소리가 나온다. 엔저효과를 이용해 값싸게 여행은 가되, 서로 이해는 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는 여전히 일본과 풀어야 할 쟁점이 많다. 상호 이해를 못 하는데 문제를 풀 수 있을 리가 없다. 감정의 골만 깊어질 뿐이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를 지난 2월 26일 만났다. 신 전 대사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일본 전문가’다. 보수·진보 전문가 모두가 인터뷰를 추천한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에게 한·일 갈등의 시발점부터 해법까지를 물었다.
-한·일 갈등의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과거사 문제가 지속해서 한·일관계의 진전을 가로막아 왔다. 지난 ‘잃어버린 10년’도 결국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강제동원 문제 때문에 발생했다. 일본과의 과거사는 정체성 문제이기 때문에 어렵다. 우리 근세사를 논할 때 일본의 한반도 진출과 식민통치 부분을 빼면 많은 부분이 공백으로 남는다. 문제는 일본과의 역사 인식 차이가 너무나 크다는 점이다. 우리는 일본의 식민통치가 불법·부당하다고 보는 반면 일본은 이를 합법·정당하다고 본다. 14년 교섭 끝에 1965년 한·일기본조약 및 4개의 부속 협정을 맺었지만 이때도 인식 차이는 좁혀지지 않고 외교적 타협을 통해 해결했다. 기본조약 제2조를 보면,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임을 확인한다’고 나온다. 이처럼 상호 충돌하는 표현이 들어간 것은 일본은 ‘이미’라는 말을 원했고, 우리는 ‘무효’라는 말을 원했기 때문이다. 이를 토대로 일본은 대한제국과 맺은 조약 및 협정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조약 또는 1965년 기본조약 이후 효력을 상실했다고 주장한다. 즉 그 이전 식민지배는 합법이란 것이다. 반면 우리는 처음부터 무효라는 입장이다. 이 문제는 국교 수립 당시 일본으로부터 받은 자금 8억달러(무상 3억달러·유상 2억달러·은행차관 3억달러)의 성격과도 연결된다. 불법 행위에 대한 배상이냐, 청구권 청산자금이냐의 문제다. 또 청구권 협정 제2조에 나오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문항 역시 개인청구권 소멸에 관한 인식을 두고 갈등을 만들고 있다.”
-역대 정부의 인식은 어떤가.
“적어도 2018년 강제동원 문제에 관한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에는 피해 보상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 정부의 입장이 같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청구권 협정으로 소멸됐다는 것이다. 1970년대와 2007년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신청을 받아 예산으로 보상했다. 2005년 민관합동위원회에서 검토하고 발표한 보고에서도 1965년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되지 않은 것은 일본군위안부, 원폭피해자, 재사할린 한인 문제로 특정했다. 하지만 국내 사정으로 정부부터 일관된 입장을 보이지 못했다.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초기 일본에 더 이상 과거사를 묻지 않겠다고 했다가 나중에 번복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국민과 피해자들부터 납득을 하지 못했다. 결국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됐다.”
-국민들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것 아닌가.
“일본에 관해서는 반일감정 때문인지, 객관적·균형적 교육이 잘 안 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한·일수교 이후 일본은 한국 경제에 자본과 기술 측면에서 많은 기여를 했다. 현대와 미쓰비시의 관계나 포스코와 신일본제철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지금 한국 내 대표 산업들은 과거 일본과의 협력에서 시작한 것이 많다. 그렇다면 이러한 부분은 일정한 기여를 했다고 인정해야 하는데 이런 부분에서 인색했던 것 같다. 유사한 사례는 또 있다. 1986년에 주일대사관 경제과장을 했다. 전두환 정부 초기 경제가 어려워지자 안보경협이란 논리로 일본에 협력을 요청했다. 우리가 북한 위협을 막아주니 일본이 경제협력을 해달라는 것이다. 그때 일본에 100억달러를 요구해 40억달러를 받았다. 이중 ODA(공적개발원조) 사업으로 서울시 하수종말 처리장 건설이 있었다. 당시 일본 외무성 담당과장이 일본에도 없는데 한국에 하수종말 처리장을 짓는다고 했다. 이런 사실을 우리 국민 중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일본의 과거사 사과 문제는 어떻게 보나.
“과거사에 대한 사과와 반성은 1983년 전두환 전 대통령 방일 때부터 30여 년에 걸쳐 천황 발언이나 총리 담화 형태로 나왔다.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2010년에는 간 나오토 일본 총리의 담화 형식으로 나왔다. 당시 정부가 많은 노력을 기울여 간 총리 담화를 끌어냈다. 정작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한 번 읽어보라. 구체적인 내용까지 들어가 잘 만들어졌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했다는 것과 식민지배가 잘못됐다는 내용이 그대로 나온다. 반성과 사죄가 담겨 있다. 과거사 문제에 접근하는 한국의 전략은 이제 변화가 필요하다. 더 이상 일본에 사과를 반복적으로 요구할 것은 아니다. 그보다 이미 여러 번의 사과를 통해 집적된 것을 잊지 말고, 번복하지 말라고 해야 한다. 감정적으로 ‘사과가 왜 이 수준밖에 안 돼’ 하는 것은 더 이상 일본과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는 것밖에 안 된다. 이러한 요구만 반복한 결과 일본에서 과거사 피로증이 생기고, 오히려 사과 수준도 후퇴하는 빌미를 줬다고 생각한다.”
-현실을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인가.
“우리가 과거를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이는 꼭 필요하다. 우리가 ‘왜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고’, ‘어떻게 해서 독립했는지’ 등을 스스로 성찰할 기회는 피해자 의식을 탈피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어 현재를 발전시켜야만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 일본이 과거에 어떤 나쁜 짓을 했는지 기억하되, 우리는 무엇 때문에 국권을 빼앗겼는지 객관적이고 균형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일본은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죄의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역사적 사실을 부정·왜곡하는 행위를 멈춰야 한다.”
-일본이 문제를 만드는 측면도 있지 않나. 올 7월 일본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 문제가 걸려 있다.
“사도광산 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취약해진 일본을 ‘강한 일본’으로 바꾸려는 일본 정치권의 역사수정주의 기조와도 연결된다. 일본 우파들은 메이지유신과 그 이후 근대화 과정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생각한다. 이를 일본 국민에게도 주입해 침체한 국내 분위기를 고조시키겠다는 의도가 있다. 경제산업성이 주도하는 근대산업문화유산의 유네스코 등재는 이러한 계획의 일환이다. 또한 침체한 지역을 강화하려는 자치단체들의 욕구도 작용한다. 다만 이런 기조에 일본 각 지방이 모두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같은 구역 내에 A지역이 세계유산이 될 경우 소외될 것을 염려하는 B지역이 있다. 이 문제는 일본 내에서도 그리 단순한 사안이 아니다.”
-정부 대응이 필요하지 않나.
“우리는 사실에 기반해서 다퉈야 한다. 사도광산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만한 것은 아니라고 하거나 일본이 추진하고 있는 1910년 이전 역사만 잘라서 등재할 수는 없다고 다퉈볼 수 있다. 궁극적으로 군함도처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더라도 강제동원 역사를 넣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군함도 관련해서는 일본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는데 우리가 일본을 국제 사회에서 약속 위반으로 몰아갈 수 있다는 유리한 측면이 있다. 통상적으로 유네스코는 분쟁이 있는 후보지는 당사국 간 합의를 우선하라고 한다. 유네스코 논의 과정에서 일본의 군함도 관련 합의 위반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특히 식민지 문제에 관심이 많은 글로벌 사우스(제3세계 혹은 개발도상국)의 협력을 얻는 방안을 추진해볼 수도 있다. 국제사회 분위기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협상의 유불리가 결정되므로 외교적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선 사실관계에 대한 자료나 연구가 필요한 것 아닌가.
“안타깝지만 부실하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증언도 얼마나 확보했는지 모르겠다. 일본의 사과를 외치기만 했지 먼지 쌓인 문서고로 달려가 그 당시 자료를 찾고 역사적 사실을 연구했는지 돌아봐야 한다. 없는 것도 만들어서 대비해야 하는데 그나마 있던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도 없애지 않았나. 역사를 놓고 다투려면 기본적으로 사료를 찾아 사실을 규명하고, 그것에 따른 역사서술을 해야 비로소 설득력을 갖게 된다. 동북아역사재단 외에 한·일과거사 관련 연구와 희생자 추모 기능을 겸한 기관을 만들어 연구·교육·추모 작업을 중장기적으로 실행해 나갔으면 좋겠다. 이스라엘은 600만 유대인 학살 조사 기관이자 자료 박물관으로 야드바셈을 운영하고 있다. 이런 기관이 증거자료를 확보하고 있으니 유대인 학살에 대한 반론이 나오기 어렵다. 이런 작업은 보수 정부에서 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이렇게까지 해서 굳이 한·일관계를 개선해야 하느냐’는 목소리도 있다.
“지난 30여 년간 북핵 문제에 초점을 맞춘 외교를 하다 보니, 세계가 얼마나 빠르게 변하고 있는지 잊은 것 같다. 우리가 놓인 외부 환경이 어려워졌다. 미국이 만들고 지탱해온 자유주의 국제질서하에서 우리는 산업화·민주화·국제화·정보화까지 달성했다. 그런데 그 자유주의 국제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중국은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수정주의 세력으로 변하고 있다. 중국 주도의 수직적 국제 질서를 원한다. 중국의 동아시아 내 위상은 곧 나머지 아시아 전체를 능가할 전망이다. 미국 역시 트럼프와 같은 지도자가 나타나며 신고립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다. 북한은 핵무장을 하고 선제공격을 위협하고 있다. 결국 평화와 번영을 지속하고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유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끼리 협력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한·일이 협력한다면 중국의 일탈을 견제하고 미국의 관여를 확보해 북한을 억지할 수 있다. 이는 우리의 생존 문제다.”
-바람직한 한·일관계는 어떤 것인가.
“세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첫째는 덧셈 외교를 해야 한다. 한·일은 얼마든지 윈윈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지 않나. 공동의 이익 역시 자유주의 질서 유지에 있다. 협력의 잠재력을 현실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는 축적의 외교를 해야 한다. 과거사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그동안 쌓은 것들을 부수고 또다시 쌓고 하는 것은 서로 끝없는 손해를 자초하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앞으로 나아가는 외교를 해야 한다. 시대가 바뀌었다. 초불확실성·초불안정성·초변동성이 지배하는 포스트 탈냉전 시대에 접어들었다. 여기에 다중위기까지 빈발하고 있다. 각자도생하며 혼자서 살 수 없는 시대다. 한·일은 앞으로 나아가는 외교에서 중요한 전략적 파트너가 될 수 있다. 내년은 한·일수교 60주년이다. 이순(耳順)을 맞는 한·일이 역지사지하면서 윈윈의 협력을 쌓아가는 새로운 60년을 열어가야 할 때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앞으로 나아가기도, 관계를 끊고 뒤로 물러서기도 어렵다.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한·일관계가 그렇다. 잊을 만하면 터져 나오는 일본발 ‘망언’은 전 국민을 분노케 하는 단골 소재다. 올 7월이면 결정될 사도광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시도도 마찬가지다. 멀어졌나 싶지만 현실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지난해 기준, 일본인 232만명이 한국을 찾았고, 한국인 696만명이 일본을 찾았다.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 수 1위가 일본인이고,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 수 1위가 한국인이다. 일반적으로 활발한 교류는 친밀도를 상징한다.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 지속하는 것은 정치의 책임이 크다. 한·일관계는 외교 문제라기보다 양국의 국내 정치 문제다. 보수라고 친일, 진보라고 반일도 아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오부치 당시 총리와 한·일 파트너십을 선언하며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자’고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12년 독도를 방문하며 반일에 불을 지폈다. 대통령이 임기 내에 일본과 관계개선을 시도했다가 반일로 돌아선 사례도 빈번하다. 대일 전략이 장기적 관점과 계획으로 추진되지 못하고 그때그때 흔들렸다는 의미다.
관계의 부침은 피로감을 만든다. ‘한국으로부터 늘 사과를 요구받는다’고 볼멘소리를 하는 일본뿐만이 아니다. 이제 한국에서도 ‘굳이 한·일관계를 개선해야 하느냐’는 목소리가 나온다. 엔저효과를 이용해 값싸게 여행은 가되, 서로 이해는 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는 여전히 일본과 풀어야 할 쟁점이 많다. 상호 이해를 못 하는데 문제를 풀 수 있을 리가 없다. 감정의 골만 깊어질 뿐이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를 지난 2월 26일 만났다. 신 전 대사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일본 전문가’다. 보수·진보 전문가 모두가 인터뷰를 추천한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에게 한·일 갈등의 시발점부터 해법까지를 물었다.
2010년 간 나오토 일본 총리의 담화에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했다는 것과 식민지배가 잘못됐다는 내용, 반성·사죄가 담겨 있다. 그런데 정작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피로증만 일으켜 사과를 번복하는 빌미를 줘선 안 된다.
-한·일 갈등의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과거사 문제가 지속해서 한·일관계의 진전을 가로막아 왔다. 지난 ‘잃어버린 10년’도 결국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강제동원 문제 때문에 발생했다. 일본과의 과거사는 정체성 문제이기 때문에 어렵다. 우리 근세사를 논할 때 일본의 한반도 진출과 식민통치 부분을 빼면 많은 부분이 공백으로 남는다. 문제는 일본과의 역사 인식 차이가 너무나 크다는 점이다. 우리는 일본의 식민통치가 불법·부당하다고 보는 반면 일본은 이를 합법·정당하다고 본다. 14년 교섭 끝에 1965년 한·일기본조약 및 4개의 부속 협정을 맺었지만 이때도 인식 차이는 좁혀지지 않고 외교적 타협을 통해 해결했다. 기본조약 제2조를 보면,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임을 확인한다’고 나온다. 이처럼 상호 충돌하는 표현이 들어간 것은 일본은 ‘이미’라는 말을 원했고, 우리는 ‘무효’라는 말을 원했기 때문이다. 이를 토대로 일본은 대한제국과 맺은 조약 및 협정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조약 또는 1965년 기본조약 이후 효력을 상실했다고 주장한다. 즉 그 이전 식민지배는 합법이란 것이다. 반면 우리는 처음부터 무효라는 입장이다. 이 문제는 국교 수립 당시 일본으로부터 받은 자금 8억달러(무상 3억달러·유상 2억달러·은행차관 3억달러)의 성격과도 연결된다. 불법 행위에 대한 배상이냐, 청구권 청산자금이냐의 문제다. 또 청구권 협정 제2조에 나오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문항 역시 개인청구권 소멸에 관한 인식을 두고 갈등을 만들고 있다.”
-역대 정부의 인식은 어떤가.
“적어도 2018년 강제동원 문제에 관한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에는 피해 보상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 정부의 입장이 같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청구권 협정으로 소멸됐다는 것이다. 1970년대와 2007년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신청을 받아 예산으로 보상했다. 2005년 민관합동위원회에서 검토하고 발표한 보고에서도 1965년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되지 않은 것은 일본군위안부, 원폭피해자, 재사할린 한인 문제로 특정했다. 하지만 국내 사정으로 정부부터 일관된 입장을 보이지 못했다.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초기 일본에 더 이상 과거사를 묻지 않겠다고 했다가 나중에 번복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국민과 피해자들부터 납득을 하지 못했다. 결국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됐다.”
-국민들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것 아닌가.
“일본에 관해서는 반일감정 때문인지, 객관적·균형적 교육이 잘 안 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한·일수교 이후 일본은 한국 경제에 자본과 기술 측면에서 많은 기여를 했다. 현대와 미쓰비시의 관계나 포스코와 신일본제철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지금 한국 내 대표 산업들은 과거 일본과의 협력에서 시작한 것이 많다. 그렇다면 이러한 부분은 일정한 기여를 했다고 인정해야 하는데 이런 부분에서 인색했던 것 같다. 유사한 사례는 또 있다. 1986년에 주일대사관 경제과장을 했다. 전두환 정부 초기 경제가 어려워지자 안보경협이란 논리로 일본에 협력을 요청했다. 우리가 북한 위협을 막아주니 일본이 경제협력을 해달라는 것이다. 그때 일본에 100억달러를 요구해 40억달러를 받았다. 이중 ODA(공적개발원조) 사업으로 서울시 하수종말 처리장 건설이 있었다. 당시 일본 외무성 담당과장이 일본에도 없는데 한국에 하수종말 처리장을 짓는다고 했다. 이런 사실을 우리 국민 중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일본의 과거사 사과 문제는 어떻게 보나.
“과거사에 대한 사과와 반성은 1983년 전두환 전 대통령 방일 때부터 30여 년에 걸쳐 천황 발언이나 총리 담화 형태로 나왔다.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2010년에는 간 나오토 일본 총리의 담화 형식으로 나왔다. 당시 정부가 많은 노력을 기울여 간 총리 담화를 끌어냈다. 정작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한 번 읽어보라. 구체적인 내용까지 들어가 잘 만들어졌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했다는 것과 식민지배가 잘못됐다는 내용이 그대로 나온다. 반성과 사죄가 담겨 있다. 과거사 문제에 접근하는 한국의 전략은 이제 변화가 필요하다. 더 이상 일본에 사과를 반복적으로 요구할 것은 아니다. 그보다 이미 여러 번의 사과를 통해 집적된 것을 잊지 말고, 번복하지 말라고 해야 한다. 감정적으로 ‘사과가 왜 이 수준밖에 안 돼’ 하는 것은 더 이상 일본과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는 것밖에 안 된다. 이러한 요구만 반복한 결과 일본에서 과거사 피로증이 생기고, 오히려 사과 수준도 후퇴하는 빌미를 줬다고 생각한다.”
-현실을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인가.
“우리가 과거를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이는 꼭 필요하다. 우리가 ‘왜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고’, ‘어떻게 해서 독립했는지’ 등을 스스로 성찰할 기회는 피해자 의식을 탈피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어 현재를 발전시켜야만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 일본이 과거에 어떤 나쁜 짓을 했는지 기억하되, 우리는 무엇 때문에 국권을 빼앗겼는지 객관적이고 균형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일본은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죄의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역사적 사실을 부정·왜곡하는 행위를 멈춰야 한다.”
-일본이 문제를 만드는 측면도 있지 않나. 올 7월 일본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 문제가 걸려 있다.
“사도광산 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취약해진 일본을 ‘강한 일본’으로 바꾸려는 일본 정치권의 역사수정주의 기조와도 연결된다. 일본 우파들은 메이지유신과 그 이후 근대화 과정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생각한다. 이를 일본 국민에게도 주입해 침체한 국내 분위기를 고조시키겠다는 의도가 있다. 경제산업성이 주도하는 근대산업문화유산의 유네스코 등재는 이러한 계획의 일환이다. 또한 침체한 지역을 강화하려는 자치단체들의 욕구도 작용한다. 다만 이런 기조에 일본 각 지방이 모두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같은 구역 내에 A지역이 세계유산이 될 경우 소외될 것을 염려하는 B지역이 있다. 이 문제는 일본 내에서도 그리 단순한 사안이 아니다.”
-정부 대응이 필요하지 않나.
“우리는 사실에 기반해서 다퉈야 한다. 사도광산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만한 것은 아니라고 하거나 일본이 추진하고 있는 1910년 이전 역사만 잘라서 등재할 수는 없다고 다퉈볼 수 있다. 궁극적으로 군함도처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더라도 강제동원 역사를 넣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군함도 관련해서는 일본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는데 우리가 일본을 국제 사회에서 약속 위반으로 몰아갈 수 있다는 유리한 측면이 있다. 통상적으로 유네스코는 분쟁이 있는 후보지는 당사국 간 합의를 우선하라고 한다. 유네스코 논의 과정에서 일본의 군함도 관련 합의 위반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특히 식민지 문제에 관심이 많은 글로벌 사우스(제3세계 혹은 개발도상국)의 협력을 얻는 방안을 추진해볼 수도 있다. 국제사회 분위기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협상의 유불리가 결정되므로 외교적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선 사실관계에 대한 자료나 연구가 필요한 것 아닌가.
“안타깝지만 부실하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증언도 얼마나 확보했는지 모르겠다. 일본의 사과를 외치기만 했지 먼지 쌓인 문서고로 달려가 그 당시 자료를 찾고 역사적 사실을 연구했는지 돌아봐야 한다. 없는 것도 만들어서 대비해야 하는데 그나마 있던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도 없애지 않았나. 역사를 놓고 다투려면 기본적으로 사료를 찾아 사실을 규명하고, 그것에 따른 역사서술을 해야 비로소 설득력을 갖게 된다. 동북아역사재단 외에 한·일과거사 관련 연구와 희생자 추모 기능을 겸한 기관을 만들어 연구·교육·추모 작업을 중장기적으로 실행해 나갔으면 좋겠다. 이스라엘은 600만 유대인 학살 조사 기관이자 자료 박물관으로 야드바셈을 운영하고 있다. 이런 기관이 증거자료를 확보하고 있으니 유대인 학살에 대한 반론이 나오기 어렵다. 이런 작업은 보수 정부에서 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이렇게까지 해서 굳이 한·일관계를 개선해야 하느냐’는 목소리도 있다.
“지난 30여 년간 북핵 문제에 초점을 맞춘 외교를 하다 보니, 세계가 얼마나 빠르게 변하고 있는지 잊은 것 같다. 우리가 놓인 외부 환경이 어려워졌다. 미국이 만들고 지탱해온 자유주의 국제질서하에서 우리는 산업화·민주화·국제화·정보화까지 달성했다. 그런데 그 자유주의 국제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중국은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수정주의 세력으로 변하고 있다. 중국 주도의 수직적 국제 질서를 원한다. 중국의 동아시아 내 위상은 곧 나머지 아시아 전체를 능가할 전망이다. 미국 역시 트럼프와 같은 지도자가 나타나며 신고립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다. 북한은 핵무장을 하고 선제공격을 위협하고 있다. 결국 평화와 번영을 지속하고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유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끼리 협력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한·일이 협력한다면 중국의 일탈을 견제하고 미국의 관여를 확보해 북한을 억지할 수 있다. 이는 우리의 생존 문제다.”
-바람직한 한·일관계는 어떤 것인가.
“세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첫째는 덧셈 외교를 해야 한다. 한·일은 얼마든지 윈윈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지 않나. 공동의 이익 역시 자유주의 질서 유지에 있다. 협력의 잠재력을 현실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는 축적의 외교를 해야 한다. 과거사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그동안 쌓은 것들을 부수고 또다시 쌓고 하는 것은 서로 끝없는 손해를 자초하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앞으로 나아가는 외교를 해야 한다. 시대가 바뀌었다. 초불확실성·초불안정성·초변동성이 지배하는 포스트 탈냉전 시대에 접어들었다. 여기에 다중위기까지 빈발하고 있다. 각자도생하며 혼자서 살 수 없는 시대다. 한·일은 앞으로 나아가는 외교에서 중요한 전략적 파트너가 될 수 있다. 내년은 한·일수교 60주년이다. 이순(耳順)을 맞는 한·일이 역지사지하면서 윈윈의 협력을 쌓아가는 새로운 60년을 열어가야 할 때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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