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찾지 못한 절반의 이름…‘사도’에 또 묻고 갈텐가
2024. 3. 4. 06:00
일본 사도광산 강제동원 조선인 1519명 중 747명 명단 확인
‘747명 그리고 772명’. 이름이라도 ‘찾은 자’와 이름조차 모른 채 ‘남겨진 자’의 숫자다. 모두 1519명의 ‘사람’들은 1939년 2월부터 1945년 7월까지 충남, 충북, 전남, 전북, 강원, 경기 등의 고향을 떠나 ‘강제’로 배를 타야만 했다. 목적지는 이름조차 낯선 일본 니가타현의 작은 섬. 일본에서는 헤이안 시대 말부터 사금 산지로 명성을 떨쳤던 곳. 당시도 지금도 사람들은 이곳을 ‘사도’라고 불렀다.
섬에 도착한 사람들이 향한 곳은 광산이었다. 전범기업 미쓰비시광업(주)의 작업장이 그곳에 있었다. 낯선 곳으로 끌려온 이들은 익숙지도 않은 광부일을 해야 했다. 갱을 파고 금 등의 광석을 채굴하는 일이었다. 많은 이들이 죽었다. 진폐증이 대표적 사유다. 채굴 과정에서 ‘폭파’라는 일본말을 알아듣지 못해 사망하는 때도 비일비재했다. 운이 좋아 섬에서 탈출했거나 해방 이후 살아 돌아와도 탄광 생활의 흔적은 악착같이 따라붙었다. 후유증으로 가족들 앞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 광산 강제동원은 끝끝내 이들의 삶을 파괴했다. 사도는 결코 아름답거나 추억할 만한 공간이 될 수 없는 곳이었다.
‘사람’이 몇 명이나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간은 흘렀다. 한일 간의 건설적인 미래를 명분으로 아물지도 않은 상처는 덮였다. 비극도 잊히는 듯했다. 그런데 이 기억이 해방 반세기가 훌쩍 넘은 어느 날 갑자기 다시 떠올랐다. ‘아름다운 일본’, ‘세계인들이 함께 지켜야 할 근대산업유산’의 상징으로 ‘사도’가 재등장했다.
강제동원 사실과 관련한 일본의 태도는 한결같다. “사실을 입증할 문서, 명단이 있으면 내놓아 보라”는 것이다. 자발적 참여로 왜곡하거나 동원 인원을 축소하려는 목적이다. 나라가 없던 조선사람들이 공적 문서를 만들 수는 없다. 사도 역시 마찬가지다. 공식적으로 조선인 동원 인원수나 명단을 밝힌 자료는 없다. 당시 사도에서 작업장을 운영한 미쓰비시광업(주)과 사도광업소는 온전한 자료를 남기지 않았다. 그나마 미쓰비시광업(주)이 출간하려 했던 책의 미완성 원고, 이른바 <사도광산사 고본> 845쪽에 ‘합계 1519명을 이입했다’는 문장이 남아있다. ‘이입’은 일제가 조선 사람을 동원할 때 사용한 용어다.
해당 사실을 통해 두 가지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사도광산에 최소 1519명의 조선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명확한 숫자가 기재된 만큼 이들의 신상을 확인하는 작업도 했을 것이란 추론이다. 그렇다면, 이를 기록한 자료가 어딘가 남아 있을 수 있다. 현재까지 일본 정부나 미쓰비시는 사도와 관련한 자료는 비공개 처리하거나 존재 자체를 언급하지 않는다. 결국, 이들이 누구인지는 파편화된 증언, 흩어진 기록을 그러모아 합치고, 대조해 밝혀내는 수밖에 없다. 이는 식민 수탈이라는 불행한 역사를 딛고 성립한 국가라면 반드시 책임지고 수행했어야 할 일이기도 하다.
국가를 대신해 이 일을 한 것은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연구위원이다. 사도와 관련해 공개된 모든 자료를 그러모아 일일이 이름을 찾았다. 그렇게 이름 일부라도 밝혀낸 사람이 747명이다. 이름은 존재에 대한 증명이다. 막연히 숫자로 표현되는 것이 아닌 이들이 누군가의 아들, 형제, 남편, 아버지였음을 보여준다. 피해자 김종운, 피해자 남상옥, 피해자 도치경, 피해자 류지달, 피해자 문수병, 피해자 이청길 등이 일본이 그토록 내놓아보라고 말한 피해자들의 이름이다.
그리고 최소 772명이 남았다. 이름도 나이도 고향도, 왜 죽었고 어디에 묻혔는지조차 모른다. 가족이 한국에 생존해 있더라도 이들이 사도광산 강제동원 피해자임을 여태껏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광복 후 한국 정부가 시행한 강제동원 피해 조사에서조차 이들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았다. 즉, 일본으로 강제동원 돼 현지에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밝혀낸 747명의 이름은 현재까지 공개된 모든 자료를 참고한 결과다. 이제 나머지 빈 공간을 채워야 할 것은 비공개 자료를 소장한 일본 정부와 이들을 관리했을 전범기업 미쓰비시다. 반일, 친일, 과거사, 미래 등 정치적 수사로 뒤범벅된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잊지 말아야 한다. 일제가 강제로 끌고 가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린 것은 기계나 동물이 아닌 ‘사람’이다.
정 위원은 2004년부터 2015년 12월 31일까지 존재한 ‘국무총리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 지원위원회(이하 위원회)’의 조사과장을 지냈다.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조사, 연구, 대응 등을 모두 경험한 전문가다.
정 위원이 제작한 명부에는 피해자의 이름, 생년월일, 본적 등의 기본사항이 기재돼 있다. 정 위원은 이를 한국 측 자료, 일본 측 자료로 나눠서 교차 검증했다. 한국 측 자료로 참고한 것은 ‘대일민간청구권결정대장’, ‘일정시피징용징병자명부’, ‘왜정시피징용자명부’, ‘위원회 피해조사 명부’다.
대일민간청구권결정대장은 ‘청구권자금의 운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1971년 5월 21일부터 1972년 3월 20일까지 신고를 받아 보상금을 지급한 자료다. 이 자료에는 신고인의 인적 사항만 적혀 있어 피해자의 이름과 피해 내용을 알 수 없다. 그런데 국가기록원이 소장한 별도의 대일민간청구권 신고자 명부에는 신고자와 피해자의 이름이 함께 적혀 있었다. 정 위원은 두 곳 모두에서 공통으로 나오는 신고자 7930명을 1차로 추렸다. 이렇게 확보한 7930명의 피해자 명단을 일본에서 나온 사도광산 관련 명단과 다시 비교했다. 그 결과 사도광산에서 사망한 8명의 이름을 찾았다.
다른 자료를 검증하는 방법 역시 유사했다. 일정시피징용징병자명부에는 총 22만8724명이 수록돼 있다. 1953년 열린 제2차 한일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당시 정부가 전국 단위로 조사하고 도별로 취합한 강제동원 피해자 명부다. 이 명부에서 사도광산 피해자 19명을 찾았다. 왜정시피징용자명부에는 총 28만5771명이 수록돼 있다. 1958년 열린 제4차 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제작됐다. 당시 노동청이 전국 단위로 신고를 받아 도별로 취합했다. 총 57명의 사도광산 피해자를 찾을 수 있었다.
가장 많은 피해자가 발견된 것은 위원회가 조사해 작성한 피해조사 명부다. 2005년 2월부터 15개월간 신고받은 21만8639건을 분석했다. 먼저 피해조사 의결서에 ‘사도광산’을 적시한 경우를 추려서 피해자를 확정했다. 또 사도광산이 위치했던 ‘니가타현’을 적은 경우를 추려내고, 작업장의 상세 주소를 확인해 사도광산 피해자인지 확인했다. 주소가 나와 있지 않은 때도 있었다. 이때는 그와 함께 강제동원 된 동행자 정보를 찾아서 사도광산 피해자인지 최종 판단했다. 피해자 명부를 보면 근거자료 항목 중 피해조사(동역자)라고 적힌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동행자를 통해 확인한 피해자다. 그 결과 위원회 명부에서는 총 224명의 사도광산 피해자 이름(동역자 포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 측 자료는 피해자 신고, 조사 등을 취합해 만들었다. 그나마 확인이 쉬운 편이다. 일본 측 자료는 애초에 이런 형태가 아니다. 파편화된 자료를 하나하나 확인해야 한다. 명단을 작성하기 위해 참고한 근거 자료만 총 15개다. 이 중 가장 많은 피해자가 확인된 것은 ‘조선인연초배급명부’다. 당시 사도광산에 끌려간 피해자들에게 회사는 담배를 지급했다. 담배는 노동의 고통을 잊게 하는 수단으로 어린아이에게도 지급했다. 이마저도 총 세 가지 버전으로 나뉘어 있다. 모두 확인해 최종적으로 495명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머지 자료도 유사한 검증 과정을 거쳤다.
한·일 양국 정부가 만들거나 소장한 것이 아닌 자료는 ‘기타 근거 자료’로 분류했다. 예컨대, 일본시민단체의 현지조사 자료도 있고 1943년 당시 일본 언론의 보도 등도 포함된다. 그 결과, 사도광산 피해자로 확정한 747명 대부분은 두 개 이상 문서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명부를 통해 사도광산에 동원된 피해자들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우선, 나이다. 문서 중 일부에 피해자의 당시 연령이 표기돼 있어 확인이 가능했다. 이는 강제동원된 시점이 문서 속에 표기된 나이 보다 이를 수는 있어도 더 늦을 수는 없다는 의미다. 14세부터 40세까지 있다. 충남에서 강제동원 된 1924년생 이병기는 고작 18살에 현지에서 사망했다.
일부 학자들은 사도광산 노동자들은 동원이 아닌 자발적 지원으로 모였고, 대우도 좋았다는 주장을 한다. 심지어 한국에서도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명부 특기사항을 보면 ‘탈출’ 항목이 있다. 1943년 6월, 사도광업소가 작성한 보고서에 현장에서 탈출한 조선인 통계가 있었다. 1942년 3월 기준, 동원한 1005명 중 148명이 탈출했다는 내용이다. 사도광산은 섬이다. 사실상 도망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전체 동원자 중 14.7%가 목숨 건 탈출을 시도했다. 실제 탈출에 성공했던 사도광산 피해자 임태호씨는 “작업 상황이 열악하고, 위험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죽음을 맞닥뜨리는 일이었으므로 하루하루가 공포 그 자체였다”는 증언을 남겼다. 광업소 측은 이런 상황을 두고 ‘자유방종적이고 부화뇌동하는 조선인의 민족성 탓’이라고 했다.
광복 후 이들이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회사는 값싸게 부리던 숙련공이 빠져나가 광산이 타격을 입을 것을 우려했다. 조선인들에게 일을 강요했으나 응하지 않자 밥을 주지 않았다. 일본 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강제동원할 때는 계획적으로 수송했지만 귀환은 책임을 지지 않으려 했다. 1945년 9월 1일에야 <조선인집단이입노무자 등의 긴급조치에 관한 것>이라는 지시 문서를 내려보냈는데 ‘귀환하라’는 원칙만 있을 뿐 언제, 몇 명을, 어떻게 수송하란 내용이 전혀 없었다. 구체적인 계획은 같은해 9월 12일에야 나온다. 피해자들이 자비를 들여 배를 구해 나오는 경우도 많았다. 이들이 얼마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명부에도 한계는 있다. 한국식 이름 세 글자가 모두 확인된 경우는 747명 중 584명이다. 나머지는 문서에는 있지만 이름을 적은 부분이 흐릿하거나 훼손돼 식별이 불가능하다. 이들 163명 중 2명은 창씨와 생년월일 등은 확인 가능하나 한국 이름을 알 수 없다. 그 외에는 이름의 한 자, 혹은 두 자만 식별 가능했다. 또 일본식 창씨를 다시 한국식 이름으로 재번역하는 과정에서 정확한 이름을 알 수 없게 된 사례가 있다. 이럴 때는 가능한 이름 모두를 표기했다. 불완전하다. 하지만 이름 일부라도 찾을 수 있었다면 상황이 나은 편이다. 나머지 772명은 존재 자체를 알 수가 없다. 일본이 모든 자료를 공개하고, 협력하지 않는 이상 현 단계에서 이들을 찾아낼 방법이 없다.
강제로 고향을 떠난 이들의 이름조차 돌아오지 못하는 곳이 ‘사도’다. 그럼에도 일본은 이곳을 전 세계인들이 함께 추억하고, 지켜야 할 세계유산으로 추천했다. 이들은 사도를 강제동원도 이름조차 돌아오지 못한 772명의 사람들도 없는 곳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일본은 근대화 흔적을 간직한 곳들을 몇 개의 유산군으로 묶어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고 있다. 시작은 ‘메이지산업유산’이다. 명칭부터 의도가 있었다. 메이지는 일왕 무쓰히토의 연호다. 자연스럽게 메이지 시대라고 하면 기간이 한정된다. 1867년부터 1912년까지다. 1938년부터 시작한 강제동원 역사가 자연스럽게 빠진다. 결국, 2015년 세계유산 등재에 성공했다. 하시마섬, 이른바 군함도가 그 대표적 사례다. 일본은 주변국의 반발을 의식해 군함도 강제동원 역사를 소개하겠다고 했다. 이 약속은 지금까지 지켜지지 않았다.
일본이 다음 목표로 설정한 것은 사도섬 내에 있는 광산 유적의 세계유산 등재다. 군함도처럼 기간을 에도시대(1603년~1868년)로 한정하고, 사도섬만의 금 제련 기술을 강조해 이미 2023년 세계유산위원회에 신청서를 제출했다.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 여부는 올해 7월 인도 뉴델리에서 결정된다. 세계유산위원회가 회의를 열고, 합의하는 방식이다. 세계유산위에는 2024년 기준 총 21개국의 위원국이 있다. 한국은 2027년까지를 임기로 지난해 위원국이 됐다. 일본 역시 2025년까지 위원국이다. 각국 대표가 전문가가 아닌 만큼 세계유산위는 자문기구를 별도로 둔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이코모스)다. 이코모스는 올해 5~6월 사도의 세계유산 등재 여부에 대한 의견을 최종 권고할 예정이다. 산업유산 전문가인 부산 경성대 강동진 교수는 “이코모스의 권고는 전문가들의 결정인 만큼 그대로 반영되는 경우가 많다”며 “어떻게든 이 권고에 ‘강제동원을 포함한 사도섬 전체 역사(Full-History)를 밝히라’는 내용이 들어갈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사도광산 문제는 외교부 공공문화외교국 유네스코과가 담당한다. 외교부 관계자는 “다양한 외교채널로 노력하고 있지만 이코모스 쪽과의 접촉 등 구체적 전략은 밝힐 수 없다”며 “우리 정부 입장은 강제동원을 포함한 전체 역사가 반영돼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해당 논리대로라면 적어도 사도광산에 강제동원된 조선인 규모, 노동실태, 피해 사실 등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이코모스나 위원국들에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해 묻자 외교부 관계자는 이번에는 “세계유산위는 유산과 관련된 이야기나 사회적 가치 등을 보지 역사 판정자는 아니다”고 말했다.
최소한 요구를 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원하는 바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 이대로면 설사 일본이 사도광산 강제동원 역사를 반영한다고 해도 정부가 내용을 검증할 수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일본이 군함도 강제동원 역사와 관련한 합의를 왜 무시하고 있는지 정부 스스로 돌아볼 때다. 사도광산이 세계유산이 된다면 적어도 확인한 747명과 돌아오지 못한 772명의 이름까지 반드시 밝혀서 새겨져야 한다.
사도광산 강제동원 피해자 747명 명부는 아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도광산 강제동원 피해자 명부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747명 그리고 772명’. 이름이라도 ‘찾은 자’와 이름조차 모른 채 ‘남겨진 자’의 숫자다. 모두 1519명의 ‘사람’들은 1939년 2월부터 1945년 7월까지 충남, 충북, 전남, 전북, 강원, 경기 등의 고향을 떠나 ‘강제’로 배를 타야만 했다. 목적지는 이름조차 낯선 일본 니가타현의 작은 섬. 일본에서는 헤이안 시대 말부터 사금 산지로 명성을 떨쳤던 곳. 당시도 지금도 사람들은 이곳을 ‘사도’라고 불렀다.
섬에 도착한 사람들이 향한 곳은 광산이었다. 전범기업 미쓰비시광업(주)의 작업장이 그곳에 있었다. 낯선 곳으로 끌려온 이들은 익숙지도 않은 광부일을 해야 했다. 갱을 파고 금 등의 광석을 채굴하는 일이었다. 많은 이들이 죽었다. 진폐증이 대표적 사유다. 채굴 과정에서 ‘폭파’라는 일본말을 알아듣지 못해 사망하는 때도 비일비재했다. 운이 좋아 섬에서 탈출했거나 해방 이후 살아 돌아와도 탄광 생활의 흔적은 악착같이 따라붙었다. 후유증으로 가족들 앞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 광산 강제동원은 끝끝내 이들의 삶을 파괴했다. 사도는 결코 아름답거나 추억할 만한 공간이 될 수 없는 곳이었다.
‘사람’이 몇 명이나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간은 흘렀다. 한일 간의 건설적인 미래를 명분으로 아물지도 않은 상처는 덮였다. 비극도 잊히는 듯했다. 그런데 이 기억이 해방 반세기가 훌쩍 넘은 어느 날 갑자기 다시 떠올랐다. ‘아름다운 일본’, ‘세계인들이 함께 지켜야 할 근대산업유산’의 상징으로 ‘사도’가 재등장했다.
강제동원 사실과 관련한 일본의 태도는 한결같다. “사실을 입증할 문서, 명단이 있으면 내놓아 보라”는 것이다. 자발적 참여로 왜곡하거나 동원 인원을 축소하려는 목적이다. 나라가 없던 조선사람들이 공적 문서를 만들 수는 없다. 사도 역시 마찬가지다. 공식적으로 조선인 동원 인원수나 명단을 밝힌 자료는 없다. 당시 사도에서 작업장을 운영한 미쓰비시광업(주)과 사도광업소는 온전한 자료를 남기지 않았다. 그나마 미쓰비시광업(주)이 출간하려 했던 책의 미완성 원고, 이른바 <사도광산사 고본> 845쪽에 ‘합계 1519명을 이입했다’는 문장이 남아있다. ‘이입’은 일제가 조선 사람을 동원할 때 사용한 용어다.
해당 사실을 통해 두 가지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사도광산에 최소 1519명의 조선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명확한 숫자가 기재된 만큼 이들의 신상을 확인하는 작업도 했을 것이란 추론이다. 그렇다면, 이를 기록한 자료가 어딘가 남아 있을 수 있다. 현재까지 일본 정부나 미쓰비시는 사도와 관련한 자료는 비공개 처리하거나 존재 자체를 언급하지 않는다. 결국, 이들이 누구인지는 파편화된 증언, 흩어진 기록을 그러모아 합치고, 대조해 밝혀내는 수밖에 없다. 이는 식민 수탈이라는 불행한 역사를 딛고 성립한 국가라면 반드시 책임지고 수행했어야 할 일이기도 하다.
국가를 대신해 이 일을 한 것은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연구위원이다. 사도와 관련해 공개된 모든 자료를 그러모아 일일이 이름을 찾았다. 그렇게 이름 일부라도 밝혀낸 사람이 747명이다. 이름은 존재에 대한 증명이다. 막연히 숫자로 표현되는 것이 아닌 이들이 누군가의 아들, 형제, 남편, 아버지였음을 보여준다. 피해자 김종운, 피해자 남상옥, 피해자 도치경, 피해자 류지달, 피해자 문수병, 피해자 이청길 등이 일본이 그토록 내놓아보라고 말한 피해자들의 이름이다.
그리고 최소 772명이 남았다. 이름도 나이도 고향도, 왜 죽었고 어디에 묻혔는지조차 모른다. 가족이 한국에 생존해 있더라도 이들이 사도광산 강제동원 피해자임을 여태껏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광복 후 한국 정부가 시행한 강제동원 피해 조사에서조차 이들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았다. 즉, 일본으로 강제동원 돼 현지에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밝혀낸 747명의 이름은 현재까지 공개된 모든 자료를 참고한 결과다. 이제 나머지 빈 공간을 채워야 할 것은 비공개 자료를 소장한 일본 정부와 이들을 관리했을 전범기업 미쓰비시다. 반일, 친일, 과거사, 미래 등 정치적 수사로 뒤범벅된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잊지 말아야 한다. 일제가 강제로 끌고 가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린 것은 기계나 동물이 아닌 ‘사람’이다.
검증
정 위원은 2004년부터 2015년 12월 31일까지 존재한 ‘국무총리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 지원위원회(이하 위원회)’의 조사과장을 지냈다.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조사, 연구, 대응 등을 모두 경험한 전문가다.
정 위원이 제작한 명부에는 피해자의 이름, 생년월일, 본적 등의 기본사항이 기재돼 있다. 정 위원은 이를 한국 측 자료, 일본 측 자료로 나눠서 교차 검증했다. 한국 측 자료로 참고한 것은 ‘대일민간청구권결정대장’, ‘일정시피징용징병자명부’, ‘왜정시피징용자명부’, ‘위원회 피해조사 명부’다.
대일민간청구권결정대장은 ‘청구권자금의 운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1971년 5월 21일부터 1972년 3월 20일까지 신고를 받아 보상금을 지급한 자료다. 이 자료에는 신고인의 인적 사항만 적혀 있어 피해자의 이름과 피해 내용을 알 수 없다. 그런데 국가기록원이 소장한 별도의 대일민간청구권 신고자 명부에는 신고자와 피해자의 이름이 함께 적혀 있었다. 정 위원은 두 곳 모두에서 공통으로 나오는 신고자 7930명을 1차로 추렸다. 이렇게 확보한 7930명의 피해자 명단을 일본에서 나온 사도광산 관련 명단과 다시 비교했다. 그 결과 사도광산에서 사망한 8명의 이름을 찾았다.
다른 자료를 검증하는 방법 역시 유사했다. 일정시피징용징병자명부에는 총 22만8724명이 수록돼 있다. 1953년 열린 제2차 한일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당시 정부가 전국 단위로 조사하고 도별로 취합한 강제동원 피해자 명부다. 이 명부에서 사도광산 피해자 19명을 찾았다. 왜정시피징용자명부에는 총 28만5771명이 수록돼 있다. 1958년 열린 제4차 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제작됐다. 당시 노동청이 전국 단위로 신고를 받아 도별로 취합했다. 총 57명의 사도광산 피해자를 찾을 수 있었다.
가장 많은 피해자가 발견된 것은 위원회가 조사해 작성한 피해조사 명부다. 2005년 2월부터 15개월간 신고받은 21만8639건을 분석했다. 먼저 피해조사 의결서에 ‘사도광산’을 적시한 경우를 추려서 피해자를 확정했다. 또 사도광산이 위치했던 ‘니가타현’을 적은 경우를 추려내고, 작업장의 상세 주소를 확인해 사도광산 피해자인지 확인했다. 주소가 나와 있지 않은 때도 있었다. 이때는 그와 함께 강제동원 된 동행자 정보를 찾아서 사도광산 피해자인지 최종 판단했다. 피해자 명부를 보면 근거자료 항목 중 피해조사(동역자)라고 적힌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동행자를 통해 확인한 피해자다. 그 결과 위원회 명부에서는 총 224명의 사도광산 피해자 이름(동역자 포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 측 자료는 피해자 신고, 조사 등을 취합해 만들었다. 그나마 확인이 쉬운 편이다. 일본 측 자료는 애초에 이런 형태가 아니다. 파편화된 자료를 하나하나 확인해야 한다. 명단을 작성하기 위해 참고한 근거 자료만 총 15개다. 이 중 가장 많은 피해자가 확인된 것은 ‘조선인연초배급명부’다. 당시 사도광산에 끌려간 피해자들에게 회사는 담배를 지급했다. 담배는 노동의 고통을 잊게 하는 수단으로 어린아이에게도 지급했다. 이마저도 총 세 가지 버전으로 나뉘어 있다. 모두 확인해 최종적으로 495명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머지 자료도 유사한 검증 과정을 거쳤다.
한·일 양국 정부가 만들거나 소장한 것이 아닌 자료는 ‘기타 근거 자료’로 분류했다. 예컨대, 일본시민단체의 현지조사 자료도 있고 1943년 당시 일본 언론의 보도 등도 포함된다. 그 결과, 사도광산 피해자로 확정한 747명 대부분은 두 개 이상 문서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정체
명부를 통해 사도광산에 동원된 피해자들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우선, 나이다. 문서 중 일부에 피해자의 당시 연령이 표기돼 있어 확인이 가능했다. 이는 강제동원된 시점이 문서 속에 표기된 나이 보다 이를 수는 있어도 더 늦을 수는 없다는 의미다. 14세부터 40세까지 있다. 충남에서 강제동원 된 1924년생 이병기는 고작 18살에 현지에서 사망했다.
일부 학자들은 사도광산 노동자들은 동원이 아닌 자발적 지원으로 모였고, 대우도 좋았다는 주장을 한다. 심지어 한국에서도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명부 특기사항을 보면 ‘탈출’ 항목이 있다. 1943년 6월, 사도광업소가 작성한 보고서에 현장에서 탈출한 조선인 통계가 있었다. 1942년 3월 기준, 동원한 1005명 중 148명이 탈출했다는 내용이다. 사도광산은 섬이다. 사실상 도망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전체 동원자 중 14.7%가 목숨 건 탈출을 시도했다. 실제 탈출에 성공했던 사도광산 피해자 임태호씨는 “작업 상황이 열악하고, 위험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죽음을 맞닥뜨리는 일이었으므로 하루하루가 공포 그 자체였다”는 증언을 남겼다. 광업소 측은 이런 상황을 두고 ‘자유방종적이고 부화뇌동하는 조선인의 민족성 탓’이라고 했다.
광복 후 이들이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회사는 값싸게 부리던 숙련공이 빠져나가 광산이 타격을 입을 것을 우려했다. 조선인들에게 일을 강요했으나 응하지 않자 밥을 주지 않았다. 일본 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강제동원할 때는 계획적으로 수송했지만 귀환은 책임을 지지 않으려 했다. 1945년 9월 1일에야 <조선인집단이입노무자 등의 긴급조치에 관한 것>이라는 지시 문서를 내려보냈는데 ‘귀환하라’는 원칙만 있을 뿐 언제, 몇 명을, 어떻게 수송하란 내용이 전혀 없었다. 구체적인 계획은 같은해 9월 12일에야 나온다. 피해자들이 자비를 들여 배를 구해 나오는 경우도 많았다. 이들이 얼마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명부에도 한계는 있다. 한국식 이름 세 글자가 모두 확인된 경우는 747명 중 584명이다. 나머지는 문서에는 있지만 이름을 적은 부분이 흐릿하거나 훼손돼 식별이 불가능하다. 이들 163명 중 2명은 창씨와 생년월일 등은 확인 가능하나 한국 이름을 알 수 없다. 그 외에는 이름의 한 자, 혹은 두 자만 식별 가능했다. 또 일본식 창씨를 다시 한국식 이름으로 재번역하는 과정에서 정확한 이름을 알 수 없게 된 사례가 있다. 이럴 때는 가능한 이름 모두를 표기했다. 불완전하다. 하지만 이름 일부라도 찾을 수 있었다면 상황이 나은 편이다. 나머지 772명은 존재 자체를 알 수가 없다. 일본이 모든 자료를 공개하고, 협력하지 않는 이상 현 단계에서 이들을 찾아낼 방법이 없다.
강제로 고향을 떠난 이들의 이름조차 돌아오지 못하는 곳이 ‘사도’다. 그럼에도 일본은 이곳을 전 세계인들이 함께 추억하고, 지켜야 할 세계유산으로 추천했다. 이들은 사도를 강제동원도 이름조차 돌아오지 못한 772명의 사람들도 없는 곳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미래
일본은 근대화 흔적을 간직한 곳들을 몇 개의 유산군으로 묶어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고 있다. 시작은 ‘메이지산업유산’이다. 명칭부터 의도가 있었다. 메이지는 일왕 무쓰히토의 연호다. 자연스럽게 메이지 시대라고 하면 기간이 한정된다. 1867년부터 1912년까지다. 1938년부터 시작한 강제동원 역사가 자연스럽게 빠진다. 결국, 2015년 세계유산 등재에 성공했다. 하시마섬, 이른바 군함도가 그 대표적 사례다. 일본은 주변국의 반발을 의식해 군함도 강제동원 역사를 소개하겠다고 했다. 이 약속은 지금까지 지켜지지 않았다.
일본이 다음 목표로 설정한 것은 사도섬 내에 있는 광산 유적의 세계유산 등재다. 군함도처럼 기간을 에도시대(1603년~1868년)로 한정하고, 사도섬만의 금 제련 기술을 강조해 이미 2023년 세계유산위원회에 신청서를 제출했다.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 여부는 올해 7월 인도 뉴델리에서 결정된다. 세계유산위원회가 회의를 열고, 합의하는 방식이다. 세계유산위에는 2024년 기준 총 21개국의 위원국이 있다. 한국은 2027년까지를 임기로 지난해 위원국이 됐다. 일본 역시 2025년까지 위원국이다. 각국 대표가 전문가가 아닌 만큼 세계유산위는 자문기구를 별도로 둔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이코모스)다. 이코모스는 올해 5~6월 사도의 세계유산 등재 여부에 대한 의견을 최종 권고할 예정이다. 산업유산 전문가인 부산 경성대 강동진 교수는 “이코모스의 권고는 전문가들의 결정인 만큼 그대로 반영되는 경우가 많다”며 “어떻게든 이 권고에 ‘강제동원을 포함한 사도섬 전체 역사(Full-History)를 밝히라’는 내용이 들어갈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사도광산 문제는 외교부 공공문화외교국 유네스코과가 담당한다. 외교부 관계자는 “다양한 외교채널로 노력하고 있지만 이코모스 쪽과의 접촉 등 구체적 전략은 밝힐 수 없다”며 “우리 정부 입장은 강제동원을 포함한 전체 역사가 반영돼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해당 논리대로라면 적어도 사도광산에 강제동원된 조선인 규모, 노동실태, 피해 사실 등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이코모스나 위원국들에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해 묻자 외교부 관계자는 이번에는 “세계유산위는 유산과 관련된 이야기나 사회적 가치 등을 보지 역사 판정자는 아니다”고 말했다.
최소한 요구를 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원하는 바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 이대로면 설사 일본이 사도광산 강제동원 역사를 반영한다고 해도 정부가 내용을 검증할 수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일본이 군함도 강제동원 역사와 관련한 합의를 왜 무시하고 있는지 정부 스스로 돌아볼 때다. 사도광산이 세계유산이 된다면 적어도 확인한 747명과 돌아오지 못한 772명의 이름까지 반드시 밝혀서 새겨져야 한다.
사도광산 강제동원 피해자 747명 명부는 아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도광산 강제동원 피해자 명부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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