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 “대북 협상은 내 외교인생의 하이라이트… 최선희는 정말 터프했다”

김윤덕 기자 입력 2024. 3. 4. 03:04 수정 2024. 3. 4.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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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덕이 만난 사람] 성 김 전 주한 미국 대사
2024년 2월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법무법인 태평양에서 조선일보와 인터뷰하는 성 김 전 주한미국대사. 미 국무부를 은퇴하고 모국에 돌아온 그는 "서울 거리를 걸으며 보는 모든 것이 좋다"며 웃었다. 유머와 위트가 넘쳤지만, 북한 문제에 관해서는 신중을 기했다. / 장련성 기자

긴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듯, 성 김 전 대사는 편안해 보였다. 34년 외교관 생활의 대부분을 치열했던 북핵 협상에 헌신한 그였다. 두 달 전 미 국무부에서 은퇴한 뒤 서울로 온 그는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으로 인생 2막을 열었다. 거대한 고래 사진이 걸린 회의실에서 성 김을 만났다. 열 살 때 한국을 떠났지만 그의 모국어는 완벽에 가까웠다. 유머와 위트가 넘쳤다.

◇敵을 두지 않는다

-모국에 돌아온 감회가 어떠신지.

“13년 전 주한 미국 대사로 왔을 때와는 또 다르다. ‘You Can’t Go Home Again’은 토머스 울프의 유명한 책인데, 세월이 지나면 자신도 변하고 고향도 변하기 때문에 어릴 적 고향엔 돌아갈 수 없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보통 시민이 되어 한국에 오니 진짜 고향에 온 느낌이다. 내겐 ‘You Can Go Home Again’이 됐다(웃음).”

-그 사이 서울도 많이 변했을 텐데.

“2011년 주한 미국 대사로 선서식을 할 때 나도 울고 청중도 울었다.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슬펐지만, 나이 드신 교민들은 자식 세대가 자라 미국 대사를 하게 됐다는 보람, 그리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우신 것 같다. 그분들 마음을 이제 알 것 같다.”

-서울에 오니 뭐가 제일 좋은가.

“옛 친구들 만나고, 내가 좋아하는 한국 음식을 늘 먹을 수 있어서 좋다. 길을 걸으며 보는 모든 것들이 좋다.”

-왜 워싱턴을 떠나기로 했나.

“LA 카운티 검사 1년을 포함해 공직 생활을 35년 했다. 정말 즐겼고, 보람도 컸다. 그러나 세 번째 대사 임기를 하면서 다른 일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더라. 백악관과 국무부로부터 인정받고 아직 은퇴할 나이도 아니어서 충분히 더 일할 수 있었지만, 에너지와 호기심이 남아 있을 때 새로운 챕터를 시작하고 싶었다. 뭣보다 놀라울 정도로 발전한 한국에서 일해보고 싶은 욕심이 그 멋진 워싱턴을 떠나게 했다(웃음).”

-한국계로는 미 외교관 최고위직이었다. 더 높이 오를 수 있었을 텐데.

“주한 미국 대사로 임명됐을 때 설마 그럴 일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나는 워싱턴 어느 높은 자리보다도 한 나라를 대표하는 특권(privilege)과 책임감이 부여되는 대사가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걸 세 번이나 했다(웃음).”

-대북 업무를 오래 한 것에 지친 건 아닌지.

“물론 힘들었고, 한국과 미국이 원하는 만큼 진전이 이뤄지진 않았지만 대북 협상에 직접 관여했다는 건 내 커리어의 하이라이트였다.”

-오바마·트럼프·바이든 정부에서 요직을 두루 거친 비결이 있다면.

“운이 컸다. 당연히 노력도 했다. 특히 아시아에 전문성을 갖고 일하게 해준 상관들에게 감사하다. 그러나 좋은 멘토만큼 중요한 것은, 적(敵)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에게도 동료, 특히 아랫사람들한테 잘하라고 조언한다. 경쟁적인 환경에선 위로 올라갈수록 평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멘토라면 성 김을 발탁한 크리스토퍼 힐 대사인가?

“힐 대사는 내 커리어에 좋은 영향을 많이 줬다. 그가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로 가면서 나를 워싱턴으로 불러들였고 한국과 과장이라는 중책을 부여했다. 6자 회담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힐 대사뿐 아니라 콘돌리자 라이스 장관, 힐러리 클린턴 장관, 스티븐 보즈워스 대사에게서도 많은 걸 배웠다. 블링컨 장관, 폼페이오 장관도 물론 그렇다.”

-태평양에서는 ‘글로벌미래전략센터’를 이끈다.

“사회생활을 검사로 시작해서 공직을 그만두면 법 관련 일을 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갈수록 예측이 어렵고 불확실해지는 글로벌 환경에서 어려움을 겪는 기업들에게 법적, 정책적 조언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태평양에는 각 분야에서 뛰어난 변호사, 고문 등 전문가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이 분들과 함께 한국 기업들과 사회에 도움을 드리고 싶다. 기회가 된다면 프로보노(사회적 약자를 위한 법률 서비스)를 통한 공익 활동도 해나갈 생각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의 자문도 맡더라.

“현대자동차는 한국을 대표하는 훌륭한 기업이고, 지금까지 이룬 성과들과 앞으로의 잠재력이 크다고 생각한다. 각종 규제와 입법으로 복잡해진 글로벌 시장에서 현대자동차가 더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데 내 경험과 경력이 도움이 되길 바란다.”

2021년 5월 21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공동 기자 회견에서 성 김(오른쪽)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대행을 소개하고 있다./뉴시스

◇中 역할, 여전히 중요하다

-최근 미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세미나에서 ‘김정은이 외교에서 멀어진 것 같다’고 했더라.

“북한이 WMD(대량 살상 무기) 프로그램을 계속 추구할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미국은 북한이 외교 무대로 돌아오길 바라지만 아직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뜻일까.

“미국 정부는 민간과 공공 여러 루트를 통해 대화의 메시지를 보냈지만 북한이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 내가 12월 말에 그만뒀으니 ‘그때까지는’ 그랬다(웃음).”

-올해 한국에선 총선이, 미국에선 대선이 있어서 북의 도발 수위도 높아질 거란 전망이 나온다. 북의 7차 핵실험 가능성도 있을까?

“안타깝게도 도발은 여러 범위로 지속될 거라고 생각한다. 전문가들은 한참 전부터 7차 핵실험도 가능하다고 내다봤다. 물론 언제, 어떤 방식으로 할지는 예측하기 힘들다. 그래서 한미 동맹이 중요하다. 뭐가 일어나도 준비가 돼 있도록 한미 연합 훈련이 자주 이뤄져야 한다.”

-일부 미국 언론은 전면전의 가능성도 제기했다.

“개인적으로는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본다. 평양에서 남한을 상대로 전면전(all-out war)을 할 경우 그 결과가 얼마나 심각할지는 북한이 더 잘 알고 있을 것같다.”

-중국의 역할이 여전히 중요하다고 했던데.

“물론 여러 이슈에서 지금 베이징의 협력이 좋다고 볼 순 없지만, 북핵 이슈를 어느 정도 관리하면서 한반도 정세를 안정화하는 것은 중국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중국은 오래전부터 북핵을 반대해왔고, 완전한 비핵화가 목표라고 얘기해왔다. 그 원칙은 바뀌지 않을 것 같다. 협조를 요청해야 한다.”

-주한 미군 철수를 주장해온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할 경우 한국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국 정부와 국민이 북한에 실망하면서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는 건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적절한 대응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여태까지 해온 대로 동맹을 더욱 다지면서 외교적 해법을 찾는 것, 대북 제재를 지속하면서 공조할 방법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북의 사이버 공격만 해도 한 나라가 대응하기 힘들다. 한국과 미국을 포함해 여러 나라가 협력해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2018년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미북 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11일 오전 성 김(왼쪽) 주 필리핀 미국 대사와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이 각각 실무회담장인 싱가포르 리츠칼튼 호텔로 들어서고 있다./연합뉴스

◇가장 긴박했던 순간?

-크리스토퍼 힐 전 대사는 ‘북한의 비핵화에 맥주 한 잔 값도 걸지 않겠다’고 했던데.

“힐 대사가 원래 말을 재미있게 한다(웃음). 여태까지 일어난 일을 보면 당연히 비핵화는 안 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노력해야 한다. 그냥 놔둔다고 없어지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화의 장으로 이끌 전략이 있을까?

“그 마법을 나도 알고 싶다(웃음). 워낙 북한 문제는 업앤다운(up and down)이 많고 불안정하지만, 제네바 합의(Agreed Framework)도 있었고, 6자 회담 때도 성과가 있었으며, 트럼프 대통령 때 정상 외교도 이뤄졌다. ‘외교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북한은 최근 통일을 포기하겠다며 남한을 제1 적대국으로 명시했다.

“나는 그런 레토릭이 북의 근본적인 변화(fundamental shift)라고 보지 않는다. 북한이 한국에 대해 좋게 얘기한 적이 얼마나 있었나(웃음)?”

-문재인 전 대통령은 종전선언을 하고 싶어했다.

“예전에는 이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유연하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비핵화에 어느 정도 진전이 있고 난 다음에 평화협정(peace treaty)을 맺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협상 파트너였던 최선희는 어떻게 평가하나.

“매우 터프(tough)하다. 6자회담부터 싱가포르 정상회담까지 최선희와 정말 많은 협상을 해봤는데, 그녀는 북핵 이슈에 대해 정말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가장 긴박했던 순간은 2018년 싱가포르 미북정상회담일까?

“거의 모든 협상이 치열했다.”

-’내가 이렇게 했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텐데’ 하는 순간이 있는지.

“매번 내가 협상을 잘한 것인지 돌아보고 고민했다. 그러나 협상이 진전되지 않은 근본적인 원인은 늘 북한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바이든 대통령은 ‘깜짝 선물’이라며 문재인 대통령 앞에서 성 김을 대북 특사로 임명했지만 본인은 내켜하지 않았다더라.

“당시 인도네시아 대사와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 대행도 겸하고 있었으니까. 근데 대통령의 부탁에 끝까지 ‘No’라고 말하긴 어려웠다(웃음).”

-싱가포르 정상회담 때도 필리핀 대사를 겸하고 있었다.

“내 인생이 좀 그런 것 같다(웃음). 지금도 태평양과 현대를 같이 하고 있지 않나? 바이든 정부 때 대북 특사로 임명되자 친구들이 놀렸다. 설마 세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거냐고. 두 딸도 묻더라. 월급도 세 배가 되는 거냐고. 아니라고 했더니 ‘조금 바보스러운데요?’ 하더라, 하하!”

성 김 전 대사의 가족. 성 김이 인도네시아 대사로 부임할 때 서울로 돌아와 민화작가로 데뷔한 아내 정재은 씨는 국내외에서 다채로운 전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조지 클루니? 나도 닮고 싶다

-서울에서의 유년기가 궁금하다.

“번데기 사먹는 걸 좋아했다. 숙제를 안 해 가 야단맞은 적도 많다. 우리가 5남매인데, 한꺼번에 외식하러 가기 힘드니 부모님이 한 주는 아들 둘, 다음 주말엔 딸 셋 데리고 나갔던 기억이 난다. 공직자였던 아버지는 굉장히 엄하셔서 한 달에 한 번 가족회의를 했는데, 5명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잘못한 것에 대해 야단맞았다. 형은 잘못한 것보다 야단을 더 맞고 난 어리다는 이유로 덜 맞아서 형에게 늘 미안했다.”

-펜실베이니아대에선 철학을 전공했다.

“의사가 되려고 1학년을 프리 메드(pre-medical)로 시작했는데 도무지 흥미가 생기지 않아서 철학과로 갔다. 정말 매력 있는 학문이었고 그 관심이 법으로 이어져 로스쿨을 갔다.”

-검사를 1년 하다 외교관이 된 건 한국 외교관이었던 아버지 영향일까?

“공직에 대한 자부심, 애국심이 강한 아버지는 내가 검사가 됐을 때, 그리고 외교관이 되고 싶다고 했을 때 큰 용기를 주셨다. 실은 검사도 재미있어서 외교관을 몇 년 해본 뒤 다시 LA로 돌아오려고 했는데, 홍콩 서울 도쿄 콸라룸푸르 마닐라 자카르트 등 네가 관심을 가졌던 아시아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이 일을 사랑하게 됐다.”

-아버님이 암 진단 받았을 때 외교관을 1년 휴직하고 간병했다더라.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떨어져 산 기간이 많아 이때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국무부가 부모님이 편찮은 외교관이 너밖에 없냐고 하길래 그럼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얼른 쉬게 해주더라(웃음).”

-어머님은 어떤 분인가?

“무척 강인한 분이었다. 내가 주한 미국 대사일 때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에 오셨는데, 그때 함께 찍은 사진을 크게 뽑아서 당신 침대 옆에 세워두셨더라. 어머니께 훨씬 잘해드리는 다른 형제들한테 미안해서 사진 좀 바꾸시라고 했는데, 다음에 가보면 그 사진이 또 세워져 있었다(웃음).”

-존 케리 장관은 성 김을 ‘외교계의 조지 클루니’라고 했다.

“하하! 나도 닮고 싶다. 근데 닮은 건 머리 하얀 것밖에 없다.”

-인도네시아 대사로 부임할 때 아내(정재은 작가)는 ‘독립’을 선언하고 서울로 와서 민화 작가로 데뷔했다. 원망스러웠을까?

“떨어져 있는 게 쉽지는 않다(웃음). 그러나 아내가 자기 길을 찾아 나도 행복했다. 누구보다 딸들이 엄마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두 딸에겐 최고의 아빠라던데.

“좋은 아빠인지는 모르겠고, 웬만하면 아이들이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했다. 부모의 견해도 물론 있지만, 공부와 진로는 자신이 정하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외교관이 되겠다는 딸은 없나?

“사실 기대했고 물어도 봤는데 둘 다 ‘노 생큐’라고 하더라(웃음).”

-미국 친구에게 한국 여행지를 딱 한 곳 권한다면.

“DMZ. 세계 어디에도 없는 유일한 곳이니까. DMZ가 서울에서 얼마나 가까운지 버스를 타고 가며 실감해봤으면 좋겠다.”

-윤석열 대통령과는 당선자 시절 저녁식사를 했더라. 윤 정부의 외교정책은 어떻게 평가하나?

“한반도 문제를 다뤄온 나로서는 매우 특별한 자리였다. 윤 대통령은 한미동맹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걸 확실히 느꼈다. 워싱턴에서도 윤 대통령이 한미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시는 것을 굉장히 높이 평가한다.”

-북핵 협상의 막전막후를 책으로 낼 생각은 없는지?

“여러 분들이 물어보시는데, 아직 계획은 없다.”

-존 볼턴처럼 ‘폭로’할 내용도 있을 것 같은데.

“글쎄. 내 얘기에 아무도 관심 없을 것 같은데(웃음)?”

-성 김에게 ‘협상의 기술’이란?

“모든 협상에서 중요한 건, 공감하는(empathetic) 능력이다. 상대가 왜 저렇게 나오는지 이해하고 그 맥락(context)을 알아야 협상을 진전시킬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충돌만 커진다. 인생의 모든 관계가 그렇지 않은가?”

조선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는 성 김 전 주한 미국 대사. 그는 "협상의 핵심 기술은 공감하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 장련성 기자

☞성 김

1960년 서울 출생.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로욜라 로스쿨과 런던정경대를 졸업했다. LA 카운티 검사로 일하다 1988년 외교관이 된 뒤 국무부 한국과장, 6자회담 수석대표를 거쳐 주한 미국 대사에 임명됐다.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실무 협상을 주도했고, 대북특별대표,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 대행으로 활약했다. 필리핀·인도네시아 대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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