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포퓰리즘의 맛

부에노스아이레스/서유근 특파원 2024. 3. 4.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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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형마트를 찾은 한 남성이 갑작스럽게 오른 가격표를 바라보고 있다. /로이터 뉴스1

“아르헨티나 인플레이션이 그렇게 높다던데 살기 힘들지?”

한국에서 연락하는 지인들이 걱정 반, 궁금함 반으로 가장 많이 묻는 말이다. 그때마다 “아니요. 괜찮아요”라고 대답했다. 괜한 걱정을 끼치기 싫어서 한 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살 만했다. 지난해 아르헨티나 물가는 1년 새 211% 올랐다. 그런데도 살 만하다고? 그 이유는 물가보다 환율 변동 속도가 더 가파르고 빨라서다. 작년 아르헨 물가 상승률 211%는 포퓰리스트 정부가 기업을 압박해 가격을 통제하고 물건·서비스 가격에 보조금을 지급하며 가까스로 틀어막은 결과다. 반면 암시장에서 아르헨 페소화 대비 미국 달러 가치는 아르헨티나의 어려운 경제 상황을 즉각 반영하면서 4배 넘게 올랐다. 페소화로 월급을 받아 생활하는 아르헨티나인들은 당연히 물가 상승의 직격탄을 맞았다. 하지만 나처럼 외화를 손에 쥐고 생활하는 외국인들은 이전보다 많은 페소화를 환전할 수 있어 물가 상승분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았고,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생활 여건이 나아지는 기현상도 벌어졌다.

적어도 두세 달 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하비에르 밀레이가 집권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밀레이는 과도한 복지와 보조금 퍼주기로 대표되는 아르헨식 포퓰리즘인 페론주의 대신 자유시장경제 원칙에 입각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 가격을 기업의 자유에 맡기면서 그동안 억눌린 만큼 가격이 올랐다. 보조금·복지가 하나둘씩 폐지되면서 대중교통 요금 등 공공 서비스 가격이 특히나 많이 올랐다. 반면 금융시장에선 밀레이의 일관성 있는 자유시장경제적 정책을 통한 경제 회복 기대감이 높아지며 환율이 일정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비로소 외국인들도 현지인처럼 온전한 물가 상승을 겪으면서 삶이 팍팍해지게 됐다.

이렇다 보니 최근 들어 물건을 구입하거나 서비스를 이용할 때 무의식적으로 ‘페론당 정부 시절이 좋았지’라고 생각하곤 한다. 지난 1년간 현지에서 취재하고 기사를 쓰며 누구보다도 포퓰리즘의 병폐를 잘 아는데도 말이다. 더군다나 국가 경제력 차이가 있다 보니 한국에선 평범한 직장인이었지만 여기선 초고소득자로 분류된다. 이런 나조차도 이따금씩 포퓰리즘 정부 시절을 떠올리는데 수십년을 정부의 퍼주기 복지에 길들여진 평범한 아르헨 국민은 오죽할까 싶다. 한국에 있을 때 포퓰리즘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하고 파국으로 치닫는 아르헨티나를 보며 ‘왜 저 나쁜 걸 끊지 못하고 계속할까’ 생각했다. 마약 중독자 바라보듯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현지에서 ‘포퓰리즘의 정수’를 맛보니 쉽게 끊어내지 못했던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포퓰리즘, 정말 달콤하다. 나도 모르게 계속 찾게 될 만큼 중독성도 강하다. 그리고, 그래서 더 무섭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가랑비에도 결국 옷은 젖듯, 모든 중독의 끝은 파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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