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경대] 춘천향교 장헌근 비석

박미현 입력 2024. 3. 4. 00:05 수정 2024. 3. 4.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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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을 앞둔 2월 29일자 강원도민일보 5면에 신재훈 기자가 취재한 '친일인사 비석·교량명 버젓이더디기만 한 청산 작업' 기사가 실렸다.

쉬운 일인데도 청산하지 못한 대표 사례로 항일세력을 탄압한 일제 간도특설대 김찬규(일본식 이름 金澤俊男)의 개명 후 이름 김백일을 딴 강릉의 '백일교'와 춘천향교의 '장헌근 모성비'를 지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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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을 앞둔 2월 29일자 강원도민일보 5면에 신재훈 기자가 취재한 ‘친일인사 비석·교량명 버젓이…더디기만 한 청산 작업’ 기사가 실렸다. 일제 잔재 조사 및 청산에 관한 강원도조례가 있긴 하나 실질 성과는 거의 없으며, 일제잔재 청산위원회 역시 비슷하다는 지적이었다. 쉬운 일인데도 청산하지 못한 대표 사례로 항일세력을 탄압한 일제 간도특설대 김찬규(일본식 이름 金澤俊男)의 개명 후 이름 김백일을 딴 강릉의 ‘백일교’와 춘천향교의 ‘장헌근 모성비’를 지목했다.

춘천향교 안내판에는 ‘일제강점기 춘천군수로 재직하며 유학을 발전시키고, 향교 발전에 공헌한 장헌근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라고 쓰였다. 실제 그런 업적이 있었는지 당대 신문기사를 찾아보았다. 1930년 12월 22일자 매일신보에 ‘장 군수의 송덕비 건립 춘천군 유지 발기로’ 기사를 확인했다. 공적이 허다할 뿐만 아니라 그 덕은 군민이 모두 높이 우러러마지않아 높은 덕을 널리 칭송하며 그 공적을 후세에 영원히 전하기 위하여 송덕비를 건립하기로 되었다고 한다. 그 위치는 공자묘 앞이라고 밝혔다.

왜 유교 공간이 비 건립 장소가 됐을지 의아해 더 찾아보았다. 보도 넉달 전인 1930년 8월 21일자 매일신보에 강원유림 ‘관동명덕회’ 창립에 장헌근이 발기인으로 관여하고 있었다. 발기인 8명은 총독부 고위관료 강원도 참여관 손영목과 춘천군수 장헌근, 지방의원격인 강원도평의원 남상학·이기종·이근우·정호봉·박기동·정봉시로 관변 조직 창립 기사였다.

관동명덕회는 어떤 단체였을까? 관동명덕회 강릉지부는 1941년 1월 일제 침략전쟁 찬양 전국 한시공모대회를 열고 그해 6월 한시집 ‘명덕사조’를 발간했다. 이 책 머리에 단체 설명이 나온다. ‘관동명덕회 곧 유도의 연맹으로 우리 고을에도 지부가 결성되어 있다. 이는 모두 천황의 문치와 풍교 속에서 교화를 입은 것인데, 아직 티끌만큼도 보답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장헌근은 대한제국군 교관이었다가 1910년 통감부 경찰로 갈아타 일제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다가 1921년 5월 강원 고위직 경찰로 들어와 춘천·원주·강릉군수로 군림했으며 1935년 함경북도 부지사 직급으로 승진해 갔다. 일제의 중국 침략전쟁 이후엔 일본에 은혜 갚기를 주장한 신문기고와 강연으로 나날을 보낸 그는 함북에 뿌린 인맥과 재산이 아까웠던지 광복 후 출생지 서울로 월남하지 않고 있다가 북한 사법부장으로 교체권력에 올라탔다. 진실에 기반한 안내판이 서야 옳다. 강원 유림 혹은 춘천향교의 결자해지를 기다린다. 박미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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