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질 듯 이어진 ‘인연’…‘아련함’을 마주하다

한국계 캐나다인 셀린 송 감독(36·한국 이름 송하영)의 데뷔작 <패스트 라이브즈>는 그간 ‘소문만 무성한’ 영화였다. 지난해 1월 선댄스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이후 지난 1년 간 세계 주요 영화제의 상을 휩쓸었고, 오는 10일 열리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의 각본상·감독상 부문 후보로 이름을 올리며 또 한 번 화제가 됐다. 한국 관객은 영화의 뛰어난 완성도를 기대하며 그저 짐작만 할 뿐이었다.
지난달 28일 국내 언론시사에서 공개된 <패스트 라이브즈>는 높아진 관객의 기대를 만족시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영화는 디아스포라와 로맨스가 교차하는 가장 아름다운 지점에 서 있다.
영화는 나영(혹은 노라. 그레타 리)과 해성(유태오)의 24년에 걸친 이야기다. 나영과 해성이 함께 학교를 다닌 2000년과 성인이 된 2010년대 초, 30대 중반인 현재까지 3개 시간대가 배경이 된다.
가장 친한 친구이면서 좋아하는 사이인 두 사람은 어느 날 헤어진다. 나영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가면서다. 끊어진 듯 보였던 둘의 인연은 12년 뒤 스카이프와 페이스북을 통해 이어진다. 그러나 수천㎞ 거리와 14시간 시차, 서로의 꿈은 재회를 방해한다. 다시 12년이 흐른 뒤, 해성은 나영을 만나러 뉴욕으로 향한다. 나영 곁에는 미국인 남편 아서(존 마가로)가 있다. 나영은 이제 영어 이름 ‘노라’로 불린다. 서로가 사랑했던 해성과 나영은 과거에 있다.
디아스포라와 첫사랑을 두 축으로 하는 미니멀한 이야기다. 나영의 가족이 등장하는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등장인물은 사실상 주연인 세 배우 뿐이다. 셀린 송 감독은 단출한 캐스팅과 시적인 대사, 대사가 없는 침묵의 순간 모두를 활용해 영화를 깊고 미묘한 감정들로 채운다. 나영이 삶의 터전을 옮긴 이민자로서 느끼는 회한이나 향수와 같은 감정이 사랑과 엮인다.
한국적 개념인 ‘인연’은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다. 나영은 아서와의 사랑이 시작될 때 인연에 관해 설명한다. “한국어로 ‘인연’(In-yoen)이라는 말이 있어. 섭리, 운명이란 뜻이야.” 운명과 상실 그리고 사랑이 복잡하게 얽힌,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느끼지만 말로 형언할 수 없었던 이 감정에 <패스트 라이브즈>는 이름을 붙여준다. 교포 감독이 쓴 한국어 대사가 한국 관객에게 다소 어색하게 들리지만 영화의 매력이 이를 압도한다.
영화는 송 감독의 자전적 경험이 밑바탕이 됐다. 그 역시 나영처럼 2000년대 초 캐나다로 이민을 했고 작가인 미국인 남편과 뉴욕에서 극작가로 활동해왔다. 영화의 문을 여는 뉴욕 바 장면 역시 그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한국에서 놀러온 어린 시절 친구, 남편과 뉴욕의 바에서 술을 마신 적이 있어요. 말이 통하지 않는 두 사람 사이에서 통역을 하면서 나 자신의 정체성, 역사를 해석하고 있다는 특별한 느낌을 받았고 이 이야기를 쓰게 됐습니다.”(지난달 28일 언론시사회)


<패스트 라이브즈>는 한국 최대 투자·배급사 CJ ENM과 미국의 떠오르는 제작사 A24의 만남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2012년 창립된 A24는 영화 <문라이트>(2016), <미드소마>(2019), <미나리>(2020),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 등 뛰어난 작품을 잇따라 만들며 지금 가장 ‘핫한’ 제작사로 떠올랐다. 제작사로는 드물게 두터운 팬덤을 자랑한다. CJ ENM은 2019년 세계 영화제를 휩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통해 20년 넘는 대중문화 분야 투자의 결실을 맺었다. 두 회사가 홍콩국제영화제에서 만난 것은 그 즈음이었다. 양사는 서로가 지닌 아시아, 북미 시장에서의 영향력과 노하우를 합쳐보기로 했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그 첫 번째 결과물이다. A24는 북미 지역 배급과 전 세계 해외 세일즈를, CJ ENM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 배급을 맡았다. 7(뉴욕)대 3(서울) 비율로 이뤄진 현지 제작과 촬영 역시 각사가 맡아 지원했다.
지난달 29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난 사샤 로이드 A24 인터내셔널 대표는 이 영화를 ‘크리에이터들의 산실’ 간 만남으로 규정했다. 그는 “A24는 월드클래스 크리에이터가 그들의 비전을 구현할 수 있는 산실을 지향한다”며 “한국 역시 창의적인 연출자들의 산실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국에 계속해서 돌아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고경범 CJ ENM 영화사업부장도 “A24과 CJ ENM은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공통 분모 위에 서 있다”며 “서로의 강점을 활용하고 빈 곳을 채워주는 협업으로 작은 영화인 <패스트 라이브즈>를 대형 제작사의 영화들과 경쟁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402061417011
최민지 기자 m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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