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에 조연은 없다

한겨레 입력 2024. 3. 3. 14:35 수정 2024. 3. 4. 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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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록의 캡틴락 항해일지]
‘크라잉넛’ 기타리스트 이상면이 먼저 읽고 그리다.

한경록 | 밴드 ‘크라잉넛’ 베이시스트

얼마전 홍대 3대 명절이라고 불리는 ‘경록절’이라는 페스티벌을 마쳤다. 경록절이 무엇이냐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의 생일 잔치이다. 뭐 그리 대단한 놈의 생일 잔치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이름을 빌린 인디 뮤지션들의 축제이다. 두달여간 준비해온 2024 경록절을 성황리에 마치고, 준비하느라 고단해진 나에게 달콤한 휴식을 선물해 주기로 했다.

며칠 쉬면서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지?’하고 생각해 봤는데, 갑자기 뜬금없이 중학교 시절 고우영 화백의 ‘삼국지’를 읽던 때가 떠올랐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재미가 느껴지는 신기한 삼국지. 세대를 초월하고 시대마다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걸작. 우리는 이것을 클래식이라고 부른다.

수많은 영웅들과 다양한 캐릭터들이 하얀 종이 위에서 먼지를 날리며 창칼을 부딪치고 여기저기에서 붉은 꽃잎들이 피어난다. 분명 만화책인데 역동적인 구도와 강렬한 펜터치 덕분에 애니메이션처럼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다.

고독을 즐기라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유행하는 핵개인 시대이다. 갈수록 1인 가구가 늘어나고, 사람들은 인간관계에 지쳐 굳이 누군가와 어울리려고 애쓰지 않는다. 지금 보니, 영웅호걸들끼리 한눈에 큰 뜻을 알아보고 복숭아 나무 아래서 커다란 술단지를 비워가며 ‘도원결의’를 하는 장면이 새삼 낭만적으로 다가왔다.

소셜미디어 속에서 인플루언서들이나 화려한 스타들의 일상을 보면 나도 모르게 부러워하고 비교하며, 초라해지고 초조해질 때가 있다. 남부러울 것 없이 화려해 보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올라갈 수 있는 곳이 한정적이라 경쟁할 수 밖에 없는 시스템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별일 없이 소소하게 잘 살고 있더라도 잠시 한눈 파는 순간 우리는 남과 비교하고 스스로를 초라하게 느끼며, 우울의 늪으로 빠져버린다. 이럴 때 삼라만상 인생사 희로애락과 해학이 담겨있는 ‘고우영의 삼국지’는 명약이 될 것이다.

고우영의 삼국지가 재미있는 것은, 주인공 유비를 이른바 ‘쪼다’로 묘사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영웅 유비가 작가 자신과 닮은 점이 많다고 너스레를 떨며 웃음을 자아낸다. 주인공 유비는 사람은 좋지만 특별한 재주는 없고, 어딘가 어수룩하고 여기저기 빌붙어 간신히 연명하는 캐릭터이다. 어찌보면 주인공이 슈퍼 히어로가 아니고, 서민적인 우리네 모습과 닮아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도 의를 따져가며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따뜻하게 살아간다.

유비는 가끔씩 답답한 모습을 보여줄 때가 있다. 조조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형주를 차지해야 하는데 의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하지 않는다. 결국 조조를 피해 번성에서 양양으로 피신하게 되지만, 자신을 따라 피난온 백성을 버리지 않는다. 유비는 자신의 이익보다는 진심으로 백성을 생각한다. 사랑과 낭만이 필요한 시대, 경쟁보다는 연대가 필요한 시대에 유비의 마음을 떠올려 본다.

유비 쪽이 조조군에게 쫓길 때 장비가 장판교를 부순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한다. 장비가 장판교를 부순 것은 은연 중에 조조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추격을 위해 그깟 작은 다리 하나쯤은 금방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장판교를 부수지 않았더라면 꾀 많은 조조는 오히려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끝에 다리를 건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찌보면 장판교는 인간관계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함부로 우정의 장판교를 끊지 않아야 한다. 사소한 다툼으로 소셜미디어 팔로잉를 끊는다거나 남들에게 험담하는 얕은 술수는 결국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되돌아온다. 뻔히 보이는 수로 괜한 적대감을 만들 필요는 없다. 풀 수 있는 매듭은 자르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이 좁은 바닥에서 거리를 둘지언정 좁은 우정의 장판교 하나쯤은 남겨 두어야 한다. 사실은 상대방이 진짜 미워서가 아니라 그때 그냥 배가 고팠거나 졸려서 짜증난 마음에 미워보였던 것 뿐일지도 모른다.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대부분이다. 또 언젠가는 장판교를 타고 운명의 사람이 넘어올지도 모른다.

다시 삼국지를 읽으면서 이번 경록절이 생각이 났다. 경기도 안 좋고 음악 활동하기 쉽지 않은 난세임에도 수많은 로큰롤 영웅들이 존재하고, 개성 넘치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한데 모여 재미난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그래서 삼국지의 주인공이 누구인데?”라고 물으신다면, 필자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누가 주인공인지는 모르겠지만, 삼국지에 조연은 없다”고. 성실하게 하루를 살아내는 우리 모두가 주인공이고, 삼국지는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는 ‘인생’이라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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