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혹한 반도체 전쟁, 초격차 이끌 인재는 어디에 [아침햇발]

이봉현 기자 2024. 3. 3.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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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가 지난달 21일(현지시각) 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에서 열린 ‘인텔 파운드리 포럼’(Direct Connect)에서 첨단 공정 로드맵을 발표하고 있다. 뒤로는 2030년까지 (삼성전자를 제치고) 파운드리 2위를 달성한다는 슬로건이 떠 있다. 새너제이/옥기원 기자

이봉현 | 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지난 50년간은 석유 매장지가 지정학적 패권을 결정했다. 앞으로는 반도체 생산 기지가 어디 있느냐가 더 중요할 것이다.” 미국 반도체 기업 인텔의 최고경영자 팻 겔싱어가 최근에 한 말이다. 그의 말대로 반도체를 둘러싼 요즘의 경쟁은 경제논리를 넘어선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국제분업 구조에 올라타 성공의 기회를 잡았는데, 지금은 바람이 거꾸로 불고 있다.

미-중 패권경쟁이 시작된 뒤 반도체는 전자부품을 넘어 전략물자 반열에 올랐다. 인공지능(AI) 칩 같은 첨단 반도체뿐 아니라 자동차용 범용 반도체까지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일은 기업과 정부가 ‘2인 삼각’이 되어 벌이는 국가대항전이 됐다. 자유무역 규범 따위는 안중에 없다는 듯 정부는 막대한 보조금을 투입하고, 기업은 자기 나라 업체를 성의껏 밀어준다.

미국은 최첨단 반도체의 연구·개발, 설계, 생산이 자국에서 이뤄지는 압도적인 지위로 돌아가려 한다. 1980년대 일본 반도체를 주저앉히고도 미국은 독주하지 않고 국제 분업의 틀을 조성했으나 이번에는 다르다. 그동안 잘하던 시스템반도체뿐 아니라 최첨단 메모리반도체도 생산하고 인공지능 발달로 중요성이 더 커진 파운드리(위탁생산)도 강자가 되겠다 한다.

인텔이 지난달 말 파운드리에서 1.4나노(10억분의 1m) 공정을 2027년까지 달성한다는 계획을 내놓은 것은 파운드리 2위인 삼성전자를 제치겠다는 선언이다. 시장점유율 1%의 후발 주자임에도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미국 기업은 150억달러의 주문을 몰아줬고, 미국 정부는 100억달러의 보조금을 곧 내줄 계획이다. 디램 3위 업체인 미국 마이크론의 행보도 예사롭지 않다. 마이크론은 한국의 에스케이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개발해 미래 먹거리로 키우는 에이치비엠(고대역메모리) 시장에 우리와 근접한 기술 수준의 제품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마이크론이 위협적인 것은 보조금과 자국 기업 밀어주기를 등에 업고 나오기 때문이다.

일본도 민관이 총력전을 펴고 있다. 지난달 말 준공한 구마모토현 티에스엠시 파운드리 공장이 상징적이다. 일본 정부가 투자금의 절반 가까이 보조금으로 주고 50년간 묶어둔 그린벨트까지 해제하는 행정편의를 제공해 5년 걸릴 공장을 그 절반에 지었다. 자신이 가진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의 강점을 티에스엠시의 제조 능력과 결합해 국내 생산 능력을 확대하고, 반도체 강국 복귀의 시동을 걸려는 게 일본의 꿈이다. 그 과정에서 일본과 대만의 밀착이 두드러지고 한국은 상대적으로 소외되는 모습이다.

모두가 발 벗고 나서니 경쟁의 압박은 날로 커진다. 한국이 요즘 불붙은 인공지능 반도체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은 연일 신고가를 경신하는 미국, 일본과 대비되는 우리의 주가가 보여준다. 무엇보다 삼성전자가 흔들리는 듯해 안타깝다. 삼성은 메모리에서 에이치비엠 시장 전망을 과소평가했다가 에스케이하이닉스에 선수를 뺏겼다. 선단 공정을 미세화하는 데는 빼어난 능력을 보여줬지만, 패키징 같은 후공정은 소홀히 해 엔비디아나 애플 같은 대형 거래처를 티에스엠시에 내주고 말았다.

아직 만회할 시간은 남아 있다. 그 길은 기술력을 키우는 것이다. 남들처럼 수조원의 보조금을 재정으로 지원할 수도, 행정편의를 과감하게 제공하기도 어려운 게 우리 현실이다. 2위를 멀찌감치 떨어뜨리는 ‘초격차’ 전략은 삼성전자가 지난 30여년간 메모리 1위를 유지한 방법이기도 하다. 주문을 받는 입장이라도 넘보지 못할 기술이 있으면 ‘슈퍼을’ 대접을 받는다.

초격차를 만들어내려면 인재들이 기초과학과 공학 분야에서 커가야 한다. 반도체 패권 회복을 선언한 미국은 10년간 반도체 관련 전공자를 3배로 늘리겠다며 이를 1960년대 달에 가는 계획이었던 ‘문샷 프로젝트’에 비유한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우수 이공계 인력의 의대 편중이 계속된다. 올해 입시에서 상위권대 자연계열이나 반도체 관련 학과의 미등록 학생 비율이 지난해보다 더 높아졌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중복으로 합격한 의약학 계열로 빠져나간 것으로 보인다. 의대 정원이 확대되면 향후 몇년 동안 의대 쏠림은 더 심해질 것이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연구개발 예산이 뭉텅 잘리고, 대학원생 연구원 자리가 날아가는 게 한국이다. 가야 할 길과 반대되는 얼빠진 시그널을 더는 젊은이들에게 주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거대한 변혁의 문턱에 서 있다. 반도체는 그 핵심에 있다. 여기서 뒤처지면 오래도록 이류로 살아야 할 수도 있다.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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