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저신뢰 사회의 확대
얼마 전 국제학술지 네이처는 과학자에 대한 국가별 신뢰도를 조사한 결과를 소개했다. 독일 라이프니츠 하노버대 연구진이 세계 67개국 국민 7만1417명을 대상으로 벌인 이 조사는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과학에 대한 신뢰 수준을 알아보기 위해 실시됐다.
과학자에 대한 신뢰도가 가장 높은 국가는 5점 만점에 4.30점이 나온 이집트로 나타났고 인도(4.26점)와 나이지리아(3.98점), 케냐(3.95점)가 뒤를 이었다. 미국(3.86점)과 영국(3.82점), 호주(3.91점), 중국(3.67점) 같은 과학 선도국들도 평균(3.62점) 이상을 받았다. 코로나19 당시 사상 초유의 속도로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고 사태 해결에 과학자들이 적극 나선 결과가 반영된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조사에서 한국은 과학자를 신뢰하는 수준이 세계 평균을 밑돌았다는 점이다. 한국은 3.43점을 받아 일본(3.37점), 홍콩(3.42점), 대만(3.37점)과 마찬가지로 평균보다 낮은 점수를 받았다. 이런 성적은 지난 2020년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가 19개국 3만2000명을 설문 조사했을 때와 비슷하다. 당시 조사에서 한국인들은 정부(12%)와 기업가(5%), 언론(3%)보다 군인(14%)과 과학자(14%)를 신뢰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한국인의 과학자에 대한 신뢰도는 다른 조사 대상 19개국과 비교하면 가장 떨어진다.
흔히 사회구성원 사이에 상호신뢰감이 형성된 사회를 고신뢰 사회, 그렇지 못한 사회를 저신뢰 사회라고 한다. 미국의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자신의 저서 ‘트러스트’에서 “공동체적 유대감이 강하고 서로 신뢰하는 경향이 있는 고신뢰 사회가 저신뢰 사회보다 다양한 이점을 누린다”라고 썼다. 후쿠야마에 따르면 고신뢰 사회는 거래 비용이 낮고 협력이 더 쉽게 이뤄지기 때문에 대규모 조직과 복잡한 환경에서 더 도움이 된다. 미국의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도 “신뢰가 높은 사회는 더 발전된 거버넌스, 낮은 범죄율, 더 높은 번영의 혜택을 누린다”며 “사회적 네트워크와 시민의 참여가 이를 떠받친다”고 했다. 신뢰는 민주화와 사회경제 발전의 중요한 기반이자, 사회적 자본의 기반이라는 것이다.
한국은 카페에서 노트북을 두고 화장실을 다녀와도 괜찮은 몇 안 되는 나라지만 안타깝게도 대표적인 저신뢰 국가로 분류된다. 사실 한국 사회 전반에 깔린 저신뢰의 문제는 어제오늘의 문제는 아니다. 지난 2014년 캐나다와 호주 연구팀은 국제학술지 플로스원에 한국과 일본, 호주, 태국, 대만, 홍콩 등 아시아 태평양 6개 국가 가운데 한국이 태국에 이어 저신뢰 국가로 나타났다고 소개했다. 당시 조사에서 한국인은 친인척을 빼고 다른 종교와 외국인, 낯선 타인을 신뢰하는 비율이 매우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다른 연구에선 한국인은 개인 관계를 신뢰하지만 공공 영역과 규범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편으로 나왔다. 타룬 카나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사회의 신뢰가 떨어지면 시민들은 법 규정을 준수하거나 경제에 이바지하려 하지 않고 선동에 빠지기 쉽고 이웃을 잘 돕지 않는 성향을 보인다”고 지적한다.
문제는 한국 사회의 발목을 잡은 저신뢰의 문제가 앞서 언급한 과학은 물론 의료 같은 ‘비정치’ 영역까지 확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인들이 다른 나라보다 과학자를 상대적으로 덜 신뢰하는 원인은 좀더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코로나19 시기 방역과 백신 정책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을 비롯해 정부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명분으로 과학계를 ‘카르텔’로 규정하면서 등장한 R&D 무용론은 과학자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린 하나의 사례임은 분명해 보인다.
의료 분야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의대 증원 갈등 전에도 의사를 신뢰하는 수준이 매우 낮은 나라로 분류되고 있다. 글로벌 통계 사이트 스태티스티카가 지난해 분석한 국가별 의사 신뢰도에서 한국은 조사 대상 31개국 가운데 최하위로 나타났다. ‘수술실 CCTV 설치법’을 포함해 의대 정원 증원을 둘러싼 의정 갈등에서 나타난 의사들을 향한 불신은 꽤 심각한 수준이다. 한국에서 의사들의 애환을 다룬 여러 의학드라마가 큰 인기를 모았다는 사실이 의아할 정도다.
신뢰는 사회와 경제를 살찌우는 소프트파워이자 사회적 자본이지만 한국 사회에선 유독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가 발행하는 글로벌 사회 문제 분석 매체 ‘스탠퍼드 소셜 이노베이션 리뷰’는 지난 2019년 하락하는 사회적 신뢰를 회복할 방안을 소개하면서 공공과 민간 부문 부패, 악의적인 공개 수사, 필수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는 정부의 무능력, 법치의 붕괴, 경제적 불평등 증가, 개인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은 사회 시스템이 사회의 신뢰를 추락시키는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엘리트와 권력자의 이익에 복무하는 사회, 허위 정보 확산과 양극화를 초래하는 불안정한 미디어와 소셜 미디어 환경도 갈등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꼽았다. 이런 요인들은 공교롭게도 의사 증원을 둘러싼 갈등에서 우리 사회 전반에 드러난 현상들과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많다.
우리 사회에서 갈등은 그동안 급히 봉합되거나 다른 이슈에 밀려 돌연 수면 아래로 사라지곤 했다. 하지만 그런 해법은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어렵고 상황을 모면하는데 급급한 안일한 문제 해결 방식이다. 시스템을 뒤집는 극단적 조치나 급진적 행동은 불신의 씨앗을 남긴다. 신뢰를 연구하는 수많은 학자들의 조언처럼 시간이 걸려도 사회 구성원 간에 서로 신뢰하고 결속을 강화하는 태도와 방식이 더 단단한 신뢰 사회로 가는 첫걸음이 아닐까. 정부는 의사들을 코로나19 사태의 난국을 함께 극복했던 파트너로, 의사들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했을 때의 첫 마음으로,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는 마음으로 말이다. 의대 증원을 둘러싼 갈등이 신뢰 사회로 한 걸음 전진하는 계기가 될지, 아니면 ‘라포’(환자와 의사의 신뢰 관계)는 사라지고 수요공급의 질서로만 운용되는 의료시스템을 보유한 디스토피아적 사회로 전락하는 위기로 작용할지 그 끝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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