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간 시정개요를 보고하는 발간물인 <‘72 서울시정>의 한 페이지. U자 형태의 3호선과 뒤집힌 U자 형태의 4호선의 노선을 찾아볼 수 있다. [서울기록원]
지난 화까지 지하철 1·2호선에 대해 살펴보았다면, 오늘은 3·4호선의 추진 과정과 건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지하철 3·4호선은 일본조사단의 초기 지하철 설계 당시부터 건설 계획이 존재했습니다. 그때 구상된 노선은 U자와 뒤집힌 U자의 모습의 노선이 서울 사대문을 중심으로 교차하는 형태였습니다. 3호선은 불광동에서 독립문, 서울역을 거쳐 퇴계로, 종로5가, 미아리에 닿았고, 말죽거리(양재)에서 출발한 4호선은 보광동과 동대문, 율곡로를 지나 서울역, 사당동, 대방동으로 향하는 노선이었습니다.
1975년 12월 건설부 결정고시(건설부고시 203호)에 의해 결정된 서울 지하철 2호선과 4호선의 노선도. [서울기록원]
1977년 지하철 영상기록 <서울 지하철 건설, 순환선>에 등장한 1~5호선까지의 노선계획. [유튜브 캡처]
지하철 2호선이 순환선으로 바뀐 이후 3·4호선의 노선도 역시 변경되었습니다. 3호선은 갈현동~영천~서울역~사당동~과천, 4호선은 수유리~동대문~보광동~영동 노선이었습니다. U자와 뒤집힌 U자 모양을 포기하고, 서로 닿지 않는 격자형으로 변경된 것입니다.
1980년 2월 5일자 한 일간지에 실린 지하철 3·4호선의 확정 노선도. 두 호선이 X자 형태로 교차하는 현재 노선의 형태와 유사하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3·4호선의 기본설계 작업 직전인 1979년 2월에 설계안이 다시 변경되었는데, 이때 지금 노선의 형태와 유사한 노선이 최초로 등장했습니다. 3호선은 벽제에서 출발해 구파발, 충무로, 양재에 닿았고 4호선은 상계에서 출발해 동대문, 서울역, 사당에 이르렀습니다. 사대문 안에 하나의 교차점을 두어 두 노선의 환승을 가능하게 할 계획이었습니다. 이렇게 3·4호선은 X자 형태의 노선으로 거듭났습니다.
이렇게 숱한 노선 수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재밌는 점은 3·4호선 계획이 언제나 ‘한 세트’로 진행되었다는 것입니다. 서울의 외곽지역 4개 방향에서 도심에 이르는 노선인 동시에 순환선인 2호선을 보조하는 노선으로 두 개 노선인 3·4호선이 동시에 기획되었기 때문입니다. 3·4호선이 지나게 될 X자 형태의 길은 오래 전부터 서울에서 지방 각 지역으로 뻗어 나가는 도로교통망이었습니다. 3호선 구파발 방면은 서울에서 평안도와 중국으로 향하는 의주대로, 3호선 양재 방면은 경상도와 일본으로 향하는 영남대로, 4호선 수유방향은 함경도와 간도로 가는 경홍로, 4호선 사당 방면은 전라도와 제주로 가는 삼남대로였습니다.
석유파동에 물거품된 사설철도화 계획
중앙정부도, 서울시도 재정상황이 빈약한 때였습니다. 지하철 건설은 늘 자금난에 허덕였습니다. 더욱이 진행 중인 2호선의 건설에도 적잖은 예산이 들어가고 있던 터라,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추가로 3·4호선의 삽을 뜨기는 무리였습니다. 서울시는 해외 선진국으로 눈을 돌렸고, 도시철도망의 형성 과정에서 일부를 민간자본이 투자하거나 협력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지하철 1·2호선이 서울시 지하철본부 총대를 메고 건설한 것과 달리 3·4호선을 사설철도화 하는 것을 검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쉽게 말해 서울시는 감독만 하고, 설계에서 자금조달, 건설, 운영까지 민간 기업에 일임할 생각이었습니다.
3·4·5호선 건설과 운영계획을 단독으로 제출한 것은 대우그룹이었습니다.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굴지의 대기업이 손을 들자 정부 입장에서는 망설일 것이 없었습니다. 곧이어 대우그룹은 경제장관회의를 통해 3·4·5호선의 사업주체로 승인을 받았습니다. 대우그룹은 1979년 착공에 들어가 1986년까지 3·4호선을 모두 개통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총 공사비는 4,094억으로, 정부와 대우가 반반씩 출자할 예정이었습니다. 공공성이 강한 사업인 만큼 설계와 시공, 요금은 시가 감독하거나 결정하기로 했고, 대신 대우에 지하상가 운영 등의 부대사업을 허용했습니다.
1980년 2월 서울지하철건설 주식회사 현판식이 열리고 있다. 이날 현판식에는 정상천 서울시장을 비롯해 박우식 서울지하철건설 주식회사장, 23개 건설회사 대표 등이 참석했다. [서울기록원]
1979년 제2차 석유파동은 두 개 노선 건설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정부와 대우그룹 모두 건설비를 출연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은 물론입니다. 정부는 이에 대한 해결로 대우그룹을 주축으로 하며 20개의 건설업체를 주주형식으로 공동 참여시키는 합작회사를 설립합니다. 컨소시엄을 통해 1979년 3월 서울지하철건설 주식회사가 설립되었고, 정부는 3·4호선의 건설비 절반인 2,800억 원을 장기융자해주며 이들을 지원했습니다. 이렇게 서울지하철건설 주식회사가 주축이 된 가운데 1980년 2월 지하철 3·4호선의 기공식이 동시에 열렸습니다.
1980년 2월 서울 도봉구 수유삼거리에서 서울 지하철 3·4호선 기공식이 열리고 있다. 공사 구간은 3호선 구파발~방배동 30km, 4호선 상계동~사당동 27km로 총 57km였다. [서울기록원]
날로 치솟는 물가와 경기 침체의 영향으로 공사비는 착공시 예정되었던 4,600억 원에서 최종적으로는 8,771억 원으로 두 배 가까이 뛰었습니다. 비용 부담이 지속되자 서울지하철건설 주식회사에 출자하였던 회사들은 서서히 발을 빼며 출자를 거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자본출자 총 규모 1,440억 원 중 각 업체들은 450억 원을 납입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목표의 46%인 207억 원만이 모였습니다. 이대로는 계획대로 3·4호선의 건설을 추진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서울시는 사설철도화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81년 6월 열린 국무총리 주재 경제장관회의에서 서울시는 서울지하철건설 주식회사의 공사화를 건의하였고, 이것이 통과되어 1981년 9월 서울시지하철공사가 창립되었습니다. 이것이 서울메트로의 전신이 되는 회사이고, 2017년 서울특별시도시철도공사와 합병하여 서울교통공사로 거듭났습니다.
3·4호선 착공부터 개통까지
1983년 5월 서울 지하철 4호선 415공구(중구 퇴계로2가 일대) 25m 지하현장에서 김성배 서울시장, 김재명 지하철 공사사장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지하터널 관통식이 열리고 있다. [서울기록원]
3·4호선이 동시에 착공한 1980년 2월은 아직 2호선도 개통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2호선의 을지로구간이 한창 공사 중이었기 때문에, 3·4호선의 시내구간 공사도 겹친다면 사대문 안에 교통지옥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3호선은 지축에서 독립문 구간, 4호선은 상계에서 삼선교(한성대입구) 구간에 해당하는 교외구간을 먼저 건설하기로 하였습니다. 차량기지는 3호선의 경우 지축에, 4호선의 경우 상계동에 두기로 했습니다.
1982년 4월 서울 지하철 3호선 318공구(무악재~사직터널) 공사현장에서 발파 작업 중 붕괴 사고가 일어났다. 이 사고로 길을 지나던 시내버스가 추락하여 4명이 숨지고 6명이 실종되었다. [서울역사아카이브]
1984년 2월 서울 지하철 3호선 320공구(현 안국역) 터널 관통 현장의 모습. 지하철 3·4호선의 도심구간은 지하철 간 교차되는 곳이 많이 지하 깊숙이 건설해야 하는데다, 도로를 파헤치는 공법으로 건설할 경우 교통체증의 부작용이 커서 터널공법으로 건설되었다. [서울역사아카이브]
두 호선이 사대문 안에서 교차할 역을 두고 고민이 깊었습니다. 터널이 지나치게 깊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세 개 노선의 교차는 피해야 했고, 그러면서 동시에 1·2호선과의 환승도 편리할 수 있도록 고려해야 했습니다. 서울역과 안국역, 충무로역이 환승역 후보로 올랐습니다. 그중 최종 선정된 충무로역이 3·4호선의 교차역으로 설정되었습니다.
1984년 9월 서울 지하철 4호선 416공구(서울역 일대) 공사 현장의 모습(왼쪽). 오른쪽은 같은 시기 제3차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에 참석차 방한한 북경시 간부들과 서울시 관계자들이 지하철 4호선 416공구를 시찰하는 모습. [서울역사아카이브]
1985년 4월 서울 지하철 4호선 1단계 구간(상계~삼선교) 개통식이 열린 가운데 혜화역 직원 신혼부부들이 전동차에 오르고 있다. [KTV]
3·4호선은 전 구간을 동시해 계통할 예정이었으나, 도심구간에서 착공이 지연되어 구간을 3단계로 나누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했습니다. 1985년 4월 1단계 구간이었던 4호선 상계~삼선교(한성대입구)간 13km가 개통했습니다. 1단계 개통이었던 만큼 개통식 행사는 간소했으나, 이색적으로 혜화역 직원 9명의 합동결혼식이 열렸고 신혼전동차를 상계역까지 왕복했습니다. 그해 7월에는 2단계 구간에 해당했던 3호선 구파발~독립문간 10.3km가 개통하였고, 10월에는 시내 잔여구간인 3호선 독립문~양재간 18.6km, 4호선 한성대입구~사당간 17.3km를 3단계로 개통했습니다. 이로서 서울시내 구간이 전부 개통된 것입니다. 한편 3호선 양재~수서간과 4호선 상계~신상계(당고개), 사당~남태령 구간은 1989년 2기 지하철 계획에 편입되어 이후에 건설되었습니다.
1985년 7월 서울 지하철 3호선 2단계 구간에 해당하는 구파발~독립문 구간이 개통한 가운데 시민들이 지하철에 탑승하고 있다. [매경DB]
1985년 10월 중앙청역(경복궁역)에서 서울 지하철 3·4호선 전 구간 개통식이 열린 가운데 전두환 대통령 내외를 비롯한 참석자들이 테이프커팅을 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3·4호선의 전 구간 개통식은 현재 경복궁역에 해당하는 3호선 중앙청역에서 열렸습니다. 대통령 내외를 비롯한 내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참석자들은 충무로를 거쳐 4호선 동대문운동장역까지 열차를 시승했습니다.
1기 지하철의 완공, 하지만 깊은 적자의 늪
지금까지 지하철 1~4호선의 건설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1호선이 사업에 착수한 1970년부터 3·4호선이 개통된 1985년까지 16년간 건설된 서울 지하철 노선을 통틀어 ‘1기 지하철 계획’ 또는 ‘1기 지하철 네트워크’라고 말하곤 합니다. 사실 이 말은 당시 통용되던 용어는 아니었으나, 1988년 서울시가 ‘지하철 5개 노선 추가건설 계획’을 내놓으며 이를 ‘2기 지하철 계획’이라고 못 박은 이후로 자연스럽게 이전 노선들을 통칭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1980년 10월 종합운동장역에서 신설동역에 이르는 서울 지하철 2호선 1단계 구간이 개통한 가운데 지하철이 시운전을 하고 있다. [서울역사아카이브]
1기 지하철은 전차 철거 이후 철도교통이 전무했던 서울에 체계적인 고속고통망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네 개 호선이 모두 개통한 1980년대 중반부터 서울 지하철은 확장을 멈추고 숨고르기에 돌입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하철 전체의 부채 잔고가 2조원을 넘어섰고, 원금을 갚기는커녕 이자만 내기에도 시와 공사 입장에서는 부담이었기 때문입니다. 통근시간대는 지하철에 사람이 몰렸지만, 나머지 시간에는 이용이 저조하여 애당초 시와 공사가 계산한 수요에 한참 못 미쳤고 이는 곧 만성 적자로 이어졌습니다. 지하철의 부채는 연일 언론에 오르내렸고, 그 누구도 서울의 추가 지하철 건설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1984년 2호선의 완전 개통 이후, 서울시는 지하철건설본부를 해산하게 되었습니다.
<참고자료>
ㅇ「서울지하철건설삼십년사」, 서울시
ㅇ 최항길,「서울 도시철도 120년」, 메이트
정부기록물과 박물관 소장 자료, 신문사 데이터베이스에 잠들어 있는 빛바랜 사진들을 열어 봅니다. ‘사-연’은 그중에서도 ‘길’, ‘거리’가 담긴 사진을 중심으로 그곳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연재입니다. 거리의 풍경, 늘어선 건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 등을 같은 장소 현재의 사진과 이어 붙여 비교해볼 생각입니다. 사라진 것들, 새롭게 변한 것들과 오래도록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과거의 기록에 지금의 기록을 덧붙여 독자님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해당 장소에 얽힌 ‘사연’들을 댓글로 자유롭게 작성해 주세요. 아래 기자페이지의 ‘+구독’을 누르시면 연재를 놓치지 않고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