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박사의 4대 무죄와 한 가지 죄’ [노원명 에세이]
노무현과 이승만 사이에서 기계적 공정을 취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내가 ‘이승만으로 전향’한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가 아니었으므로 시점을 특정할 수도 없다. 인생에서 크고 작은 실패를 겪고 난 후에, 남을 평가하기가 조심스러워지는 나이에 이르면 이승만을 존경하게 된다. 먼저 자신의 실력을 알고 난 후에야 남의 위대함이 눈에 들어오는 법이다. 자신의 한계를 알기 어려운 청년 시절엔 누구도 존경할 수 없다.
김덕영 감독이 인터뷰에서 ‘건국전쟁’을 찍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책으로 ‘망명 노인 이승만 박사를 변호함’을 꼽는 것을 보고 그 책을 샀다. 이승만이 직접 썼거나 그에 대해 쓰인 중요한 텍스트를 더러 봐 왔지만 그 책은 보거나 듣지 못했다. 책이 쓰인 시점은 이승만이 하야후 하와이에 머물고 있던 1960년대 초반이다. 저자는 개신교 목사 김인서. 당대의 실력파 한문 문장가로도 알려져 있다. 1894년생으로 1875년생 이승만과는 19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직접 친분은 없다. 그는 책을 쓰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1964년에 사망했다. 이승만이 그보다 1년 더 살았다.
이승만의 동시대인, 특별한 인연도 없고 단지 국민으로서 대통령 이승만을 지켜보았던 지식인이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최고조에 이른 시점에 그를 변호할 목적에서 쓴 책이다. 희귀하다. 수십 년의 세월을 격해 채증된 사실을 중심으로 역사가들이 쓴 책은 수준의 편차는 있지만 다 비슷비슷한 느낌이다. 그냥 교과서일 뿐이다. 김인서의 책은 당대의 생활상을 기록한 일기를 읽는듯한 재미가 있다. ‘아 그 시절에 이미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하는 깨달음의 즐거움! 심지어 이승만에 대한 그 평가가 내가 지금껏 읽어온 어떤 평론보다 통렬, 통쾌하다. 비유가 절묘해서 혼자 읽기가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일부만 소개한다.
김인서 목사는 당시 언론과 지식인들의 이승만 공격에서 지독한 위선을 느꼈던 모양이다. 매우 고급스럽게 이들을 야유하고 있다. ‘이 박사의 4대 무죄와 한 가지 죄를 들고 동포에 호소한다’는 단락에서 그는 첫째 ‘이 박사에게는 국토를 상실한 죄가 없다’고 변호한다. 동남으로는 독도를 사수했고 서북으로는 38선을 피로서 지킨 사실을 환기한다.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원의 본토 땅 전체를 공산당에게 넘겨주고 하나의 섬에서 망명정부를 이끌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중국인은 대(大) 국민인지라 그를 종신 총통으로 모시고 있다. (중략) 이 강산을 온전히 사수한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이 왜 원흉이냐?” 이 말 반론할 수 있나? 난 못하겠다.
둘째, ‘이 박사에게는 패전의 책임이 없다.’ 김인서는 말한다. “인조대왕은 청국에 두 번 항복했다. (중략) 병자호란에는 서울이 함락되고,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했다. 그날부터 우리는 3백년 동안 청 제국의 종이 되었다. 그래도 우리는 전쟁에 수고한 임금이라 하여 조(祖)자를 올려 인조대왕이라고 존칭한다. 인촌계(김성수 계열)의 동아일보사에게 묻노니, 적전(敵前)에 한 번도 머리 숙인 일이 없는 대한민국 건국대통령은 왜 조(祖)자 대신 똥이냐?”
셋째, ‘이 박사에게는 국체(國體) 변혁죄가 없다.’ 김인서는 논한다. “우리는 매국(賣國) 조약에 어인(御印)을 누른 고종황제나 순종황제도 우리 임금으로 부르는데, 국체 변혁도 아니 한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은 왜 원흉이냐?”
넷째, ‘이 박사는 변절한 적이 없다.’ 당시 잡지 ‘사상계’를 통해 이승만에 악담을 퍼붓던 장준하를 겨냥해 김인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 박사는) 반공건국의 대업에 분골쇄신하다가 최후의 일각까지 북진통일을 부르짖으면서 쓰러졌다. (중략) 장준하씨에게 다시 묻노니, 변절없는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이 왜 정치적 악한이냐? 왜 협잡꾼이냐?”
김인서는 이승만의 한 가지 죄를 ‘헌법 운영을 잘못한 죄’로 지적했다. ‘그 부하들이 저지른 3·15 부정 선거’를 들고 있다. “헌법 운영의 잘못은 바로잡으면 된다. 역사에서 헌법 운영에 잘못이 없는 정권이 어디 있었던가? 동포 여러분! 4대 무죄의 대통령이 원흉이 되는 나라에서 여러분의 자손은 평안히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자손인 우리는 평안히 살지 못하고 있다. 이승만 이후로 지금까지 단 한차례 예외 없이 정권이 바뀌면 전임 정권의 ‘국정·헌법 농단’이 문제가 되어왔다. 김인서는 그 시절에 이미 알았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용서 없는 나라는 원흉 제조 공장이니 영웅이 나올 수가 없다. 망명 노인은 만고의 한을 품고 이역의 고총 속에 눕게 될 것이다. 이역의 고총이 이 나라 경무대보다 나을 것이니, 살아서든 백골로든 돌아오지 마시라.”
그 후로도 한국 역사에선 ‘원흉’은 많았으되 ‘영웅’은 없었다. 영웅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영웅을 깎아내리는데 바빠 영웅취급을 안했던 것이다. 우리는 오늘도 60여년 전 김인서가 말한 ‘용서없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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