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의 물질주의…‘돈을 넘어선 평화’ 가능할까

한겨레 2024. 3. 3.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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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김성경의 탈분단 사유ㅣ물질주의와 평화
남, 생존 불안감에 물신주의까지
국제제재·식량난에도 버틴 북
2023년 11월9일 북한 평양 옥류전람관에서 열린 가을 의류 박람회에서 한 여성이 재킷을 입어보고 있다. AP 연합뉴스

이민을 떠난 지 10년이 훌쩍 넘은 친구가 한국을 방문했다. 고향을 그리워했던 친구는 한국이 무척 낯설다고 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변했다고 말했다. 누구를 만나든, 어떤 곳에 가든, 그리고 무슨 이야기를 하든 결국 ‘돈’이 결론인 것이 씁쓸하다고 했다. 하긴 자본주의 국가 대부분이 비슷한 경향을 보이지만 한국만큼 ‘돈’이 절대적 기준이자 목적이 된 곳도 드물다. 예컨대 2021년에 발표된 퓨리서치센터 조사에 따르면 선진국 17개국 중에서 삶의 의미로 물질적 풍요를 1순위로 꼽은 국가는 한국이 유일했다. 게다가 다른 국가들은 삶의 의미로 가족·건강·친구·가치·종교·사회 등을 복수로 꼽았던 것에 반해 유독 한국은 물질적 풍요만을 단수로 응답했다. 이렇듯 모두가 돈을 향한 욕망과 이로 인한 불안에 허우적거리는 사회, 그것이 현재 한국의 민낯이다.

생존 위해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문득 친구는 북한 사람들은 어떠냐고 물었다. 사회주의를 표방해온 북한이니, 그곳 사람들은 적어도 ‘돈’이 최우선은 아니지 않겠냐는 궁금증이었다. 경제적으로 낙후했지만 상대적으로 경쟁이 덜한 북한에 한국이 잃어버린 공동체와 사회적 가치 등이 존재하지 않겠냐는 질문이기도 했다. 이는 상대적 우위에 있는 한국 사회가 북한을 ‘못살지만 그래도 정이 살아 있는 사회’로 낭만화하는 경향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살기 위해 ‘물질적 안정’ 추구
남북관계 다양한 가치 조화돼야

사실 북한 사람들이 물질주의적이냐는 질문은 다면적인 해석을 요구한다. 이 질문이 생존을 위한 물적 자원을 축적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느냐고 묻는 것이라면 북한 주민은 물질주의적이라고 할 만하다. 권위주의적 정치 시스템과 촘촘한 계획경제의 틈바구니에 자생적 시장을 맨손으로 일궈낸 것과 다름없는 북한 주민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살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70여년 동안 세계 패권국인 미국과 대치하면서도, 최악의 식량난을 겪으면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전면적 국제 제재 국면에서도 북한이 버텨낸 데는 먹고사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한 주민들의 역량이 주요했다는 것은 반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그만큼 생존을 위해서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몸소 터득한 이들이 북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돈’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전적으로 구성하는 것을 물질주의라고 정의한다면 북한 주민은 한국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돈’을 벌고자 뭐든 하지만, 반대로 돈‘만’을 삶의 기준으로 삼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일례로 2015년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북한 주민을 대상으로 북한 주민의 물질주의 성향을 조사한 양문수의 연구에서는 북한 주민들이 물질적 소유를 행복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높은 반면에 물질적 소유를 성공의 기준으로 생각하지 않음을 밝혔다. 즉, 북한 주민들에게 ‘돈’은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지만 동시에 돈‘만’을 추종하는 물신주의적 행태에는 부정적이다.

북한 주민의 물질주의적 가치관은 경제적 생존과 최소한의 안전이 취약한 환경과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 일찍이 정치학자 로널드 잉글하트가 서구 사회의 가치관 변화를 물질주의에서 탈물질주의로 전환된 것으로 정의하면서, 이러한 의식 전환을 추동한 사회경제적 조건으로 1950~70년 사이에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웠던 물질적 안정과 신체적 안전을 주목했던 것을 참조할 만하다. 잉글하트는 물질적 안정과 신체적 안전이 위협받는 사회에서 탈물질주의적 가치(민주주의, 자유와 평등, 인권과 생태 등)는 정치적 어젠다가 되기 어려운 반면, 탈물질주의적 가치관의 전환을 맞이한 서구 사회는 생존과 안전 문제를 넘어선 다양한 사회적 이슈가 정치 어젠다로 부상하였음을 경험적으로 증명했다. 잉글하트의 분석 틀을 적용해보면 물질적 생존과 안전의 위협 상태에 빠져 있는 북한 주민은 물질주의적 가치관에 매몰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북한 체제를 향한 주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요원한 까닭이 단순히 폭력적 검열과 통제를 일삼는 체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민 대부분이 각자의 물질적 안정에 집중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한 이유이기도 하다.

불안한 한국인…사회안전망 시급

북한 체제가 적절하게 활용하는 외부 위협에 대한 공포도 주민들이 더욱 생존과 국가주의에 매달리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전쟁 위기를 활용하여 전 국가의 병영화를 이뤄낸 북한에서 주민들은 당장의 신체적 안전을 지켜내는 것에 골몰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 참여나 민주적 가치가 중요한 이슈로 부각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우며, 이는 기존의 전통적 가치(국가·관습·가족주의)가 지속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오히려 흥미로운 것은 물질주의와 탈물질주의 사이에서 길을 잃은 한국 주민의 가치관이다. 객관적 지표에서는 상당한 경제 발전을 이룬 것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의 물질주의적 성향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잉글하트의 이론적 틀을 발전시킨 잉글하트와 벨첼의 ‘2023 문화지도’(The Inglehart-Welzel World Cultural Map 2023)에 따르면 한국은 발전된 서구 국가보다 월등하게 생존주의적 성향을 나타내고 있다. 물질적 생존에 대한 높은 불안감으로 인해 젠더·생태·자유·인권과 같은 탈물질적 이슈가 정치적 어젠다는커녕 사회적 공명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총선에서 한때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던 탈물질적인 정치적 어젠다가 완전히 실종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 가능하다.

이렇듯 차이가 있는 남북의 물질주의적 가치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각기 다른 해법이 요구된다. 북한의 경우에는 기본적 수준의 물질적 안정과 신체적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 시급하다. 먹고살 만한 경제적 수준과 전쟁이나 폭력 없는 사회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반면에 한국은 사회안전망을 확대하여 물질적 생존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해야 한다. ‘돈’이 삶의 유일한 목표라는 물신주의적 태도를 타파하기 위한 사회적 여론 형성과 교육의 개입도 중요할 것이다.

남북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때 ‘돈’은 중요한 계기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돈‘만’ 추종하는 것은 결국 갈등과 분열, 불안감과 좌절감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돈’을 넘어서 다양한 가치가 사회적 역량으로 장착되어야만 남북관계의 질적 변화와 지속가능한 평화가 가능하다는 의미다. 남북 모두에서 ‘따로 살자’는 목소리가 커져가는 지금이야말로 잠시 숨을 고르며 각자의 근원적 문제를 마주할 시간이다. 그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영국 에식스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성공회대, 싱가포르국립대를 거쳐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북한 사회와 탈분단 문화를 연구하며, ‘갈라진 마음들’ 등 다수의 학술 논문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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