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천지원수라더니”…미국 욕하던 北, 미사일은 美 부품으로 채웠다 [박수찬의 軍]
‘미 제국주의, 미제의 패권 야망….’ 북한이 미국을 가리킬 때 쓰는 용어만큼 미국에 대한 북한의 반감과 증오를 잘 드러내는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아이러니한 것은 미국을 그렇게 미워하는 북한이 미사일 내부를 미국산으로 채웠다는 점이다. ‘미국은 싫지만, 미국 제품은 좋다’는 인식이 그대로 드러난 셈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북한 미사일이 외국 기술에 의존해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국제적으로 확인한 첫 사례다.
그동안 북한은 자체 기술로 탄도미사일을 비롯한 첨단 무기를 만들어왔다고 주장하며 ‘주체화’를 강조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 러시아에 대량의 포탄과 미사일을 판매했고, 러시아군은 북한산 포탄과 미사일을 우크라이나군 공격에 활용하고 있다.
영국 무기감시단체인 분쟁군비연구소(CAR)는 지난 1월 2일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에 발사했던 탄도미사일 잔해를 분석, 이 미사일이 북한에서 제조됐다는 점을 밝혀냈다.
이들 부품은 미사일 항법 체계를 구성하는 것들이다. 미국, 중국, 독일, 일본, 네덜란드, 싱가포르, 스위스, 대만 등에 본사를 둔 26개 회사 제품이다. 제작 시점은 2021~2023년인 것들이 전체 부품의 76%에 달했다. 제조사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북한에 미사일 부품을 공급한 것으로 보인다.
CAR은 “해당 미사일은 지난해 3월 이후 조립돼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어 “북한이 2006년부터 적용된 탄도미사일 생산을 금지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에도 최근 생산된 부품을 통합해 지난해까지 첨단 무기를 생산, 러시아에 이전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또 “북한이 거의 20년간 유지된 제재를 우회할 수 있는 견고한 조달 네트워크를 만들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라고 덧붙였다.
1983~1984년에는 서독의 한 여성사업가가 군사 목적으로 활용이 가능한 야간투시경과 반도체 등을 북한에 밀수출한 사례도 있다.
이는 북한이 냉전 시절부터 수출 금지 규정 등을 우회해 첨단 부품이나 장비를 확보하는 네트워크를 운영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에 허점이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물품이나 용역을 제공하는 기업이나 중개상 중에선 정치적 요인보다 이윤에 집중하는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북한은 이를 철저하게 이용했다. 외교관과 무역사무소 근무자 등을 앞세워 제3국 국적자나 외국기업 및 중개상을 통해 미사일 부품과 소재를 포함한 수출제한품목을 확보하는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김정은 체제가 출범한 직후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가 강화되면서 중국, 러시아에서의 밀반입이 두드러지는 모양새다.
러시아는 북한과 매우 유사한 군사규격을 사용한다. 핵·미사일·우주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국가로서 관련 장비나 부품, 소재를 구하기도 쉽다. 미국 주도 대북 제재를 회피하기도 쉽다.
지난 2022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위원회 산하 전문가 패널 연례보고서에는 주러시아 북한대사관 외교관 오용호의 이름이 등장한다.
2016년부터 러시아 기업과 접촉한 그는 2018년 3월 탄도미사일용 스테인리스 합금 9t을 북한에 보냈다. 2020년에는 러시아 기업에서 탄도미사일 제조에 쓰이는 베어링을 공급하기 위한 자료를 받기도 했다.
2019년에는 러시아의 한 미사일 전문가가 오용호에게 러시아 순항미사일 TRDD-50 설계도를 보냈다. 오용호는 내열성 섬유제품인 파라 아라미드와 플래티넘 합금 소재인 회전 노즐뎌 구입했다.
문제는 마이크로칩과 프로세서를 비롯한 반도체다. 반도체가 없다면 미사일 제어와 유도 등은 불가능하다.
이들 부품은 러시아의 우방인 중국을 통해 러시아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북한 입장에선 중국을 통해 반도체를 조달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인식할 수 있다.
미국은 ‘칩워(chip war)’라 불릴 정도로 중국에 반도체 관련 수출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중국에는 미국 등 서방의 반도체가 유입되는 모양새다.
중국이 미국 수출 통제에 맞서 반도체의 독자 개발·생산 노력을 강화하고 있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방 전자기업 입장에서 중국은 여전히 세계 최대 시장이다.
시장 주도권을 잃고 싶지 않는 기업들이 미국의 압박을 회피하면서 중국에 반도체를 공급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실제로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인공지능(AI) 반도체 선도업체인 엔비디아의 젠슨 황 CEO는 지난달 23일 인터뷰에서 “미국 당국의 규제를 피해 중국에 팔 수 있는 새 반도체 제품을 고르고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의 특성도 수출 통제에 허점을 만든다. 반도체는 기본적으로 민간용과 군용의 구분이 모호한 이중용도 제품에 가깝다.
첨단 반도체보다 성능이 낮은 구형 반도체는 군사장비 외에도 가전제품과 스마트폰, 자동차 등에도 쓰일 수 있다. 최첨단 반도체보다 성능이 낮고 민간용으로 사용될 수 있는 제품은 수출을 적극적으로 막지는 않는 나라가 적지 않다.
복잡한 유통구조를 만들어 최종 사용자 파악을 어렵게 하는 것도 제재에 빈틈을 만드는 요인이다.
다양한 요인에 의해 중국에 반입되는 반도체는 러시아와 북한에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 직후 미국 기업에서 생산한 마이크로칩 등이 합법적인 기업 간 거래를 통해 판매와 재판매를 거듭하면서 중국으로 넘어가면, 중국 내 러시아 유령회사가 사들이는 방식으로 전자장비를 반입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도 이와 유사한 방식을 쓰는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에는 북한 외교관이나 무역사무소 관계자가 많다. 이들이 나서서 반도체를 구매한 뒤 북한으로 보내는 것으로 보인다.
배낭 1개 분량의 이중용도 구형 반도체만 있어도 순항미사일 수백 기를 만들 수 있다. 크기가 작아서 외부 노출 방지가 용이하고, 제재를 피하기도 쉽다.
전자기기 외에도 중국은 북한이 미사일 개발에 필요한 재료를 조달하는 창구가 되고 있다.
지난 2022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위원회 산하 전문가 패널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조선기계무역총회사 소속 김종덕은 중국 단둥 소재 업체에 2021년 1월 이후 최소 네 차례에 걸쳐 스테인리스 합금과 밸브, 펌프, 베어링 등을 주문했다.
북한 군수공업부는 림룡남이라는 인물을 내세워 선양에서 알루미늄분말 등 고체연료 제작에 필요한 재료들을 구입했다.
이중용도 제품을 활용해 미사일과 드론 등의 정밀유도무기를 제작하는 것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북한과 이란, 러시아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이다. 이에 대한 규제와 통제 장치가 필요한 이유다.
통제 체제가 효율적으로 작동한다면 서방 부품에 의존하는 북한의 미사일 개발·생산에 타격을 입힐 수 있다. 이를 위해선 기존 대북 제재를 엄격히 적용하고 이중용도 제품 거래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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