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우주가 살인을 돕는다? ‘살인자ㅇ난감’의 난감함
*이 글은 드라마·웹툰 <살인자ㅇ난감>의 주요 장면에 대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살인자ㅇ난감>을 봤을 때 대략 네 번 정도 난감해졌다. 우선 제목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난감했다. 처음에는 ‘오난감’으로 읽었는데 지인 중 한 명이 ‘이응난감’으로 말하는 걸 듣고 따라 불렀다. 그러다가 한글 타이핑을 할 때 ‘살인장난감’이 된다는 걸 깨닫고 ‘이게 진리인가?’ 싶었다. 누군가 ‘살인자난감’으로 말하는 걸 듣고 또 흔들렸지만. 이렇게 제목에 대한 다양한 독법이 존재하는 작품은 처음이라 난감했다(웹툰 원작자는 해석의 다양성을 의도했다고 밝혔다).
난감한 불일치와 의문 가운데로 던져진 인간
그다음으로 난감해졌을 때는 웹툰을 본 뒤다. 명랑한 ‘일상툰’으로 분류될 것 같은 귀여운 그림체의 4컷 만화인데 잔혹한 내용과 난해한 주제가 담겨 있었다. 형식과 내용의 불일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세 번째 난감함은 드라마를 본 뒤 찾아왔다. “원작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다”는 제작진의 말과는 달리 원작과 달라진 전개와 결말을 두고 호불호가 갈렸다. 이 다름의 틈새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제목에서부터 결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고, 그 해석의 차이를 통해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차이를 드러낼 수 있다는 면에서 <살인자ㅇ난감>은 분명 의미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그런 평가와는 별개로 지금 나는 네 번째 난감함 앞에 서 있다.
‘무난·어중간·평범’으로 자신을 요약한 대학생 이탕(최우식). 그날도 무난하고 어중간하고 평범한 일상이 이어졌다.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이기 전까지는. 그 사건으로 이탕의 삶은 특별해진다. ‘첫’ 살인으로 얼이 빠진 그는 두려움에 벌벌 떨며 밤을 꼬박 지새우지만, 곧 반전이 생긴다. 그가 죽인 인물이 사실은 보험사기범에 연쇄살인마였던 것. 게다가 이탕이 살인했다는 어떤 증거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 살인이 이어진다. 이번엔 우발적 살인이 아닌, 계획된 범죄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탕은 자수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죽인 사람이 부모를 살해하고 암매장했다는 뉴스를 듣고 경찰서에서 발길을 돌린다.
세 번째 살인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에게 시비를 건 고등학생 두 명을 죽이고 난 뒤 죄책감에 괴로워하다 자수를 결심한다. 그러나 가는 길에 소매치기를 당해 제출하려던 증거물이 영영 사라진다. 이쯤 되면 ‘하늘이 나의 살인을 응원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 만도 하다. 우연히 이런 말도 듣게 된다. “세상이 이따위로 돌아가는 게 맞냐고, 응? 정의의 사도 뭐 이런 건 진짜 없나? 씨바, 누가 됐든 좀 나와서 다 쓸어버렸음 좋겠네. 씨바!” (드라마에는 나오지 않지만) 원작에서 이탕이 친구와 들른 술집에서 뒷자리에 있던 손님(장난감 형사의 후배)이 한 말이다. 이 말이 이탕이 살인을 계속하는 결정적 동기가 됐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이탕에게 있던 일말의 의심을 거두는 계기 중 하나가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탕이 죽인 이들은 그저 평범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성폭행을 저지른 남고생, 아동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른 검사, 제자가 임신하자 책임지지 않기 위해 살해한 뒤 암매장한 대학교수, 장애가 있는 아이를 학대한 부모, 평범한 아이 엄마인 것 같았으나 사실은 영아 유괴범 등 누가 봐도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었다. 만약 <살인자ㅇ난감>이 보통의 히어로(영웅)물이었다면, 이들을 벌하는 서사로 ‘사이다’ 분수를 만들었을 것이다. 이탕에 의해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성폭행 범죄를 저지른 남고생의 모친, 이탕의 친구 경환, 전 연인이 유포한 불법촬영 피해자 인선 등도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를 오가며 인간의 모순성과 복합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등장한다. 사실, 살인하기 전의 이탕도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들키지 않고 잘 넘어갔을 뿐이지.
죽어 마땅한 사람들을 죽였다?
마치 성악설에 근거한 것 같은 이런 냉소적인 인간 이해는 ‘히어로’가 등장하기에 합당한 구실을 만든다. 그런 인간들이 자신이 저지른 죄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게 ‘정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그런 인간은 죽여도 되는가?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라는 윤리적 질문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질문이 빠진다면 노빈(김요한)과 같이 ‘절대정의’를 숭배하거나, 송촌(이희준) 같은 ‘절대악’을 실행하는 이들이 창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탕과 노빈이 정의에 대한 자신들만의 기준으로 살인을 정당화하는 무성찰적 인물이라면, 송촌은 반대다.
송촌은 원래 강력계 형사를 희망하는 성실한 경찰이었다. 하지만 ‘살인자의 자식’이라는 편견의 벽에 부딪혀 꿈이 좌절되고, 정의를 구현하리라 믿었던 곳이 오히려 부정의한 집단이라는 걸 깨닫고 반사회적 인물이 된다. 그는 죽어 마땅한 인간과 아닌 인간의 기준을 모르는 무지성적 인물이기에 무차별적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이들을 쫓는 형사 장난감(손석구)은 “법 안에서 허용되는 만큼 미쳐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인물로서 사회가 지켜야 할 법과 윤리, 공적 정의를 상징한다. 하지만 아버지를 식물인간으로 만든 송촌을 향한 증오심을 품고 있다. 이렇게 각각의 인물은 ‘난감한 불일치와 의문 가운데 던져진 인간’을 극단적으로 상징한다. 어쩌면 인간 사회는 장난감이 처한 상황처럼 “정의의 사도”가 나타나 “다 쓸어버렸음 좋겠”다는 마음을, 미쳐도 “법 안에서” 혹은 “인간다움”을 유지하며 미쳐야 한다는 윤리가 막아서고 있기에 파국이 지연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원작은 나름의 ‘선’을 지키며 서사의 핍진성을 유지한다. 정의에 대한 비틀린 확신을 갖고 연속 살인을 저지르던 이탕과 그의 ‘사이드킥’(조력자) 노빈, 그리고 무지에서 비롯된 무차별적 살인을 저지르던 송촌에게 벌을 내린다. 그러나 장난감의 선택을 통해 일말의 회의적 질문은 남겨둔다. 정의로운 경찰이라 믿었던 자기 아버지가 사실은 마약을 유통한 불의한 경찰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장난감은 정의에 대한 자신의 확신에 균열이 생겨 혼란에 빠져 이탕을 풀어준다. 결국 이탕은 일본으로 건너가 자신 대신 죽은 노빈의 형상을 하고 살아가는 것으로 작품은 끝난다. 정의에 대한 확신과 회의 사이에서의 판단을 독자에게 맡긴 것이다. 이 작품의 제목을 각자 읽고 싶은 대로 읽어도 되는 것처럼.
요즘 시대 정의와 우리가 원하는 영웅
그러나 드라마는 다른 길을 걷는다. 마치 그간 저지른 살인에 면죄부라도 주듯 이탕이 법적인 책임을 벗어난 상태로 악인을 만나면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 능력을 상실하지 않은 채 거리를 활보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악인을 감별해 죽이는 능력을 가진 ‘히어로’로서의 가능성을 거두지 않은 셈이다.
물론 원작과 다르다는 것 자체가 문제 되지는 않는다. 2010년 작품인 웹툰과 2024년 작품인 드라마는 다를 수밖에 없는 장르적 특징과 사회적 맥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중문화는 ‘동시대성’을 고려해 이해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드라마로서 <살인자ㅇ난감>은 어떤 동시대성을 가지고 있을까? 2000년대 이후 대중의 관심을 받은 케이(K)드라마 중 가장 주목받은 주제는 ‘사적 복수’다. 공적 시스템에 기대할 수 없는 피해자들이 사적 복수에 성공한 ‘권선징악’형 드라마는 적절한 교훈을 주고 대리만족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이런 주제의식은 이후 악으로 악을 응징하는 ‘다크 히어로물’로 심화되고 확장됐다. 이런 드라마들의 유행은 각종 사회문제에 대한 공적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절망의 반영이기도 하다.
그동안 개인이 (얼굴에 점을 찍고 나타나거나 오랜 시간을 들여 능력을 키워) 사적 복수를 하든, 재력이나 힘을 가진 다크 히어로가 나서든, ‘현생’에서 불가능하다면 과거로 회귀해 복수하든 그 동기는 ‘피해’나 ‘원한’이거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또한 아무리 ‘다크’한 히어로라도 그 끝은 정의구현이거나 그게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공멸’하는 선택을 하는 등 나름대로 사회적 선이 지켜졌다. 그러나 이제는 피해나 원한, 혹은 욕망이 아닌 무차별적 살인을 ‘정의구현’이라고 믿는 인물이 등장해 ‘히어로’의 반열에 올랐다. 2010년 원작은 정의에 대한 각자의 확신과 회의 사이에서 나름의 균형을 유지하다가 이탕을 ‘히어로’에서 죽음 앞에 오줌을 지리는 그저 나약한 인간으로 끌어내린 뒤 끝맺는다. 그러나 2024년의 드라마는 ‘심판받을 악인’과 ‘신이 내린 영웅’ 사이에서 ‘영웅’의 손을 들어준다.
살인 장면 ‘힙하고 팝하게’ 포장했으나…
이런 드라마의 결말은 정의에 관한 복잡한 질문도, 인간을 향한 두터운 이해도, 자신을 향한 성찰도 불가능하게 한다. 그저 자기 확신을 강화하는 계기로서의 ‘사건’만 존재할 뿐이다. 이렇게 무성찰적으로 사건만 나열된 주제의식의 빈곤함은 필연적으로 고자극 화면으로 메워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드라마는 원작에서 비교적 촘촘하게 깔아놓은 서사적 개연성은 과감하게 생략한 대신 “힙하고 팝”하게 연출한 살인 장면과 이탕의 죄의식을 상징하는 의미로 정사 장면과 여성의 ‘벗은 몸’을 배치했다. 그리고 ‘불법촬영 영상물’ 등 여성을 남성적 관점에서 성적으로 도구화한 장면으로 채웠다(여성을 도구로 보는 관점의 문제는 원작의 한계이기도 하다).
이 장면들이 논란이 되자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너무 많이 가리는 건 리얼리티를 해치는 것 같”다고 응답했는데 그 대답이 오히려 문제적이다. ‘리얼리티’와 ‘적나라함’은 다르다. ‘리얼리티’는 인간 사회에 대한 맥락을 파악하게 하는 성찰적 질문으로 이어질 여지가 있지만, ‘적나라함’은 그 장면을 생각 없이 소비하게 할 뿐이다. 결국 <살인자ㅇ난감>의 연출은 트렌디했을지는 모르나, 2010년의 원작은 물론이고 2024년 현재 우리가 고민해야 할 주제마저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 상태로 무지성적·무성찰적 정의에 도취된 ‘히어로’를 탄생시켰다. 이것이 ‘2024년의 리얼리티’라면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오수경 자유기고가·<드라마의 말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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