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여년 장맛 지킨 ‘세 종가’ 마을…‘이지배’ 브랜드 숙성시키다
전의 이씨·충주 지씨·성주 배씨 집성촌
전통 살려 장 만들기 체험행사 등 운영
장독 분양·관리 대행 프로그램도 인기
2년 묵힌 장류 해마다 1억원 이상 판매
예전엔 집집이 된장·간장·고추장을 직접 담그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요즘은 장을 담는 옹기조차 보는 게 쉽지 않다. 이렇듯 시대가 변했는데도 전통방식을 고수하며 600년 넘게 변함없는 장맛을 유지해온 마을이 있다. 충북 증평군 증평읍 송산리에 자리한 ‘장이익어가는마을’이 바로 그곳이다.
증평시외버스터미널에서 택시로 10분 정도 가면 장이익어가는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마을 안으로 걸어갈수록 구수한 장 냄새가 나는데, 멋들어진 기와집과 함께 100개는 훌쩍 넘어 보이는 장독이 방문객을 반긴다. 이 마을은 본래 전의 이씨, 충주 지씨, 성주 배씨가 정착해 살아온 집성촌이다. 뼈대 굵은 세 종가가 600∼650년 전 비슷한 시기에 와 마을을 이뤘고, 지금도 170가구가 살고 있다. 정환희 장이익어가는마을 사무장은 “수백년 동안 씨간장을 지켜온 이 마을은 증편 같은 떡이나 술 등 발효식품으로도 유명했던 곳”이라고 소개했다.
송산리 주민들이 마을 발전을 뒷받침할 공동 자원으로 장류를 만들기 시작한 건 2008년부터다. 이곳에서 재래식 장류를 만들고, 방문객이 오면 장 만들기 등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농촌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오랜 전통을 지닌 종갓집 장을 맛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색다른 체험도 가능하다는 소식에 많은 관광객이 마을을 찾는다. 정 사무장은 “어린이집·노인복지회관 등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이 놀러온다”며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전에는 홍콩에서만 해마다 3000명이 찾았다”고 설명했다.
이 마을 보물인 장류 가공 현장을 둘러봤다. 수많은 장독을 지나면 꼭꼭 숨어 있는 창고가 등장한다. 창고 안에는 짚에 켜켜이 쌓인 동그랗고 노란 메주가 온열을 쬐며 장으로 가공되기 직전의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좋은 장은 잘 띄운 메주로 만든다더니, 메주에는 발효균이 곱게 펴 구수하게 숙성된 냄새가 난다. 장이익어가는마을 사람들은 이 메주로 3월9∼10일에 ‘정월장’을 담근다. 정월장이란 정월대보름 전후에 만드는 장으로, 이 무렵 장을 담그면 상하지 않고 숙성이 잘돼 최고의 맛을 내게 된단다.
정월장 만드는 데는 온 마을 사람이 동원된다. 마을에서 52년 동안 장을 담근 전의 이씨 맏종부인 박연자씨(72)는 정월장을 담그는 핵심 역할을 맡는다. 장맛의 비결이라는 ‘씨간장’도 그가 관리한다. 씨간장은 햇간장을 담글 때 같이 넣는 묵은 간장인데, 잘 발효된 씨간장을 넣으면 비슷한 맛을 낼 수 있단다.
“정월장 만들 때는 모두가 분주해요. 메주를 손질하고 장독을 닦은 뒤 장을 띄우는 것까지 손이 안 가는 곳이 없어요. 이 노고를 눈으로 보면 장 가격이 참 싸다고 느낄 거예요.”
마을 사람들이 직접 만든 장은 2년간 숙성시켜 완성된다. 이 마을에서 출시하는 장류 브랜드는 세 종가의 성씨를 딴 ‘이지배’다. 마을에서 생산한 콩과 고추 등으로 만든 간장·고추장·된장은 매해 1억원 이상 판매될 만큼 인기 있다. 이곳에서 만든 장류는 증평군 고향사랑기부제 답례품으로도 만날 수 있다.
이 마을에 오면 장 담그기 체험도 하고, 장독을 개인별로 분양받을 수도 있다. 내 손으로 직접 된장·간장을 만들고 장독에 발효시키는 전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가능하다. 장독을 분양받으면 최대 2년까지 관리·보관해준다. 된장과 간장의 숙성된 맛을 오랫동안 맛볼 수 있도록 만든 장독 분양 프로그램에는 매년 도시민 20여명이 참여한다. 이뿐 아니라 증평에서 생산된 콩으로 만드는 두부 체험, 고추장 만들기 체험도 준비돼 있다. 체험만 하고 돌아가기 아쉽다면 한옥에서 숙박도 가능하다. 한옥 4채엔 6개 방이 있고, 주말 기준 6만원이면 4인 가족도 여유롭게 머물다 갈 수 있다.
김용호 장이익어가는마을 추진위원장은 “장을 담그는 전통은 집집마다 마을마다 차이가 있지만 조상들이 전수해온 지혜의 결정체”라며 “장 담그는 전통문화를 잘 계승해 지방소멸 위기에도 끄떡없는 마을을 만들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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