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에게 술을 권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청계천 옆 사진관]
▶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의 사진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지난주 김구 선생 부인의 무덤 비석에 대한 이야기는 댓글로 많은 관심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사진보다는 주인공에 대한 호불호가 나뉘어 버렸습니다. 마감 후에 확인한 사실 하나는, 신문에 실렸던 사진에서는 ‘대한민국’ 글자가 비석에서 지워져 있었습니다. 원본에는 있는 표현이지만 일제 강점기라는 상황에서 이미지가 살아남기 위해 궁여지책을 썼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또 하나, 김구 선생과 최준례 여사에 대한 이야기를 검색하던 중 특이한 사이트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본문과 상관없이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제가 [백년사진] 코너를 연재한 것이 이제 겨우 1년이 넘었는데, 무려 4년째 엄청난 작업을 하고 있는 사이트를 발견해 여러분께 소개드립니다. [근대뉴스]라는 사이트인데 주소는 아래와 같습니다. https://www.19c.co.kr/
매일 100년 전 신문 기사 10여 꼭지를 ‘번역’해 올리는 사이트입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 등을 두루 살피면서 의미 있는 기사를 날짜별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저보다 훨씬 충실하게 원본을 복원하는 능력을 갖고 계신 분들 같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읽기 쉽도록 적절한 표기법을 찾되, 원문에 없던 한자를 넣는 친절함도 있습니다. 근대사를 복원하고 싶으신 분들이나, 온고지신의 보고로 신문을 생각하시는 분들께는 도움이 되실 것 같습니다.
▶ 각설하고, 이번 주 [백년사진]에서 고른 사진은 1924년 2월 26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술을 끊으라는 내용의 포스터 사진이 실렸습니다.
금주(禁酒)하시오 사진은 황주 금주선전대에서 발행한 술 먹지 말라는 포스터(선전지)이다. 우으로는 청년 남녀가 술집으로 들어가서 나중에는 큰 술 만드는 그릇쪽에 사로 잡힌 바되여 필경 살인, 강도, 거지, 도박자, 부랑자, 광인이 되어 나오는 것이다. |
▶ 술 항아리 위에 조선의 청년 남녀들 얼굴이 열 명 정도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술 항아리 아래에도 청년 남녀들 얼굴이 열 명 정도 그려져 있습니다. 사진 설명에 따르면, 멀쩡한 청년들이 술 항아리를 통과하면, 반드시 살인자나 강도, 거지, 도박꾼, 부랑자, 미친 사람이 되어 나오게 된다는 직설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포스터입니다.
지금으로 하면 지자체에서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술을 작작 마시라’는 캠페인을 하는 건데,
아마 지금 시대에 누군가 이런 식의 주장을 한다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마약 방지 캠페인이 요즘 많은 것을 고려하면, 100년 전 기성세대들은 조선 청년들이 ‘술독에 빠져드는 세태’를 걱정했던 모양입니다. 포스터는 뭔가 촉구하거나 하지 말자는 내용을 담는데, 특정한 시대의 고민을 반영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요즘에는 음주 자체에 대한 포스터 보다는 음주 운전을 하지 말자는 포스터가 많습니다. 마약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포스터도 꽤 많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간첩신고를 촉구하는 포스터가 많았지만, 지금은 줄었다는 것도 시대의 변화일테구요.
▶ 포스터에서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은 내용이 있습니다. 화면의 가운에 있는 ‘작구 들어라’의 글 옆에 있는 두 사람에 대한 설명 말입니다.
술 항아리 좌우에서 외국인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마치 수동 믹서기를 작동시키듯이 큰 손잡이를 돌리고 있습니다. 화면에서 제일 큰 얼굴인데 정작 이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사진 설명은 없습니다. 궁금해집니다. 누구를 표현한 걸까요? 저 사람들은 누구인데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술을 자꾸 마시라’라고 유혹하고 있는 걸까요?
▶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저는 왼쪽 콧수염 인물은 일본, 오른쪽 담배 연기를 뿜는 사람은 미국인처럼 느껴집니다. 조선 사람들보다 멀끔한 얼굴의 일본 사람, 모자를 쓴 채 곰방대 연기보다 큰 ‘시가’ 연기를 내 뿜는 미국 사람. 저는 그런 가정을 해보았습니다.
그런 상상을 하며 포스터를 다시 보니 이 포스터는 조선 청년들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걱정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외세에 대한 원망이기도 합니다. 제 해석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1920년대에 미국에 대한 반감이 우리 사회에 있었는지, 그걸 그림으로 표현할 정도로 강했는지 사실 확신은 못 하겠습니다. 이미지라는 게 원작자의 설명이 명확하지 않으면 이런저런 해석이 가능한 한계이자 특징이 있습니다. 혹시 틀렸더라도 너무 나무라지는 말아주시면 좋겠습니다.
▶ 그런데, 이 포스터는 왜 갑자기 신문에 실린 것일까요? 관련 기사도 없이 황주에서 금주 캠페인이 일어났다며 관련 포스터를 지면에 실은 것은 무슨 맥락이었을까요? 황주는 서울이나 경기도가 아니고 황해도에 있는 군 단위 지역입니다. 조선의 중심도 아닌 지방에서 일어난 일인데 왜 이 캠페인이 중앙지에 실린 것일까요? 여러 가지가 또 궁금해졌습니다. 이것저것 찾다 보니 조선일보에서 약 3주 전 관련 기사를 실었습니다. 조선일보 1924년 2월 5일자에 실린 “황주 금주선전대 행렬‘ 기사를 인용하겠습니다.
■황주 금주선전대 행렬 황주 장날에 수천명이 모히여서 금주선전기를 들고 삐라를 배포 황해도 황주에서는 지난달 26일 황주 장날을 이용하여 금주선전대의 주최로 금주선전 운동이 있었는데, 그날 선전대원들은 12시부터 사립 양성학교 교정으로 모여 들기 시작하여 군중은 수백여 명에 달하였고 각색으로 만든 금주선전기를 높이 들고 학생들은 조그마한 기(旗)에 금주가를 써 들고 그것을 고창하며 일변 가장행렬을 준비하여 오후 1시가 되자 대장 김경재씨가 단에 올라 장차 진행할 방침을 설명한 후 악대를 선두에 세우고 가장 행렬을 하는데, 각 학교 학생이 그 뒤를 따르고 또 그 뒤에는 각 후원단체어에서 나온 사람이 선후 일변 선전‘삐라’를 뿌릴 즈음에 경찰 당국의 경계는 극히 엄중하여 서장 이하 서원 전부가 나와서 골목골목이 지켜서서 무서운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으나 갈수록 증가되는 군중은 무려 수천 명에 달하였었고, 다 시장꾼까지 합하면 수만여 명이 되얐는데 ‘오는 갑자의 신년부터는 술먹지 말고 항상 몽롱한 생각으로 지내지 말어 사람다운 생활을 하여보자’는 부르짓음은 이모퉁이 저모퉁이 이어서 종일 계속 되었으며 저녁때에는 흰눈이 펄펄 날림에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그 모양으로 행렬을 마치고 오후 5시경에 양성학교 뜰 앞에 모이어 기념사진 까지 박은 후 대장 김경재씨의 발성으로 금주선전대만 만세를 삼창 한 후에 헤어지고 제등 행렬과 선전강연은 다시 후일로 연기하였다더라. |
▶ 기사를 자세히 읽어보면, 1924년 1월 26일 황해도 황주에서 ‘금주 캠페인’이라는 이름으로 장이 열리는 날을 맞아, 사람들이 모여 거리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구호를 외쳤습니다. 사람들에게 읽을거리인 ‘삐라’도 맘껏 뿌렸나 봅니다. 원래는 제등 행렬과 강연회를 하겠다고 해놓고선 실제로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하루종일 거리에서 위력 시위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제 강점기라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정치적 구호는 없되 정치적 행동을 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때 사용된 포스터 역시 분명하게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고, 세태를 한탄하는 것 같지만 최종 지향점은 외세에 의해 망가져 가는 조선을 지키자는 메시지 같습니다.
▶ 오늘은 100년 황해도의 한 지방에서 벌어졌던 ‘금주 캠페인’ 시위에 활용된 포스터 사진을 통해, 이미지라는 게 모호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행간을 읽는다는 것은 책의 행과 행 사이에 있는 숨은 뜻을 읽는다는 뜻이지만, 100년 전 금주 포스터와 가장행렬에서도 읽어야 할 행간의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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