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플 이즈 더 베스트 '라스트 에포크'
소비자들의 니즈를 충족하는 제품은 실패하지 않는다. 비록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지라도 입소문을 타다 보면 언젠가 주목을 받기 마련이다. 이는 게임도 마찬가지다. 게이머들이 원하는 게임은 언젠가 한 번은 빛을 본다.
일레븐스 아워 게임즈 '라스트 에포크'도 그 사례 중 하나다. 거의 대부분의 유저들이 라스트 에포크가 이렇게 성공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5년 간의 얼리액세스에서 누적 100만 장을 돌파했어도 이 정도 붐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한 이들은 드물 것이다.
2월 21일 정식 출시한 라스트 에포크는 20만 명이 넘는 스팀 동시 접속자를 기록하며 인기 게임 대열에 합류했다. PC 게이머는 '인슈라오디드', '펠월드', '헬다이버즈2'에 이은 2024년 네 번째 브레이크 아웃 게임으로 선정했다.
핵앤슬래시 장르에는 '디아블로'와 '패스오브엑자일(POE)'라는 거대한 양대 산맥이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다. 신생 핵앤슬래시 IP가 이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란 낙타가 바늘 구멍 통과하는 것 만큼 어렵다.
라스트 에포크는 두 거대 IP 사이를 비집고 당당히 차트 상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이 게이머들의 니즈를 충족시켰기 때문이다. 디아블로와 POE, 두 게임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무언가가 있었다.
장르 : 핵앤슬래시, ARPG
출시일 : 2024년 2월 21일
개발사 : 일레븐스 아워 게임즈
플랫폼 : PC
■ "자르고 벤다" 장르의 원초적 재미에 집중
라스트 에포크 특징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심플함'이다. 장르 핵심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과감하게 들어냈다. 캐릭터 커스터마이징도 약식이고, 귀찮은 수집 요소나 번거로운 서브 퀘스트도 없다. 사망 시 경험치, 혹은 아이템을 떨구는 등의 페널티도 아예 없다.
직업과 전직 개념인 전문화를 제외하면 스킬 포인트 롤백도 자유롭다. 초보자가 "스킬 잘못 찍었는데 망했나요"라는 질문을 할 필요도 없다. 소량의 골드만 지불하거나 초기화로 재분배할 수 있다.
덕분에 유저는 장르 이름에 걸맞게 오롯이 몬스터를 자르고 베는 데 집중하면 된다. 오직 그 뿐이다. 게임 초반부터 스킬을 원하는 대로 난사 가능하다. 초반 마나 등의 자원 부족에 허덕이는 여타 핵앤슬래시 게임과는 다르다.
핵앤슬래시 양대 산맥인 디아블로4와 POE에는 없는 것이 바로 이 심플함이다. 디아블로4는 비교적 덜 복잡하지만 화끈하게 몬스터를 썰어 제끼는 맛이 부족했다, 반대로 POE는 속도감과 타격감 하나는 최고지만 복잡한 게임 시스템으로 인해 진입장벽이 너무 높다.
핵앤슬래시 게임의 꽃인 크래프팅도 접두사 2개와 접미사 2개라는 간단한 체계를 사용했다. 접사와 접미를 붙여 아이템 옵션을 정하는 직관적인 크래프팅도 매력적이다. 크래프팅에 필요한 커런시 요소도 너무 복잡하지 않다.
라스트 에포크는 이 심플함 하나로 유저들을 사로 잡은 것이다. 디아블로4는 뭔가 심심하고, POE는 너무 어렵게 느껴지던 유저들이 대거 라스트 에포크로 향하게 됐다. 개발사가 유저들의 니즈를 제대로 캐치한 셈이다.
■ 디아블로와 POE의 균형잡힌 절충안
콘텐츠적으로도 라스트 에포크는 디아블로와 POE, 두 게임의 중간 지점에 놓여있다. 디아블로보다는 콘텐츠 수는 적지만 깊이가 있고, POE보단 훨씬 단순해 진입장벽 없이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다.
라스트 에포크는 현 시점에서 딱 두 개의 엔드 콘텐츠를 제공한다. '모놀리스'라는 맵핑 콘텐츠와 아레나 콘텐츠다. 핵앤슬래시 장르를 해왔던 유저들에게는 꽤 익숙한 콘텐츠다.
하지만 맵핑 콘텐츠는 디아블로 시리즈에는 없고, POE의 맵핑은 복잡해 혀를 내두를 정도다. 그 사이에서 라스트 에포크는 꾀를 잘 냈다. 심플 기조는 맵핑에서도 이어진다. 난도는 딱 두 개만을 제공하고, 오염도를 올려 적이 강해지는 대신 추가 보상을 얻을 수 있다.
매력적인 요소지만, POE는 시즌마다 여러 맵핑 요소가 사리지고 추가되길 반복한다. 마니아들에게는 이 만한 콘텐츠가 없지만, 대부분의 유저들에게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라스트 에포크는 이런 콘텐츠를 심플하게 만듬으로서 여러 중도 유저를 흡수할 수 있었다.
아레나는 디아블로3의 '대균열'에 가까운 콘텐츠다. 아레나 열쇠를 사용해 던전에 입장하면 몬스터가 몰려오는 웨이브를 막아내야 한다. 5웨이브 단위로 클리어할 때마다 보상을 받을지, 다음 단계로 넘어갈지 선택해야 한다.
높은 단계로 올라갈수록 더 좋은 보상을 받지만, 다음 보상을 받을 때까지 버티지 못하고 죽으면 그 동안의 시간은 물거품이 된다. 설명만 들으면 단순 주회 콘텐츠로 볼 수 있지만, 대균열만큼 지루하게 이어지진 않는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 수 있는 능력과 여러 특별한 기믹으로 인해 파고드는 재미가 있다. 비록 투자 시간 대비 보상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비판이 있어도, 도전 콘텐츠로서 랭킹에 도전하는 재미는 확실하다.
종합하자면 라스트 에포크의 콘텐츠는 너무 지루하지도 않고, 너무 복잡하지도 않다. 보통 특출난 것 없이 애매한 스탠스의 게임은 보통 무색무취가 되기 마련이다. 라스트 에포크는 그 애매함이 그동안 핵앤슬래시 게임에는 없었다는 사실을 잘 캐치했다.
■ 게임 진행에 방해되는 끔찍한 번역
물론 게임이 완벽하진 않다. 한글 번역 퀄리티가 매우 미흡하다. 어차피 내러티브보다 콘텐츠가 중요한 핵앤슬래시 장르에서 "번역이 대수냐"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이는 콘텐츠적으로도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에 반드시 수정이 필요하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키워드다. 'Necrotic'이라는 단어 하나가 한글 번역에서는 '괴사', '부패', '네크로틱' 무려 세 개 단어로 혼재돼 있다. 모두 동일한 키워드임에도 다른 단어처럼 적혀 있으니 유저들은 아이템 선택 시 혼동이 올 수밖에 없다.
번역 자체의 수준이 낮다보니 원활한 아이템 파밍과 크래프팅을 위해 영어 원문을 꼼꼼하게 살펴야하는 번거로움이 발생한다. 기자 역시 모아놓은 아이템을 허투로 낭비하지 않기 위해 영문 사이트를 자주 방문했다.
그 외에도 콘텐츠 진행 시 퀘스트 조건도 소위 '발번역'인 탓에 머리를 더 아프게 만든다. 한글 번역으로 '어떤 던전'이라고 적혀 있는 조건은 원문에서는 'Any dungeons', 즉 아무 던전이나 들어가면 된다는 의미다.
한글로 보면 이게 특정 던전을 의미하는 건지, 아무 던전이나 들어가도 된다는건지 도무지 알 방법이 없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니 나중에는 영문판으로 진행하는 것이 훨씬 수월했다.
다행이 개발사도 이를 인지하고 한국어를 포함한 일부 번역의 품질을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추가 콘텐츠 업데이트도 중요하지만 보다 매끄러운 게임 진행을 위해 최대한 빠른 속도로 현지화 개선이 적용될 필요가 있다.
1. 심플하지만 깊이있고 짜임새 있는 콘텐츠 구조
2. 직관적인 시스템으로 누구나 쉽게 게임에 적응할 수 있음
3. 폭넓은 빌드 다양성과 만족스러운 성장 경험
1. 플레이에 방해가 될 정도로 미흡한 한글 번역
2. 불안정한 서버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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