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묘'보다 힙한 굿판 끝낸 장사익 "아듀 형님, 20년 잘 놀았소"
[비욘드 스테이지] ‘흑우’ 김대환 마지막 추모공연
신중현·조용필과 활동한 1세대 밴드 드러머
“할리의 소리는 사나이들의 심장고동 소리거든요. 형님은 거기 마이크를 대고 연주를 했었죠. 매연 때문에 싫은 소리도 듣고 건강도 해쳤지만, 그만큼 남들이 안 하는 창의적인 걸 추구한 겁니다. 형님이 만드신 소리들은 엄청 환상적이었어요. 쓰고 다니는 헬멧에 ‘두두두두’ 떨어지는 빗소리를 구현하려고 한꺼번에 스틱 6개를 잡는 주법을 혼자 개발해서 빗소리, 천둥소리를 만들어내셨죠. 백남준 선생 같은 ‘또라이’ 부류랄까요.” 이 공연을 기획한 장사익의 말이다.
김대환 정신은 국경을 넘나든다. 국내 대표적인 계승자는 국악 연주자 허윤정·강은일이다. 국악 엘리트인 이들이 지금 종횡무진 장르를 넘나드는 실험으로 세계적인 전위음악가로 인정받게 된 것이 김대환 정신의 영향이다.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이자 일본의 중요무형문화재인 노가쿠(能楽) 연행자인 타악 명인 오쿠라 쇼노스케도 동료 연주자들을 잔뜩 데리고 왔다. 이들이 별다른 리허설도 없이 무대에 서는데, 익숙한 자기 레퍼토리 뿐만 아니라 즉흥으로 잼 세션을 펼친다. 허윤정의 거문고 솔로를 오쿠라 쇼노스케의 고츠즈미(小鼓)와 재일교포 민영치의 장구 합주가 더해져 마무리하는 식이다.
“백남준 같은 또라이” 창조적 뮤지션에 영감
장사익과 흑우의 만남은 ‘좋은 인연’ 이상이다. 온갖 직업을 전전하다 마흔살 넘어 가수로 데뷔한 장사익이 진짜 음악에 눈뜨고 자신만의 세계로 인정받게 된 계기를 마련해 준 게 흑우다. “사물놀이를 따라 다니면서 태평소를 불 때 형님을 만났는데, 뒤풀이에서 내 노래를 듣더니 인사동 아리랑 박물관으로 부르더군요. 그때 형님 말씀따라 동요 ‘송아지’를 박자 없이 부르면서, 틀이 깨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 후로 국악도 재즈도 가요도 아닌 내 나름대로의 노래를 만들게 됐죠. 언젠가 조영남씨가 ‘넌 어떻게 노래를 그렇게 부르냐’고 하시던데, 결국 내 호흡으로 가 닿는 게 노래거든요. 요즘 날씨도 봄같이 포근하다가 갑자기 눈도 내리잖아요. ‘철모른다’는 말도 있지만, 사계절이 꼭 제때 오지 않는 게 자연의 호흡인 것처럼, 노래도 그래요. 그런 소중한 음악적 가르침을 준 게 형님이죠.”
타악 명인 오쿠라 “일본서 추모 이어갈것”
공연 전체가 김대환에게 바치는 제사랄까. 하긴 모든 공연의 시작은 제의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마지막을 선언한 만큼 제대로 한바탕 씻김굿이 펼쳐졌다. 최선배·이광수·김광석 등 흑우의 동료 음악가와 웅산·이정식 등 재즈 뮤지션들도 한껏 분위기를 달궜다. “김대환이 남긴 자유스런 음악이 어떻게 계승되는지를 보여주는 무대거든요. 옛날에 좀 이상한 놈으로 통하던 사람들을 지금 인정하는 세상이 됐잖아요. 벽에다 낙서하고 도망가는 것도 예술이니까. 괴짜들이 즉흥적으로 판을 짜서 잼을 해야 더 흥미진진하죠. 옛날 소극장 공연도 그런 형태였고요. 이번에는 형님 진짜로 떠나 보내드리는 의식이라고 생각하고 형님과 인연 있는 이름 없는 사람까지 다 불렀어요. 일본 전통음악이 우리와 어떻게 접목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의미도 있다고 봅니다.”
장사익의 말대로 김대환은 1980년대 한국보다 일본에서 먼저 알려졌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선 생소한 음악을 배척했지만, 월드뮤직에 일찌감치 열린 자세였던 일본 뮤지션들에게 김대환의 음악이 크게 어필했고, 당시 추종자들이 지금까지도 ‘아버지’로 모시고 있다.
오쿠라 쇼노스케는 “나는 일본 전통음악을 하지만 자연의 소리를 음악에 끌어들이고 동서양의 구분을 넘어서는 김대환의 자유로운 정신에 큰 영향을 받았다. 남자다운 분위기도 먼저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를 닮아 아버지라 불렀다”면서 “장사익 주최 콘서트는 올해로 끝나지만, 나는 제사 지내러 계속 올 것이다. 5월에 야마구치에서도 김대환을 기리는 공연을 한다. 한국에서 추모공연을 끝낸다면 일본에서 이어가며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김대환 정신을 알리는 일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20주기 추모공연의 피날레는 장사익의 ‘봄날은 간다’ 절창 후 아리랑 떼창이 장식했다. 3·1절에 자기네 전통의상을 입은 일본인들과 함께 부르는 아리랑이라니. “늘 마지막 노래는 아리랑을 불렀어요. 3·1 절에 게다 신은 일본인들이 자기네 전통예능을 공연하니 초창기엔 관객들한테 때려치라는 소리도 들었지만, 마지막에 다같이 아리랑을 부르며 씻어버리는 거죠. 특별한 날에 우리 민족의 노래를 부르는 일본인들도 대단해요. 만일 반대 경우라면 우리나라에선 난리가 났겠지만 일본인들은 음악에 대해 그런 게 없더군요. 여기에 숨은 의미도 있어요. 그 옛날 대환 형님이 한국과 일본이 음악을 통해 먼 장래에 우의를 도모하게 하신 거죠.”
막상 ‘마지막’을 선언했지만, 장사익도 못내 아쉬운 눈치다. “학계에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런 무대가 참 소중해요. 형님의 음악을 기리는 일이 오래 지속됐으면 좋겠어요. 지금과 같은 국악 현대화, 대중화의 계기를 마련하신 분인데, 그로 인해 생겨난 창조적인 음악을 다시금 새기고 학생들이 알고 배우게 할 필요도 있거든요. 우리가 세계에 내놓을 만한 게 이런 거잖아요.”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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