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의역사저널] 3·1운동을 기억하는 서울의 현장들
태화관·탑골공원 등 자취 남아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은 전 세계적으로 보아도 식민지를 경험한 국가 중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이었다. 전국 곳곳에는 그날을 기억하는 역사의 현장이 많이 남아 있는데 서울에도 태화관(太和館), 탑골공원 등 그날을 기억하는 곳들이 있다.

1919년 3월1일 선언서를 낭독할 장소가 바뀌었다. 원래 예정된 탑골공원에서 거사를 할 경우 폭력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는 의견이 제시되었고, 결국 민족대표들은 요릿집 태화관으로 장소를 옮겼다. 현재 인사동에 있는 탑골공원은 세조 때 이곳에 원각사(圓覺寺)와 10층석탑을 세운 것에서 유래한다. 원각사 절은 사라졌지만 국보 2호로 지정된 10층석탑은 지금도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원각사지 10층석탑은 이후 서울을 상징하는 랜드마크가 되었는데, 탑이 희게 보인다고 하여 ‘백탑(白塔)’으로도 불렸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북학파 학자 박지원은 이곳을 중심으로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의 제자들을 양성하여 ‘백탑파’로 지칭되었다.
민족대표들은 오후 2시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고, 선언서 낭독 후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스스로 체포되는 길을 택하였다.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로 시작하는 ‘삼일절 노래’의 가사 때문에 3·1운동의 시작을 낮 12시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는 오후 2시에 선언서 낭독이 있었다. 태화관이 위치했던 곳에는 현재 ‘태화빌딩’이 들어서 그 이름을 계속 이어 가고 있다.
태화빌딩 앞에는 ‘순화궁(順和宮) 터’라는 표지석이 있다는데, 순화궁은 조선의 24대 왕 헌종(憲宗)의 후궁인 경빈(慶嬪) 김씨가 헌종 승하 후 궁궐에서 나와서 1907년 76세로 사망할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경빈 사후 순화궁은 이완용의 소유가 되었다가, 요리 전문점 명월관(明月館)의 분점 태화관이 되었다. 해방 후에는 경찰서 청사, ‘태화기독교사회관’ 건물로 활용이 되었으며, 현재는 ‘태화빌딩’이 들어서 있다. ‘태화’라는 이름이 100년을 넘어 계속 이어짐을 볼 수 있다.
3월1일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학생들과 시민들은 선언서 낭독 후 시가행진을 하면서 시위를 주도해 나갔다. 고종의 빈소가 마련된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는 고종에 대한 추모 이후 시위를 이어 갔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서울역을 통해 모여들었다.
서울 북촌 위쪽에 자리한 중앙고등학교도 3·1운동의 현장이다. 1919년 1월 동경 유학생 송계백(宋繼白)은 중앙고를 찾아와 교장 송진우와 교사 현상윤에게 당시 동경 유학생들이 준비하고 있던 2·8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전달했고, 중앙고등학교 숙직실에서는 독립운동이 준비되었다. 학교 구내에 ‘3·1운동 책원지(責願址)’라는 표지석이 있다.
성북동에 가면 한용운(韓龍雲)의 거처 심우장(尋牛莊)을 찾을 수 있다. 최후까지 일제에 저항한 선생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으로, 집은 북향을 하고 있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보기 싫어하여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05주년 3·1절을 즈음한 시기에 서울 도심 곳곳에 남아 있는 역사 현장들을 찾아보았으면 한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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