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의 각축장 된 조선… 130년 전 그날의 기록

김용출 2024. 3. 1.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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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경복궁 침입 고종 확보한 일본군
침략을 우발적 사건인 듯 왜곡한 日정부
풍도해전·아산전투 거쳐 압록강까지
청·일이 싸웠지만 최대 희생자는 조선
관련 국내 연구 中·日 비해 턱없이 부족
한국인 시각에서 실증적으로 사료 분석

조선인들의 청일전쟁/조재곤/푸른역사/3만9000원

“새벽에 일본 병사 몇천 명이 와서 경복궁을 지키고 영추문 밖에 이르렀는데, 자물쇠가 열리지 않자 나무 사다리를 타고 궁궐 담장을 넘어 들어왔다. 또 동소문은 불을 질러 돌진하여 자물쇠를 부수어 문을 열고, 임금이 계시는 집경당의 전폐 아래로 곧장 들어와 빙 둘러 호위하고 각각의 문을 지켜 서고 조신과 액속 모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기영 병정 중에 신남영에 있던 자는 곧장 건춘문으로 들어와서 일본 병정을 향해 발포했다.”

1894년 7월23일 새벽 4시, 일본군 보병 제21연대 제1대대 병사들은 전날의 계획대로 사다리를 타고 경복궁 담을 넘어 들어왔다. 일본군은 이어서 궁궐 안에서 조선 수비병과 교전을 벌였다고, 조선의 ‘갑오실기’는 기록하고 있다. 경복궁을 침입한 일본군은 이날 국왕 고종의 신병을 확보하는 한편, 4대문과 조선군 숙영지를 점령함으로써 조선군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 정부는 이날 대본영을 설치한 뒤 이듬해 4월까지 운용했다.
대고산의 일본군과 조선·청나라의 인부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주도면밀한 보도 통제와 왜곡된 기록을 통해서 진실을 은폐했다. 마치 경복궁 안의 조선 병사가 먼저 발포했고, 이에 영추문 앞에 도착한 일본군이 응전하며 궁으로 진입해 조선 병사를 내쫓고, 대신 왕궁을 경비하게 됐다고 선전했다. 일본 외무대신은 우발적 사건으로 축소해 보고하고 기록했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을 시작으로 청일전쟁이 시작됐다. 일본군은 7월25일 경기도 남양만의 풍도에서 풍도해전, 7월29일 충청도 성환 및 아산 전투 등에서 잇따라 승리한 뒤 8월1일 뒤늦게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했다.

일본은 이미 조선에서 중국을 물리치고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치밀하게 기획하고 준비했다.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한 다음 날인 6월2일 밤, 가와카미 소로쿠 일본군 참모본부 차장은 무쓰 무네미쓰 외무대신의 관저에 비밀리에 방문해 무쓰, 하야시 다다스 외무차관과 함께 조선 출병에 뜻을 모았다. 6월5일 이토 히로부미 총리가 7000∼8000명에 이르는 1개 혼성여단과 함께 출병하는 오토리 게이스케 공사에게 일본의 영예와 이익을 상하지 않는 한 될 수 있는 대로 일을 원만하게 해결해야 한다고 지시했지만, 무쓰 외무대신은 별도로 구두훈령을 내렸다. 평화보다 승리에 우선을 두라고.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모습. 푸른역사 제공
“마지막까지 평온함을 바라지만, 우리나라는 이전 두 차례 훼손된 면목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국에서는 우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 나아가 평화를 파괴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내가 충분히 책임을 질 것이기 때문에, 각하는 오히려 과격하다고 생각해도 고려할 바 없이 과감한 조치를 맡아야 할 것입니다.”

청일전쟁은 정보와 전략, 기동성, 군수 등에서 압도한 일본군 승리로 빠르게 전개됐다. 일본군은 9월 청나라 군사가 주둔하고 있던 평양으로 진격했고, 압록강 하구에서 청나라 북양함대를 격파해 제해권을 확보했으며, 10월 하순 압록강을 넘어선 뒤 11월 랴오둥반도와 뤼순항을 공격해 점령했다. 이듬해 웨이하이요새로 피신한 북양함대를 공격해 요새를 함락했고, 다시 3월 말 타이완에 상륙해 점령했다. 결국 4월17일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됐다. 청나라는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이라는 것을 확인했고, 배상금 2억냥을 지급했으며, 랴오둥반도·타이완 등을 할양했다.

청일전쟁은 그야말로 한·중·일 동북아 3개국의 근현대 운명을 가른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청나라는 ‘섬나라’ 일본에 참패한 것을 계기로 동북아에서 주도권을 잃고 패망으로 내몰렸고, 반대로 일본은 압승을 바탕으로 러일전쟁 등을 거쳐서 군사 제국주의로 내달렸다. 조선 역시 엄청난 파장에 휩싸였다. 전쟁 결과 대한제국이 선포되지만 러일전쟁 등을 거치면서 일본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는 점에서 조선에게도 결정적인 전쟁이었다.
폭행한 청국군을 참수하는 일본군.
한 발 더 들어가 보면, 청일전쟁은 단순히 일본과 청나라간 전쟁이 아니라,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조선에서 벌어진, 많은 조선인이 피해를 입은 우리의 전쟁이기도 했다. 직접적인 인명 손실은 물론, 물자와 지역민 동원, 군대의 약탈 등도 엄청났고, 동학농민전쟁이 맞물리면서 수많은 조선 사람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청일전쟁에 대한 국내 연구는 턱없이 미흡했다. 대체로 중국 출신의 진순신이 쓴 군담류 소설 ‘청일전쟁’을 읽거나, 일본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본 학자들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임종국상을 수상한 서강대 국제한국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출신인 저자는 신간 ‘조선인들의 청일전쟁’에서 한국인의 시각으로 130년 전 이 땅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을 실증적으로 분석한다.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정세가 심각한 데다가, 청일전쟁 전체를 조감할 수 있는 책이 많지 않은 국내 상황에서 반가운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조재곤/푸른역사/3만9000원
저자는 이를 위해 공문서는 물론 사적인 일기, 참전병 기록, 당시 신문기사 등 치밀하고 꼼꼼한 사료 수집, 기존 중국과 일본의 연구 성과를 섭렵해 전쟁 전반을 온전히 그려낸다. 다만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을 시작으로 압록강 전투까지만 중점적으로 다루고, 이후 중국 본토에서 벌어진 전투나 황해 해전, 시모노세키 조약 등을 소략한 것은 다소 아쉽다.

책에는 청나라 제당파와 후당파간 갈등이나 경복궁 점령 직후 민심을 달래기 위해 일본군이 실시한 빈민 구호 사업, 평양전투 전과를 허위 보고한 청나라 예지차오의 말로 등 새로운 사실도 적지 않다. 아울러 성환전투에서 진격의 나팔병졸로 알려진 시라카미 겐지로가 실은 안성천을 건너다가 익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내용이나, 무려 100명이 넘는 특파원을 보내서 일본에 유리하게 여론을 조성하는 모습 등 일본 군국주의의 민낯을 보여 주는 읽을거리도 적지 않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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