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통일 흔적 지우기' 가속화… 기념우표 이어 헌법 세부조항도 사라져

이강진 2024. 3. 1. 21:5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정은 “헌법서 ‘통일’ 표현 삭제” 지시에
남북교류 상징 등 북한서 빠르게 사라져
범민련은 해산…‘괴뢰한국’ 표현은 늘어
“북한 내부 엘리트 혼란 불러올 가능성”
북한의 통일 관련 흔적 지우기가 가속화하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통일 관련 표현을 헌법에서 지워야 한다고 강조한 뒤 남북교류 등을 상징하는 내용이 곳곳에서 빠르게 사라지는 모습이다. 최근에는 북한 헌법 세부 조항을 확인할 수 있는 선전 매체 홈페이지 내 관련 코너가 비공개 처리되면서 북한이 본격적인 개헌 작업에 착수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김정은 “헌법에서 ‘자주·평화통일’ 표현 삭제해야”

북한이 ‘통일 지우기’에 발 빠르게 나선 데는 김 위원장의 강도 높은 지시가 영향을 미쳤다. 1일 북한 관영매체 조선중앙통신 등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지난해 연말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남북관계를 ‘적대적, 교전 중인 두 국가관계’로 정의한 데 이어 올해 1월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0차 회의 시정연설에선 “우리 공화국의 민족력사에서 통일, 화해, 동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완전히 제거해 버려야 한다”고 언급했다. 

시정연설 당시 김 위원장은 헌법에서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과 같은 표현을 삭제하고 한국을 “철두철미 제1의 적대국”, “불변의 주적”으로 간주하도록 교육한다는 내용을 반영해야 한다고 지시하기도 했다.

이후 북한 선전 매체 ‘내나라’는 홈페이지 메인 화면 하단에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 헌법’ 아이콘을 클릭해도 헌법 세부 조항을 볼 수 없도록 조치한 것으로 전해졌다. 메인 화면뿐만 아니라 정치 메뉴 내 하위 카테고리인 ‘사회주의 헌법’ 부분 역시 비활성화돼 있는 상태다. 그 외 ‘통일’ 또는 ‘한민족’ 등의 단어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 정치 메뉴 내 현대 역사, 해외 동포 카테고리도 모두 확인할 수 없도록 조치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지난 2월 29일 평안남도에서 지방공업공장 건설 착공식에 참석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평양=노동신문·뉴스1
‘헌법 내 통일 표현 삭제’라는 김 위원장의 지시 사항을 이행하기 위한 개헌은 입법권을 가진 북한 최고인민회의에서 심의가 이뤄져야 가능하다. 아직 최고인민회의가 개헌 심의를 완료하지 않았음에도 내나라가 헌법 내용을 볼 수 없게끔 조치한 것은 현행 헌법을 외부에 더는 공개하지 않겠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통일운동을 추진해온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의 남측본부도 최근 해산했다. 북한이 김 위원장 지시에 따라 올해 초 범민련 북측본부를 비롯한 통일 관련 단체를 일제히 정리한 데 따른 조치로 풀이된다. 범민련 남측본부는 해산 뒤 한국자주화운동연합(가칭)을 결성해 사업을 계승하기로 했다.

1990년 11월 출범한 범민련은 남·북·해외에 본부를 두고 운영돼왔다. 대법원은 1997년 범민련 남측본부를 국가의 존립·안전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인 해악을 끼칠 위험성이 있는 이적단체로 규정한 바 있다.
지난 2018년 북한이 남북정상회담을 기념해 새 우표들을 발행했다. 사진은 개별우표 1종 이미지. 평양=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남북정상회담 기념우표도 사라져…‘괴뢰한국’ 표현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업적 등을 선전할 목적으로 발행하는 기념우표에서도 통일 관련 흔적들이 삭제되고 있다. 현재 북한 조선우표사가 운영하는 홈페이지에서는 한반도, 통일 등 한국과 연관 있는 주제로 제작한 우표를 찾아볼 수 없다. 북한이 2000년, 2007년, 2018년 열린 남북정상회담을 기념해 발행한 우표 등도 홈페이지에 나오지 않는다. 

북한이 남측을 최근 ‘괴뢰한국’이라는 부르는 경우도 부쩍 늘어났다. 괴뢰(傀儡)는 꼭두각시놀음의 여러 인형을 뜻하는 단어로, ‘남이 부추기는 대로 따라 움직이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른다.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지난달 23일 “괴뢰한국의 한 양심수후원회가 17일 결의문을 발표해 각계가 반미반전 투쟁에 힘차게 떨쳐나설 것을 호소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북한은 과거 남측을 주로 ‘남조선’이라 불렀으며, 괴뢰한국이라는 표현은 2011년 대외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가 한 차례 썼을 뿐이다. 하지만 지난해 7월쯤부터 남조선이라는 표현이 조선중앙통신 등 공식 관영 매체에서 사라지다시피 했다.

이규창 통일연구원 인권연구실장은 지난 1월 보고서를 통해 북한의 통일 폐기 행보는 1960년대 국적법 개정, 개헌 등을 통해 독일 내 두 국가가 성립됐음을 선포한 동독과 유사하다며 “(북한도) 헌법상 통일조항을 삭제 또는 개정하고 한국 국민을 북한 공민으로 간주하는 국적법을 개정해 두 국가관계의 법적 조치를 뒷받침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 뉴시스
정부는 북한의 ‘통일 지우기’가 북한 내부 엘리트 사이 혼란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은 지난달 25일 KBS ‘일요진단 라이브’에 출연한 자리에서 김정은 정권이 김일성의 통일 관련 업적을 기리는 평양의 ‘조국통일3대헌장 기념탑’을 철거한 조치 등에 대해 “세습 권력의 기반이 되는 김일성·김정일의 업적을 지우는 것은 북한 내부 엘리트 사이 이념적 공백이나 혼란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김 장관은 “(북한) 내부적으로 갈등이 생기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군사적 도발을 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며 “정부는 상황을 매우 심각하게 보고 있고, 이에 대응한 철저한 군사적 억제책 등 대책을 마련해 두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강진 기자 jin@segye.com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