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과 빛의 파동 좇는 시선… 바라봄에 대해 묻다 [박미란의 속닥이는 그림들]

입력 2024. 3. 1. 21:01 수정 2024. 3. 2.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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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민, 바라봄의 바깥을 상상하는 회화
수평과 수직 넘나드는 시선의 변주
멀리 조망하다 또 한발 다가가 탐험
보는 방식에 따라 멀어질 듯 닿을 듯
다양한 화면 결합해 만든 거시적 구조
평면 너머의 차원으로 확장하는 감각
붓으로 밑그림 후 에어브러시 채색
안개 같은 모호함 속 또렷한 색면
“이해할 수 없는 것, 감각하려는 시도”
사진=에브리아트 제공
◆시야 너머의 일들

두 눈을 감으면 까만 우주가 보인다. 별 하나 뜨지 않는 어둠 속에서 감각이 긴 꼬리를 늘어뜨린다. 회화가 주는 울림, 바라봄 이후의 일들은 사실 눈 감아야 보이는 몸의 우주 안에서 일어난다.

첫 바라봄의 순간에 박석민(42)의 회화적 사건은 화면보다 장소에 대한 경험에 가깝다. 벽면을 메운 화면들을 멀리 조망하다 이내 한발 다가선다. 화면을 눈으로 디디어 본다. 수평으로 나아가고 수직으로 파고드는 시선을 좇아 걸음을 옮긴다. 몸은 화면과 화면 간 경계를 짚으며 공간을 탐험한다. 눈보다 큰 몸으로 회화의 사건을 겪어내는 일이다. 박석민은 회화가 매개하는 정서적 움직임에 주목한다. 보이는 매체로 보이지 않는 일들을 이야기하고, 멈추어 있는 대상에 숨 쉬는 생명을 투영해 보는 시도다. 우리와 회화가 함께 거주하는 세계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흐르는 공기와 시간 속에서, 정적인 사물들은 감각되는 매 순간 생동한다.

회화를 바라보는 일이란 때로 청각적이고 종종 후각적이며 다분히 촉각적이다. 같은 세계에 머무르는 존재 사이 공명이며 살아 있는 몸에 깃든 정서의 감촉일 것이다. 동시대 매체 이론가 브라이언 마수미는 모든 추상의 실천이 시각뿐만 아닌 총체적 감각에 작동하며 그 연속적인 경험이 환기하는 것은 곧 생명의 추상적 힘이라고 했다. 회화는 언제나 정적 사물인 캔버스 위에 생동하는 세계의 경험을 옮겨 놓는 시도였다. 그리는 이가 화면에 맡긴 감정은 매번 다른 방식으로서 보는 이의 피부 아래 스민다.

박석민은 회화를 언어 삼아 일상의 바라봄에 대하여 질문한다. 보기의 방식을 시각 너머 감각으로 확장하고자 하는 시도다. 매일의 날들 가운데 보이는 것이 너무 많아 보이지 않는 세상은 자주 잊힌다. 시각의 공백 속 투명한 존재들은 때로 있음의 사실마저 유령화된다. 하늘 위 천체의 커다란 존재감은 눈에 의해 목격되는 순간 조그마한 깜박임으로 축소된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까만 여백은, 그저 한 무리 별빛을 송출하는 스크린으로서 전락한다. 화가의 임무는 바로 그 여백 위에서 붓을 들 때 주어진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때로 여전히 그곳에 있다.
‘마이닝 뎁스(Mining Depth)’(2022). 박석민 제공
◆현실을 밀어내는 화면

‘마이닝 뎁스(Mining Depth)’(2022) 연작의 화면은 중심에서 주변으로, 또는 모서리에서 중앙으로 나아가는 점진적인 빛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다수의 크고 작은 캔버스들은 유별난 설계자의 조각 난 도면처럼, 계획적이지만 논리적이지 않은 구조로서 현실의 벽면을 재구성한다. 개별 화면 속에서 색의 파동은 다양한 진폭으로 전개된다. 투명한 메아리가 물감을 둥글게 밀어낸다. 그 명상적 울림은 또 다른 파장과 조우하는 순간 가느다란 현재의 선에 가로막힌다. 파동이 맞닿는 경계마다 화면 밖 세상은 수평선으로 응축된다. 현실은 화면 사이 경계선을 따라가다 수직의 절벽으로 추락하거나, 완만한 호를 그리며 미끄러지듯 사라진다.

둥글게 비워진 모서리의 부재는 마치 시야의 잃어버린 빈자리 같다. 망막의 가장자리에서, 시각 세계는 홀연히 사라진다. 미지의 어둠을 메우는 것은 주로 경험에서 비롯된 직관이다. 시야 바깥에 놓인 캔버스의 네모난 모퉁이를 예견하는 직관은 무심한 부채꼴의 여백을 마주하는 순간 부정당한다. 애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그것은 수면 먼 곳의 연무를 바라보며 미지의 존재를 상상하는 일이다. 미처 다 가누지 못해 두고 떠난 꼬리가 안개처럼 흔들린다. 무언의 흔들림은 사람이 되고, 구름이 되고, 곧 무엇도 닮지 않은 추상이 된다. 신비로운 꼬리는 마치 부채꼴의 공백처럼, 잡으려 하면 미끄러지고 보고자 하면 사라진다.

◆바라봄의 주위에서 확장되는 세계

긴밀하게 기대어 선 메아리들은 오직 하나의 세상에 속한 사건이 된다. 회화가 매개하는 정서는 그 총체적 화면이 작동시키는 감각에 의하여 생겨난다. 멈추어 있는 존재를 생동하는 몸으로서 마주하는 경험은 내밀한 세계를 조심스레 일깨운다. ‘마이닝 뎁스’ 연작에서 다양한 규모의 화면들은 서로 결합하여 거시적인 구조를 이룬다. 개별 캔버스의 미시세계를 관찰하고자 하면 스스로 몸을 움직여 시야의 너비를 조정해야 한다. 보기의 방식에 따라 회화의 화면은 아득히 멀어지거나 닿을 듯 가까워진다.

아크릴 물감 주조의 화면 가운데 때로 두꺼운 유채의 흔적이 보인다. 윤곽을 따라 정교하게 얹은 묵직한 질감은 촉각을 자극하는 동시에 수직 방향으로 하강하는 시선의 계단을 형성해낸다. 소형 캔버스 연작 ‘스펙트롤로지(Spectrology)’(2022)가 벽면에 설치된 방식은 ‘마이닝 뎁스’의 그것과 대조적이다. 각각의 화면은 독립된 개체로서 벽면 위에 나열된다. 다채로운 색과 빛의 파동은 저마다의 여백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며 커다란 하나의 군집을 이룬다. 일련의 연작은 시선의 수평적 경로에 간섭하는 한편 수직적 깊이의 변주 또한 시도한다. 보는 이의 정서가 감응하고, 신체가 반응한다. 수평 수직의 방향으로 전개되는 회화의 세계는 비로소 평면 너머의 차원으로 확장된다.
‘엔젤 테일(Angel Tail)’(2022). 박석민 제공
◆천사의 꼬리: 잡히지 않는 존재들

새벽안개처럼 모호한 장면들 가운데 종종 또렷한 사각의 색면이 끼어든다. 박석민에게 그 빈칸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그럼에도 “감각하려는 시도”이다. 안팎을 가르는 선명한 윤곽이 감성에 끼어든 이성 같고, 꿈속에 난입한 현실 같다. 그것은 덮인 얼룩인 동시에 뚫린 부재이다. 생경한 공백 위에 알 수 없는 모든 일을 투영해 본다. 윤곽 내부에서 파장의 경로는 비밀이 된다. 메아리의 출처 없는 꼬리들, 나선형으로 비껴가고 도돌이표처럼 돌아오는 천사의 꼬리들을 붙잡아야 한다.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지금의 시간, 추상적으로만 생동하는 현재의 사건을 회화에 머무르도록 하는 일이다. 현재란 유령 같은 것이라서 오로지 지나간 흔적으로만 목격된다. 그것은 과거의 지나간 자국인 한편 미래를 기다리는 빈칸이다.

박석민은 붓으로 밑그림을 완성한 후 에어브러시로 채색한다. 손의 개입을 덜어내고 물감과 공기, 또 중력을 섞어내는 데 알맞은 도구다. 가까이 다가가면 두텁고 촘촘하게, 멀리 물러나면 가볍고 광활하게 현재의 피부에 닿을 수 있다. 물감의 입자들은 오늘의 공기를 머금고 저마다의 자리 위에 내려앉는다. 서로 다른 현재를 삼킨 색의 알갱이들은, 조용한 들숨과 섬세한 날숨으로 자신들만의 우주를 창조해간다. 바탕을 마련한 붓의 흔적은 실재하는 장소의 색채를 머금고 있으나, 작업이 진행될수록 기억 속 이미지는 현재의 우연성에 뒤덮여 흐릿해진다. 아지랑이처럼 애틋한 시간의 궤적이 ‘엔젤 테일(Angel Tail)’(2022) 연작의 화면을 수놓는다. 각각의 화면이 품은 것은 나아가는 빛의 속도와 하강하는 유성의 무게, 섬광과 공백의 찬란하고 아득한 감각이다.

바라봄이란 시야 안팎의 세상을 보이지 않는 감각으로 소화해 내는 일이다. 회화의 화면은 그것을 또다시 손에 잡히는 물성과 눈에 보이는 색채로 옮겨낸다. 착시가 만들어 낸 유성의 꼬리로부터 풍경이 감춘 본질을 상상하는 일처럼, 안 보이는 것들은 때로 더 보이는 무엇이 된다. 떠나간 시각의 공백을 그저 비운 채 미끄러지는 현재의 모양을 응시한다. 보다 큰 감각으로, 보이지 않는 화면의 층계를 디디어 본다.

박미란 큐레이터·미술이론 및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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