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민의 문화 이면] 기차에서 이태준을 읽다

2024. 3. 1.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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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펴낸 근대작품 읽으며
시간적 거리감에서 여유 느껴
궁핍한 시대의 문학이 주는
내면의 기둥도 얻게 돼
글의 내용 더 잘 담아내주는
서체와 디자인·종이도 한몫

문상하러 내려가는 기차에서 읽을 책이 필요했다. 설 연휴를 앞두고 있어 겨우 구한 기차표가 촉급해 무작정 손에 잡은 게 이태준의 단편소설집이다. 올해 초 열화당에서 나온 이태준 전집 1차분 네 권 중 첫 번째 권이다. 이태준은 1930년대에 빼어난 작품들을 발표한 월북 작가로서, 나는 산문들은 좀 읽었지만 소설은 한두 편 읽은 기억밖에 없다. 빈자리가 하나도 없는 기차에서 그의 작품을 열 편가량 읽었다.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에선 긴장과 스트레스를 받는 반면, 근대 시기 작가들의 작품에선 늘 편안함을 느껴왔다. 동시대의 글들은 심리적 거리가 충분치 않다. 작품 속 인물들이 처한 상황이나 딜레마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반면 근대 시기의 작품들은 시간적 거리로 인한 여유가 있다. 동시대 작품엔 미학적으로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고 쉽게 평가자의 입장이 되곤 한다. 몰입을 방해하는 미숙한 표현, 작위적 설정, 윤리적 회피나 과잉을 만나면 머릿속에선 처형극장이 연출된다.

반면 근대 시기의 작품들은 우리가 넘볼 수 없는 경험적 지평에서 얻어진 것들이라 호기심과 경외감이 감상의 주조를 이루게 된다.

그런데 이런 건 일반적인 얘기다. 이것 말고 좀 더 개인적으로 나는 근대라는 시기의 특수성에 더 이끌리는 것 같다. 나는 궁핍한 시대의 문학이 좋다. 젊은 시절 읽은 소설 중 가장 좋았던 게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이나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인 것도 그런 멘탈의 산물이 아닐까 의심해본 적이 있다. 평안북도 정주가 고향인 시인 백석이나, 강원도 철원이 고향인 이태준이나, 평안북도 곽산에서 자란 김소월이나, 함경북도 성진이 고향인 최서해 등은 변방에서 태어나 성장한 후 경성으로 와 언론이나 잡지사의 문예부원이 되기도 했고, 교직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나라는 일제에 빼앗겼지만, 그런 것이 사회의 모든 문화제도가 신생하면서 갖춰지는 활력마저 빼앗아버린 건 아니다. 고향을 떠난 젊은이들이 세련된 도회지에서 자신이 선명하게 기억하는 가난과 궁핍을 발견하고 묘사하는 그 과정이 그들의 작품만큼이나 담백하고 순정하게 다가오곤 했다. 넉넉한 가난이라는 건 형용 모순이지만, 작품 속 묘사된 가난이 독자의 마음에 담겼을 때 우리는 가난을 견딜 만한 하나의 내면적 기둥을 얻게 되는 것도 하나의 이치라면 이치일 것이다.

내가 기차에서 읽은 이태준의 1930년대 초반 작품들은 죽은 어미의 시신을 곁에 두고 초상 치를 관값을 벌기 위해 경성의 거리에서 남정네를 호객하는 젊은 여인의 이야기라든지, 동가식서가숙하며 개천에서 옷을 빨아 입되 여태 살아온 삶의 틀을 벗어던지지 못한 채 그로테스크하게 늙어가는 초로의 단벌신사 등이 등장한다. 너무나 생생한 인물들은 상상의 소산이라기보다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사연들이 작가에게로 와 정착한 것으로 보이며, 과하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밥 한술 덜 뜨는 듯, 구성질 듯하다가 단추를 여미는 단편의 미학을 오랜만에 잘 느껴보았다.

책이란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형식이 미묘하게 독서를 장악한다. 국내 출판사로서는 드물게 창사 이래 일정한 톤의 디자인을 유지하면서도 미세하게 변화의 시도들을 누적해온 열화당의 특징은 이번 전집에서도 잘 드러난다. 백 년 전의 작품을 완전히 현대화한 것도 아닌, 그렇다고 표 나게 근대 시기 작품입네 하는 호고주의도 아닌 적당한 경계의 그릇에 잘 담아냈다고 할까.

활판 인쇄 때 쓰던 금속활자는 아니지만 그런 느낌을 살린 서체를 사용했고, 미색에 약간 거칠게 만져지는 종이로 세월이 앉은 질감을 만들어냈다. 오래 고심했을 자간과 행간도 편안했다. 요즘엔 쓰이지 않는 고어에 일일이 각주를 달지 않고 꼭 필요한 곳에만 달아준 것도 독자의 마음을 오래 들여다보려고 한 노력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잘 관리해 새 옷처럼 느껴지는, 좋은 냄새가 나는 헌 옷을 개어놓은 느낌이었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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