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마시는데 FBI·007이 왜 나와?…어느 괴짜 양조자의 ‘순수’ 덕질 (下) [전형민의 와인프릭]
*부르고뉴의 괴짜로 통하는 와인 양조자, 로랑 퐁소와의 인터뷰를 상·하편으로 나눠 전합니다. 상편을 먼저 읽으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쾅쾅쾅!) FBI! open up!” 전세계인에게 익숙한 밈(meme)이죠. 미국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범죄자 소굴을 습격할 때 으레 나오는 음향효과입니다. 여기서 FBI는 우리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 미국 연방수사국(Federal Bureau of Investigation)의 약자인데요.
와인업계에도 FBI가 활동한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와인 위조의 대가, 루디 쿠르니아완(Rudy Kurniawan) 사건인데요. 루디는 자신의 천재적인 감각을 이용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와인들을 모방해 만들어낸 후 팔아먹은 사기 혐의로 FBI에 검거됐고 재판을 통해 10년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최근 형기 중 8년여를 마치고 석방돼 싱가포르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싱가포르 국적 와인 저널리스트인 린(Lin Weinwen)은 그에 대해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를 오간다는 소리를 들었고, 루디를 좋아하는 돈 많은 부자들의 사적인 파티에 가끔 등장한다고 알려졌다”고 현지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는 루디에 대해 묻자 “2023년 2월에 나와 루디와 싱가포르에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적이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그와 연결해주려고 했지만, 단호히 거절했다”고 답했습니다. 이어 “그를 다시 보고 싶지 않다. 그는 술의 정신을 더럽힌 악한 존재이며 우리는 공통점이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루디가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며 “나는 그의 행동을 용납하지 않고, 싱가포르나 홍콩에 있는 지인들에게 진지하게 말함으로써 그것을 막으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루디와 로랑의 이야기는 영화 ‘Sour Grapes’로 만들어지기도 했고, 로랑 스스로 지난해(2023년) 루디와의 이야기를 담은 책 FBI(Fausses Bouteilles Investigation·Fake bottle investigation, FBI와 약어만 갖도록 제목을 지음)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와인 산업 역사에 남을 이 사건이 더 궁금하시다면 영화를 찾아보시는 것도 추천합니다.
그가 적용한 대표적인 신기술을 몇 가지 소개해볼까요. 가장 먼저 영화 속 영국의 특수요원 007이 들고 다닐 법한 007 가방을 들 수 있습니다. 으레 다른 와이너리들이 쓰는 나무 박스가 아니라, 지능형 박스(Intelligent cases)라 불리는 자체 고안한 박스에 와인을 담아 배송·판매하는 건데요.
이 박스, 단순히 모양만 그럴싸한 게 아닙니다. 와인은 양조(병입) 이후 최종 소비자가 오픈할 때까지의 보관도 무척이나 중요한데요. 박스는 내부의 온도가 어떻게 유지됐는지를 관찰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습니다.
옆면에 NFC(near field communication·근거리 무선 통신) 칩을 삽입해 자체 배터리로 케이스 내부의 온도를 매 3시간 마다 무려 15년 동안 기록하도록 돼있죠. 모든 소비자는 자신 스마트폰의 NFC 모드를 사용해 지능형 박스가 어떤 온도로 관리돼 왔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각 병마다 각각의 캡실에 또 다른 NFC와, 라벨 한쪽 구석에는 변온 마크도 부착해뒀습니다. 병목 NFC는 와인의 진품 여부를 판별하는 용도입니다. 변온 마크는 와인이 버틸 수 없는 온도까지 올라가게 되면 색이 바뀝니다.(초록→검정) 병을 따지 않더라도 와인 상태를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이런 코르크에도 몇 가지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삭는다는 고질적인 문제와, 병이 세워진채로 오랫동안 보관되거나 너무 더운 지역(예를 들어 적도)을 지날 때 코르크가 말라서 쭈그러들고, 병에 공기가 들어가 와인이 산패하기도 합니다.
로랑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80년대부터 코르크 마개 대체 마개를 고민했고, 결국 총알 모양의 신소재 마개(technological closures)를 만들어냅니다.
아울러 포도주 양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발효 과정을 위해서는 원뿔형 발효조(레드 와인용)와 우주선 모양 발효조(화이트 와인용)를 직접 설계·제작해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전통과 뼈대있는 와인 양조 가문 출신 로랑이 이토록 신기술을 아낌없이 쏟아붓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요샛말로 어그로(관심)를 끌기 위한 마케팅 전략이라고 폄훼하기도 하는데요.
그는 이런 의심의 눈초리를 쿨하게 웃어 넘기며 “와인 생산에 불필요한 개입이나 첨가물 없이 와인을 생산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혁신을 모든 수준에서 사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현대에 와서는 그 변질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산화황(sulphite)을 넣기도 하죠. 이러한 외력의 개입이 최소화된 상태의 와인을 최종 소비자에게 전해주고 싶은 양조자의 욕심을 신기술로 풀어내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그의 와인에서는 수확 후 수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봄과 같은 풋풋함과 생동감 넘치는 싱그러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로 로랑이 전하고 싶었던 순수일 겁니다. 반대로 많은 애호가들은 그의 와인에서 오크를 사용하면서 나타나는 다소 무거운 뉘앙스들을 찾는 것을 어려워 합니다.
한편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의 로랑에게 ‘앞으로도 계속 신기술을 발굴하고 접목하고 싶느냐’는 마지막 질문을 던졌는데 “만약 (기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만들면 된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동양에서 성인으로 추앙받는 공자는 사람이 나이 일흔에 이르면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 不踰矩·줄여서 종심)라고 했습니다.
마음 먹은대로 행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는 경지, 인생을 살면서 여러 풍상을 겪으며 인격이 원숙해졌다는 뜻을 품고 있는데요. 종심에 다다른 로랑의 계속되는 도전을 응원해봅니다. 어쩌면 10년, 20년 후에는 모든 와이너리가 로랑의 신기술을 당연한듯이 쓰고 있지는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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