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선 친근했고 무대선 묵직했다... 70년 외길 연극배우 오현경 별세
70년 연기 외길을 걸어온 연극배우 오현경(88)씨가 1일 오전 9시 11분 경기 김포의 요양원에서 별세했다고 유족들이 전했다. 오씨는 지난해 8월 뇌출혈로 쓰러진 뒤 6개월 넘게 투병 생활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대중적으로는 1987년부터 6년여 방송된 드라마 ‘TV 손자병법’에서 늘 부장 진급에 실패하는 만년 과장 이장수 역을 맡아 평범한 직장인의 애환을 맛깔나게 그려낸 탤런트로 이름을 알렸지만, 그는 천생 연극배우였다.
서울고 2학년 때 공부 잘 하는 학생들과 함께 교장 선생님을 설득해 연극반을 만들었고, 3학년 때인 1955년 전국 고교생 연극 경연대회에 유치진의 작품 ‘사육신’으로 출전했다. 그가 맡은 역할은 성삼문. 첫 무대 데뷔였다.
문학을 하는 학과에 가면 연극도 배울 수 있겠다는 생각에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다. 1학년 때 파격적으로 응원단장을 맡을 만큼 무대 자질이 남달랐다. 연세대 연극 동아리 연희극회(연세극연구회)에서 연극을 했다. 학교 노천무대에 올린 연극에 7000명이 몰릴 만큼 대학 시절부터 명성이 높았다. 그는 평소 누가 대학 전공을 물으면 “연극”이라고 답하곤 했다.
TV에선 가볍고 친근했지만, 연극 무대에선 늘 묵직했다. 극단 실험극장 창립 동인으로, ‘휘가로의 결혼’ ‘맹진사댁 경사’ ‘봄날’ ‘3월의 눈’ 등 수많은 무대에 섰다. 한 음절도 허투루 다루지 않는 울림있는 목소리, 맡은 배역을 살아내듯 깊이 있는 연기로 늘 무대의 무게중심을 잡아주는 배우였다. 1970년대 그가 출연해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한 연극 ‘허생전’은 명동성당까지 표를 사려는 줄이 이어지고, 표를 못 구한 관객들이 극장 유리창을 깨고 뛰어들면서 기마 경찰이 질서 유지에 나서야 했을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1994년 식도암, 2007년 위암 수술을 받는 등 끊이지 않는 병마(病魔)에 시달렸지만, 그의 연기 투혼은 식지 않았다. 말년에도 ‘햄릿’ ‘레미제라블’ 등의 작품에서 주·조연 단역을 가리지 않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무대에 서며 후배 배우들의 모범이 됐다. 식도암 수술을 앞두고 쓰러졌을 땐 전기충격기 응급치료를 받고 깨어났다. 부인인 배우 윤소정씨가 남편이 죽은 줄 알고 울고 있었다. 그 때 막 눈을 뜬 오현경은 “이 사람아, 왜 그래! 창피하게!”라고 호통을 쳤다.
TV 출연으로 각광받으며 당시 돈으로 집 두 채 가격에 해당하는 거액의 광고를 제안 받기도 했지만 ‘예술 하는 사람이 어떻게 상업 광고를 찍느냐’며 거절했던 일화도 유명하다.
연극계에서도 첫 손에 꼽히는 발성과 화술의 대가. 2001년 사재를 털어 배우 재교육 연구소 ‘송백당’을 세워 배우들에게 우리말 모음의 장·단음 구별법과 억양을 가르치기도 했다. 생전의 그는 “연극배우는 청중이 300명이든 500명이든 똑같이 듣도록 발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아연극상(1966), KBS연기대상(1992), 서울시문화상(2011) 등 많은 상을 받았고 대한민국연극제, 서울연극제 등에서 연기상을 받았다. 2013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됐고, 보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이해랑연극상 수상자인 아내 윤소정 배우와는 1964년 TBC 1기 공채 탤런트로 만나 결혼했으며, 2017년 6월 사별했다. 오현경은 부인을 잃고 반년여 만에 국립극단 연극 ‘3월의 눈’(배삼식 작, 손진책 연출)을 시작했다. 곧 뜯겨나갈 한옥에 사는 피란민 노부부 이야기인데, 오현경이 연기한 할아버지는 먼저 세상을 떠난 할머니의 영혼과 줄곧 한 무대에 섰다.
유족은 딸 오지혜 배우와 아들 오세호씨. 빈소는 연세대학교 신촌장례식장 12호실, 발인은 5일 오전 5시20분, 장지는 천안공원묘원. (02)2227-7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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